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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울지 않기를

#미투
등록 2018-08-21 19:12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2016년 가을, 한국 예술계에선 성폭력 고발이 잇따랐다. 당시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타고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일들의 진위 여부에 여전히 수많은 (그러나 폭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따지는 아주 단순한) 논란이 일고 있지만, 어렵게 마련된 공론화의 장에서 불거진 일들은 놀랍고 새로운 일이 전혀 아니다. 때를 기다린 듯 일제히 쏟아져나온 예술계 내 성폭력 문제를 예술계 바깥에서 본다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게 가능해? 나에게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가능하다고 대답하겠다. 다시 말하지만, 겪어본 사람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더 많다 해도 지금 그들을 설득해 믿게 만드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협박과 고소에 맞선 싸움

안타깝지만 진실은 누구라도 자신이 있는 곳으로 가져와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진실이 자신에게 있다며 깃발을 흔드는 사람을 따르다보면 곧장 혼돈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어디로 방향을 잡든 엉뚱한 곳에 이르게 돼 있다. 진실은 때에 따라 어느 쪽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모습 그대로 자신이 있을 곳에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살아 있는 동안 폭력에 길들지 않고 폭력을 거부하는 삶이 있는 쪽으로 최선을 다해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 삶이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지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서로 방향을 일러주고 길을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공론화의 장에서 피해 고발자들은 자신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협박과 고소에 시달리며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협박의 모습은 실로 다양하고 가끔 상상을 초월하지만 대체로 비슷한 수법으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말해도 모자라지만, 여성이 공론화라는 이토록 열악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에 주목해야 한다. ‘꽃뱀’이란 수식이 유독 여성에게 따라붙는 이 무지한 현상에 더욱 악착같이 주목해야 한다. 그리하여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집단의 무지와 싸워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모두의 광장에서 일제히 폭발하는 표현의 자유를 막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그 자유를 어떻게 쓰는지는 사용자에게 달렸다는 것을 일러두고 싶다. 안타깝게도 삶의 질을 타인이 높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난 몇 년간 힘겹게 이어져온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운동은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이들과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위험하고 열악한 지점을 개선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외침이다. 나는 최소한일지라도 안전한 조처를 한다는 자각이 있는 직업군에서 일하고 싶다. 이는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과 관련해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문단_내_성폭력’을 비롯한 현재의 ‘미투’ 운동은 누군가를 지목해 하루아침에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한 황당무계한 해프닝이 아니다. 나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폭력을 외면하지 않고 더 이상 폭력에 침묵하지 않으려는 고통에 찬 목소리에 귀 기울이길 바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그들의 편에서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주기 바란다. 그러자면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타인에게 가해지는 해악인지 새롭게 정의하고 그것을 지침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인식을 바꿔나갈 수 있어야 한다.

상처 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앞으로도 이제 막 시를 쓰기 시작하는 여성들이 상처 받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무조건 그들 편에 설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를 쓰기 시작하는 남성들이 상처 받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무조건 그들 편에 설 것이다. 나는 나의 처음을 기억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처음에 혼자 서 있었을 때의 마음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그 처음에 서 있을 수많은 이가 자신의 방에서 혼자 울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유진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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