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면 오직 가족을 위한 기억과 추억 쌓기에 집중하게 돼. 너만의 행복한 기억과 추억은 사라져버려. 모두가 한목소리로 엄마 역할만 이야기할 뿐이지.”
엄마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에 나오는 대사다. 서영희(채시라)는 혼전 임신한 대학생 정효(조보아)에게 ‘나’를 포기하고 ‘엄마’가 되어야 하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앞으로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모성 신화에 갇혀 살게 될 거라는 선배 엄마의 냉정한 충고다.
비단 드라마 속 엄마들만의 이야기일까? 현실의 엄마들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등 모성 신화를 깬 엄마의 에세이가 잇따라 나왔다. 어떻게 해야 좋은 엄마가 되는 책이 아니라, 슬프고 화나고 아팠던 엄마의 경험이 새겨진 진솔한 책들이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페미니즘 열풍을 타고 출판시장에 여성, 특히 엄마들의 다양한 서사가 등장하고 있다.
“엄마는 ‘맨스플레인’ 핵심 대상”를 쓴 정아은 작가는 13살과 9살 두 아들을 둔 엄마다. 그는 엄마 경력 10년차가 되어서야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아등바등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 책 덕분이다. 그중 을 읽고 당연한 것으로 강요받았던 모성이 20세기 전후에 권력과 자본이 만든 것임을 알았다. 을 읽고서는 아이를 키우면서 슬픔, 분노, 후회 등의 감정을 자신이 못나거나 비정상이어서 느낀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자신을 짓누르던 자책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애는 엄마가 키워야지’, 엄마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훈수를 둬요. 결혼도 하지 않고 24시간 내내 육아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들이 엄마 역할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해요. 부모 교육 강연이나 육아서를 보면 엄마의 역할만 강조하고요. 엄마는 ‘맨스플레인’(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의 핵심 대상인 것 같아요.”
정 작가가 그러했듯 엄마들은 사회가 암묵적으로 강요한 ‘모성애 코르셋’에 갇혀 있다. 그것이 바로 모성 신화다. ‘엄마에게는 날 때부터 자식을 보살피는 본능인 모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본능을 거스르는 사람’은 모성 신화로부터 이탈한 비정상인으로 본다. 그러다보니 엄마됨의 어려움, 고통, 불행, 자괴감, 후회는 최대한 드러내선 안 되는 분위기가 된다.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거 아니야?” “애엄마가 왜 그래!”라는 말로 비난한다.
‘어머니 찬양’과 ‘어머니 비난’ 사이에서는 “‘어머니 찬양’과 ‘어머니 비난’은 사회에서 모성 이데올로기가 유지될 수 있게 해주는 담론”이라 지적한다. 이상적 어머니를 예찬함으로써 그렇게 되지 못하는 현실의 많은 엄마를 나쁜 어머니로 낙인찍는 것이다. “어머니 찬양과 어머니 비난을 통해 여성들은 어머니로서 구성되고 규율되고 통제된다. 이를 통해 자녀 양육은 어머니 몫으로 지속되고 여성과 남성의 성별 분업은 유지되며, 가부장적 사회구조는 더 튼튼해지는 것이다.”
결국 드러내놓고 엄마의 힘듦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을 쓴 안미선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산후우울증이 심한 한 여성분을 인터뷰했어요. 그분이 길거리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걷다가 많이 울었다고 해요. 아이를 낳고 내가 사라져버렸다고. 그런데 이런 자신의 변화와 감정을 이야기할 수 없는 분위기라는 거예요.”
이 모성의 실체는 무엇일까.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에서 “모성은 근대가 발명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근대 이후 남성 중심 가부장적 가치가 부각되면서, 남성의 사회적 지위는 크게 높아졌다. 상대적으로 여성의 삶은 오히려 가정의 틀 안에 머물게 됐다. 그렇게 시장의 생존경쟁에 내몰린 남성에게는 안식을 제공해줄 가정이 필요했다. 아내이자 어머니인 여성은 편안한 안식처인 가정을 꾸리는데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모성애는 그렇게 탄생했다.
수많은 여성은 관습에 따라 모성애를 강요당했다. 자식 사랑이 남들만 못하다고 느끼면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만들어진 모성’에 의해 출산과 양육의 짐은 여성에게 지워졌다.
모성 신화는 시대가 바뀌어도 여성들을 끈질기게 붙잡는다. 21세기 여성이 경제활동에 참여해도 돌봄·가사 노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제도와 인식은 변한 게 없다. 실제 부부 사이에 자녀 양육을 위한 돌봄노동과 집안일을 처리하는 가사노동 불평등 현상은 심각하다. 2017년 1월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이 발간한 ‘기혼 여성의 재량시간 활용과 시간관리 실태 연구’ 보고서를 보면, 맞벌이 부부 중 아내가 가사노동에 쓰는 시간은 하루 평균 3시간27분으로, 남편의 58분보다 3.6배 많았다.
에는 침묵을 깬 엄마들의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가 담겼다. “엄마로서 삶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요?” “육아의 즐거움은 모르고 살았어요. 남편은 여섯 시에 나가서 애들 자면 들어오고, 주말에도 일하고요. 경력단절 상실감이 커서 제 인생이 없어지는 기분이었어요.” “둘째를 낳은 뒤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없을 거란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자기 일과 가정을 함께 가져가더라고요. 세상에 구조적으로 배신당했다는 느낌이 들고, 내 헌신은 무얼까 싶어 우울했어요.” 이 엄마들의 말에는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 슈퍼우먼 신화와 그에 따른 콤플렉스, 육아를 오로지 엄마에게만 떠넘기는 사회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무엇이 여성을 가정 안에 가두는가, 무엇이 여성을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전담자로 지목하는가. 무엇이 여성에게 이중 노동의 짐을 지우는가. 를 쓴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의 엄마들은 이 사회에 이런 질문을 던지며 그것의 대안으로 ‘집단 모성’을 제안한다.
‘집단 모성’이 필요한 때‘정치하는 엄마들’의 장하나(전 국회의원) 공동대표는 “집단 모성은 ‘모두가 엄마다’라는 의미다. 여기서 모성은 생물학적 여성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것”이라며 “아이 키우는 일이 사적 영역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모든 구성원과 제도, 그리고 구조의 책임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집단 모성’을 통해 아이들을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서로 함께 돌보고 아이 키우기 좋은 사회구조를 만들자는 뜻이다.
엄마들은 엄마 노릇의 규범과 역할에 의문을 던지고 모성 신화에 반기를 드는 투쟁 중이다. 이러한 투쟁으로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한 인간으로서 자아를 되찾으려 한다. 자신을 옭아맨 모성애라는 코르셋을 벗으며.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뉴진스 “29일 자정 어도어와 전속계약 해지…광고·스케줄은 그대로”
[영상] 명태균 “조은희 울며 전화, 시의원 1개는 선생님 드리겠다 해”
한동훈 ‘도로교통법 위반’ 신고…“불법정차 뒤 국힘 점퍼 입어”
러, 우크라 전력 시설 폭격…영하 날씨에 100만명 단전 피해
친한, 김건희 특검법 ‘불가→유보’ 기류 변화…친윤 공세 방어용인가
명태균 처남의 이상한 취업…경상남도 “언론 보도로 알았다”
이명박·박근혜가 키운 ‘아스팔트 우파’, 현정부 언론장악 전위대 노릇
포근한 올 겨울, 축축하고 무거운 ‘습설’ 자주 내린다
의사·간호사·약사 1054명 “윤석열 정책, 국민 생명에 위협”
전쟁 멈춘 새…‘이스라엘 무기고’ 다시 채워주는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