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프로야구에 빠져 있던 시대였다. 동네 아이들은 MBC 청룡이나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아빠를 따라 야구를 보러 다녔다. 나는 도무지 야구라는 스포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죽을 덧대 만든 무거운 공을 나무를 깎아서 만든 방망이로 치는 것에 대체 어떤 카타르시스가 있는지 이해되질 않았다. 선생들은 남자아이라면 응당 야구를 좋아해야 한다고 믿었다. 체육 시간은 언제나 야구 아니면 축구였다. 어쩔 도리 없이 차례가 돌아왔다. 공이 날아오면 눈을 감았다. 방망이를 휘둘러야 할 때도 눈을 감았다. 애들이 웃었다. 내가 서 있고 싶었던 곳은 마운트가 아니라 아이스링크였다. 내 영웅은 최동원이 아니라 동독 피겨스케이터인 카타리나 비트였다. 그 이야기를 하면 모든 남자아이는 물론 여자아이들까지 웃을 터였다. 1980년대란 그런 시절이었다.
남자니까 야구? 내 사랑은 피겨카타리나 비트를 나는 1988년 캘거리겨울올림픽 중계로 처음 봤다. 다른 선수들도 빛났지만 비트는 달랐다. 비트가 있었다. 그는 마이클 잭슨의 에 맞춰 얼음 위에서 ‘문워크’를 했다. 내가 비트와 사랑에 빠진 건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클래식 음악을 틀고 우아하게 얼음 위를 지쳤다. 비트는 1980년대 모두가 알던 히트곡을 틀어놓고 ‘이거 진짜 재미있지 않니?’라는 표정으로 놀았다. 나도 그렇게 놀고 싶었다. 듀란듀란의 음악에 맞춰 얼음 위를 지치고 싶었다. 불행하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나는 경남 마산에 살고 있었다. 마산은 눈이 좀처럼 내리지 않는 도시고, 시내에는 아이스링크도 없었다. 대신 나는 롤러스케이트장에 가서 바퀴를 굴리며 비트가 된 것처럼 끼를 떨었다.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피겨스케이팅에 빠지자 겨울올림픽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축제가 됐다. 그리고 나는 1992년 알베르빌겨울올림픽 중계를 보다 카타리나 비트를 넘어서서 내 마음속 넘버원이 된 선수를 발견했다. 흑인 선수가 하얀 아이스링크에 서 있었다. 프랑스 선수 쉬리아 보날리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1992년의 내가 그 장면을 이상하게 받아들인 것은 마음속 깊은 곳의 인종차별 때문이었을 수도, 혹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대한 이물감이었을 수 있다. ‘살색’ 크레파스라는 것이 존재하던 시절이었으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보날리가 피겨계의 첫 번째 흑인 선수인 것은 아니다. 카타리나 비트의 강력한 라이벌로 활동했고, 1988년 캘거리겨울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고 은퇴한 미국 선수 데비 토머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음속의 기묘한 편견과 처음 마주하는 계기가 된 인물이 보날리라는 흑인 피겨 선수였다고 말하는 건 온당한 표현일 것이다.
쉬리아 보날리는 시합 전 연습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동작을 선보였다. 다리를 위로 날리며 뒤로 점프한 뒤 한 발로 착지하는 백플립이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나는 기절했다. 남자 선수들이 간혹 백플립을 연습에서 선보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여성 선수가 마치 고난도의 서커스를 벌이듯이 백플립을 한 뒤 한 발로 착지하는 모습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보날리는 실전에선 백플립을 선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난 뒤 피겨스케이팅협회가 백플립이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기술을 본선에서 선보이는 순간 메달은 날아갈 터였다.
완벽했다, 그리고 2등1992년 알베르빌겨울림픽 2위는 일본 선수 이토 미도리였다. 이토는 거의 완벽하게 안전했다. 하지만 보날리가 5위를 차지한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보날리는 힘이 넘쳤다. 여성 스케이터로는 최초로 쿼드러플 토 룹을 성공시켰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예술점수를 깎아내렸다.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한 선수들에 비해 보날리가 딱히 엄청날 정도로 예술점수를 낮게 받을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보날리는 연습 중 이토 옆에서 백플립을 해 주최 쪽으로부터 강한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알베르빌올림픽 이후 보날리는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세 번에 걸쳐 세계선수권대회 2위를 차지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1994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피겨스케이팅 역사상 최고의 스캔들이 일어났다. 보날리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3명이 출전하지 않은 것도 유리했다. 기술적 기량도, 예술적 기량도 절정에 오른 상태였다. 일본 대표 사토 유카도 좋은 선수였지만 보날리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프로그램이 끝난 뒤 금메달은 사토에게 돌아갔다.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던 보날리는 시상대에 올라서길 거부하고 얼음 위에 섰다. 시상자가 그의 손을 잡고 억지로 시상대에 올려야만 했다. 보날리는 은메달을 목에 걸자마자 벗어버렸다. 아이스링크에 관중의 야유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보날리는 마이크를 갖다 대는 기자들에게 딱 한마디를 남겼다. “저는 그냥 운이 없습니다.” 정말이지 부당하고 또 부당한 결과였다.
나는 1998년 일본 나가노겨울올림픽에서 보날리가 금메달을 따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보날리는 나가노에서 아무런 메달도 따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치바 세계선수권대회보다 더 강렬한 방식으로 피겨스케이팅 역사에 남을 반역을 보여줬다. 아, 나는 이 이야기를 글로 지금 쓰는 것만으로도 1998년 그 순간 TV 중계를 보며 느꼈던 아찔함과 분노와 후련함을 다시 느끼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당신도 같은 감정에 사로잡힐 것이다.
보날리는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지만 도무지 기준을 알 수 없는 편파 판정 때문에 번번이 좌절했다. 보날리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 지바에서 엄청난 야유를 들으면서도 은메달을 목에 걸기 거부한 이유도 10여 년간 흑인 선수라는 사실 때문에 알게 모르게 가해진 편파 판정 때문이었다. 어쩌면 1998년 나가노는 보날리가 올림픽 메달을 거머쥘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피겨스케이터의 생명은 꽤 짧은 편이다. 그러나 보날리는 쇼트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해도 예술점수로 편파 판정에 시달리는 판에 큰 기술을 실패했으니 롱 프로그램을 잘 소화해도 메달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보날리는 피겨스케이팅의 세계에 엿을 먹였다. 롱 프로그램이 거의 끝나가는 순간, 그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백플립을 해버렸다. 피겨협회가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던 기술을 마지막 올림픽 무대에서 터뜨려버린 것이다. 보날리는 백플립 때문에 기술점수에서 엄청난 감점을 받고 결국 10위로 마무리를 했다. 결과가 나오자 관중의 야유가 빗발쳤다. 보날리를 향한 야유가 아니었다. 부당한 심판들과 경직된 피겨계를 향한 야유였다.
인종차별에 맞선 무릎과 주먹보날리가 처음 피겨 세계에 데뷔했을 때, 프랑스 피겨계는 그가 프랑스의 식민지이던 마다가스카르 근처 섬 출신이라고 홍보했다. 부모에게 버려져 해변에서 발견된 고아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프랑스 피겨계가 만들어낸 가짜 탄생 설화였다. 유일한 흑인 피겨스케이터를 보다 ‘이국적인’ 존재로 팔아먹기 위한 홍보 수단이었다. 그건 19세기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의 흑인들을 동물원과 서커스의 홍보 수단으로 삼았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다시 상기시킨다. 보날리는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분명히 인지하며 아이스링크의 인종차별에 맞섰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백인이었다면 훨씬 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며, 더 큰 지원도 따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0년대의 선수들은 정치와 스포츠가 완벽하게 분리돼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스포츠 세계에도 수많은 정치적 함의가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1980년대와 90년대는 달랐다. 모두가 스포츠와 정치는 완벽하게 분리돼야 한다고 믿었다. 피겨스케이터 누구도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았다. 보날리는 그런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자랑스러운 채식주의자이자 동물호보론자로서 PETA(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려는 사람들)의 홍보 모델로 활동했다. 바다사자 사냥과 모피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무엇보다 보날리에게는 역사에 남을 나가노의 백플립이 있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와 내셔널풋볼리그(NFL) 선수들은 전쟁을 치렀다. 트럼프는 국가가 나올 때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는 선수들에게 “개새끼들”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많은 미식축구 선수들이 국가가 흘러나올 때 항의의 의미로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마이애미 돌핀스의 줄리어스 토머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서 압제적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용기 있는 사람들을 겁주며 불평등을 받아들이라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나는 모두를 위한 자유와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동료들과 함께 무릎을 꿇겠다.” 라이언스의 구단주 역시 성명을 발표해 선수들을 지지했다. “오래전부터 미식축구는 대화와 긍정적 변화를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되어왔다.” 그러나 트럼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NFL 역시 “우리는 국기에 경의를 표해야 하고 팬들도 우리가 그러기를 원한다”며 결국 트럼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 꿇기 운동은 끝났다. 그러나 스포츠가 패배한 것인가?
더 많은 백플립이 필요하다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 육상 200m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미국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국가가 나오는 순간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하늘로 뻗었다. 미국 내에서 타오르던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하려는 의미에서였다. 그들은 즉각 선수촌 밖으로 추방됐다. 영원히 스포츠계에서 불이익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패배하지 않았다. 올림픽 역사에서 정치적 행동이 얼마나 거대한 의미가 있는지 상징하는 인물로 영원히 남았다. 미식축구 선수들도 패배하지 않았다. 나가노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 쉬리아 보날리 역시 패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종 스포츠 세계가 순결한 땀과 훈련과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가득한 인간 정신의 성전으로 남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 한 번도 그랬던 적 없다. 스포츠는 순결하지 않다. 올림픽은 순결하지 않다. 하얀 아이스링크도 순결하지 않다. 우리에겐 여전히 더 많은 백플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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