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결승선을 통과하면 누구 할 것 없이 지퍼를 내린다. 0.01초의 싸움이 끝나는 순간 비로소 몸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꽉 조인 유니폼 안에서 얼마나 숨을 참았을까. 그들은 하나같이 가쁜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전광판 기록을 확인하면서는 만감이 교차한다. 두 손을 번쩍 올리거나, 혹은 고개를 떨어뜨리거나.
그날도 그랬다. 400m 트랙에서 500m를 돌고 난 뒤 선수들은 저마다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모태범이 있었다. 1차 레이스에서 2위를 한 그는 2차 레이스에서도 자신감 있게 얼음을 타면서 1·2차 합계 1위에 올랐다. 월드컵 등에서 세계 수준의 기량을 자랑했던 이규혁도, 2006 토리노겨울올림픽 동메달에 빛나는 이강석도 아니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21살의 대표팀 막내가, 자신의 생일에 겨울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쇼트트랙 외의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것이었다. 한국 빙속 102년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밴쿠버겨울올림픽만큼 언론 등에서 ‘사상 최초’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온 대회도 없었다. 모태범이 그랬고, ‘피겨 여왕’ 김연아가 그랬다. 이승훈이나 이상화도 마찬가지였다.
이승훈은 체력 문제로 아시아 선수에게는 절대 불리하다고 평가받는 남자 5천m에서 은메달을 땄다. 아시아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팅 중장거리에서 따낸 최초의 메달이었다. 이승훈은 이후 열린 1만m에서는 2위의 성적으로 결승선을 통과했으나, 세계 최강자 스벤 크라머르(네덜란드)가 코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실격돼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시상대에서 은·동메달리스트가 합심해 이승훈을 목말 태운 사진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이상화는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메달 획득의 유무와 색깔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할 수는 없으나 이상화는 여자 빙속 역사상 처음 시상대 위에 올랐다. 이상화 이전까지는 동메달리스트도 없었다. 남자 선수들과 고된 트랙 훈련을 소화해내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결과물이었다.
밴쿠버 이전까지 한국의 겨울올림픽은 ‘쇼트트랙’으로만 대변됐다. 하지만 ‘07학번’ 한국체육대 ‘절친 3인방’의 활약으로 스피드스케이팅이 새롭게 떠올랐다. 전 국민은 쇼트트랙과 다른, 400m 트랙에서 겨루는 얼음 위 속도 대결에 또 다른 매력을 느끼며 레이스마다 숨을 죽였다. 더불어 짧은 트랙에서 펼치는 쇼트트랙 기술을 스피드스케이팅에 접목하면 기록 단축에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밴쿠버겨울올림픽 하면 ‘본드걸’ 김연아를 떠올리는 사람이 제일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맨발로 빙판 위를 걸어가던 이상화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울퉁불퉁 굳은살이 박인 하얗디하얀 발로 차디찬 얼음을 밟고 가던 ‘빙상 여제’. 기록 단축을 위해 이상화는 스케이트화를 맨발로 신는다. 역시 맨발로 2014 소치겨울올림픽에서 500m 2연패에 성공한 이상화는 2018 평창겨울올림픽에서 다시 레이스를 펼친다. 이승훈도 평창 때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매스스타트에서 1위를 노린다. 이들의 계속된 도전은 분명 밴쿠버 때 얻은 강한 자신감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밴쿠버겨울올림픽이 소름 끼치는 스릴러에 가까운 이유는, 그 각본 없던 드라마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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