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46)이 2월13일 오전 9시께(현지시각)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제2청사 출국장에서 암살당했다. 마카오행 비행기 탑승 수속을 하려던 참이었다. 괴한의 급습을 받은 김정남은 30m 떨어진 안내데스크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도움을 청했지만 병원으로 이송되는 구급차 안에서 결국 숨졌다. 그가 돌아가려던 마카오에는 부인 이혜경씨와 한솔·솔희 남매가 산다.
02 2명의 여성이 곁에 있었다. 베트남 여권을 가진 도안티흐엉(29)과 인도네시아 여권을 가진 시티 아이샤(25)였다. 아이샤가 김정남의 시선을 끄는 동안, 도안티흐엉이 뒤에서 몰래 접근해 스프레이를 뿌리고 독극물이 묻은 손수건을 얼굴에 10초 정도 누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곧바로 택시로 도주했으며, 이 중 한 명은 택시 기사에게 “나는 베트남에서 유명한 인터넷 스타이며 단편영화를 찍기 위해 말레이시아로 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범행 2~3일 만에 말레이시아 경찰에 따로 붙잡혔다.
03 4명의 남성이 지켜보고 있었다. 도안티흐엉은 “공항에서 만난 남성 4명에게서 ‘승객들에게 장난을 치자’는 제의를 받았다. 살인인 줄 몰랐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경찰은 2명의 여성 용의자는 물론 아직 체포되지 않은 4명의 남성 용의자 모두 특정 국가의 정보기관 요원이 아니라 살인 청부를 받은 암살단이라 보고 있다. 4명 중 북한 국적의 남성이 포함돼 있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다국적 암살단과 북한을 잇는 ‘키맨’으로 주목받고 있는 용의자다.
04 암살 배후를 밝힐 핵심 단서는 김정남의 시신이다. 김정남 시신 부검은 암살 이틀 만인 2월15일 쿠알라룸푸르 병원에서 7시간에 걸쳐 실시됐다. 북한대사관 직원들은 아침부터 병원을 찾아 “시신을 가져가겠다”고 요구했으나 부검을 막지는 못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경찰 수사와 의학 절차가 마무리되면 북한대사관을 통해 시신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인도하겠다”고 밝혔다. 김정남의 아내가 중국대사관을 통해 시신 인도를 요청했다는 현지 언론 보도도 나왔다.
05 독살이라면 그 증거는 시신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암살에 사용된 독의 제조·판매 경로를 따라가다보면 범행의 몸통이 나올 수도 있다. 부검 결과 발표 전이라 온갖 추측이 나온다. 식물 피마자 씨에 들어 있는 독성 물질인 리신, 복어 독인 테트로도톡신, 1994년 일본 옴진리교 신자가 회사원 살해에 사용한 VX가스 등이다. 과거 북한이 주요 인사 암살을 위해 독침에 묻혀 사용하던 브롬화네오스티그민도 거론된다.
06 그동안 적어도 5차례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 김정남이 2004년 오스트리아로 여행 갔을 때가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다. 아버지 김정일의 후계자로 김정은이 내정된 2009년 초부터는 거의 매년 살해 위기가 있었다. 그의 두려움은, 2013년 12월 마지막 보호막이었던 고모부 장성택의 처형으로 극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급기야 2014년 4월 동생 김정은에게 “저와 가족에 대한 응징 명령을 취소해주길 바란다”라는 편지까지 보냈다. 읍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정남은 “나는 덤으로 살고 있다”며 체념한 듯 지냈다.
07 국가정보원은 김정남의 죽음에 대해 ‘스탠딩 오더’(반드시 처리해야 할 명령권자의 명령)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2월15일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서 “이번 암살은 김정은이 직접 2012년 초 내린 지령에 따른 것”이라며 “김정남이 통치에 위협이 된다는 계산적 행동이라기보다 김정은의 편집광적 성향이 반영됐다”고 말했다.
08 형제는 서로 만난 적도 없었다. 김정일이 가장 사랑했던 둘째 부인 성혜림의 아들인 김정남은 이른바 백두혈통의 장손으로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9살부터 유학 생활을 했으며 이후에도 해외에서 북한 미사일 판매를 담당했다. 다만 2001년 일본 불법 입국 사건으로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제외됐다. 반면 김정은은 북한에서 2등 시민인 재일교포 출신 셋째 부인 고용희의 아들이다. 정통성 콤플렉스가 심한 김정은이 경쟁자를 완전히 제거하려 했을 수 있다. 김정남이 한국에 망명하기 전 처단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09 국제사회는 할 말을 잃었다. 중국은 김정남 일가의 신변을 비공식적으로 보호해왔다. 북한의 ‘레짐 체인지’(정권교체)에 대비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중국 관영 언론은 보도를 통제하고 있지만, 홍콩 언론은 “중국 인민군이 돌발 상황에 대비해 북중 접경 지역에 군병력 1천 명을 증파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공식 논평을 자제하고 있다.
10 위기의 순간에 정체성은 드러난다.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강조하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2~3개 포대를 우리 국방 예산으로 (추가) 도입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보 보수’를 자처하는 국민의당 안에서도 기존 ‘사드 배치 재협상’ 당론을 철회해야 하느냐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웬일로 빨랐다. 국정원이 김정남 피살 소식을 사건 직후 3~4시간 만에 파악했다. 일본 공안이 인지한 시점보다도 훨씬 이르다. 말레이시아 대사 출신인 이병호 국정원장의 인맥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김철’이란 가명 여권을 쓴 김정남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도 한국 정보 당국이 제공한 지문 등 생체 정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다.
김정남의 장남인 김한솔(22)의 안전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보스니아와 프랑스에서 유학을 한 김한솔은 2012년 김정은을 ‘독재자’라 칭한 적 있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2월15일 “김한솔을 포함한 김정남 가족은 모두 중국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첫째 부인과 아들 금솔은 중국 베이징에, 둘째 부인 이혜경과 한솔·솔희 남매는 마카오에 있다고 한다.
‘LOL’(Laughing Out Loud) 티셔츠가 관심받고 있다. 황당하게도, 사건 48시간 만에 범행 장소에 다시 나타나 경찰에 순순히 붙잡힌 도안티흐엉의 범행과 체포 당시 입었던 옷이다. “해당 티셔츠는 중국 온라인 쇼핑몰에서 6324위안(약 100만원)에 팔리고 있다”고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김정남 암살 뒤 판매가 갑자기 중단됐다고 한다. 도안티흐엉은 범행을 일절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사건 전날 공항에서 범행을 예행연습하는 CCTV 화면과, 독극물 병이 든 그의 가방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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