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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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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섹시해, 경차 모는 그 사람!

작은 차 가진 것 보고 ‘생활력 좋다’고 판단하는 일본 젊은이들, 우리나라선 가능할까?
등록 2015-05-29 15:52 수정 2020-05-03 04:28

“얼마 전에 롤스로이스를 타는 사람을 봤는데 하나도 멋지지 않더라고.”
일본의 남쪽 섬 규슈에서 만난 아키사다 조이치(32)의 말은 믿기지 않았다. 롤스로이스를 타는데 멋있지 않다니! “예전에는 수입차를 타는 사람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경차를 타는 사람이 인기가 있다니까.” 혹시 일본어를 잘못 통역해주나 싶어서 통역사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진지한 표정이었다. ‘여자들이 경차를 타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신소윤 기자

신소윤 기자

“에이, 네가 좀 다른 사람이라서 그러겠지. 보통 일본 청년들은 안 그럴 것 같은데?” 청년들이 떠나는 일본 농촌에서 아키사다는 농사일을 배우고 있는 젊은이다. “일본은 경제성장만 바라보고 달려와 공동체 문화가 무너졌다”고 말하는 그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살기 위해, 자립하기 위해 농업을 배우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건실한 이다. 일을 마치고 배고팠던지 나가사키짬뽕을 국물까지 다 마신 그는 “아니라니까, 요즘 보통 일본 청년들이 그래. 여성들이 경차를 타는 청년을 보고 생활력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아키사다가 ‘돈 가진 사람을 혐오’하거나 수입차를 안 타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버지가 교수인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 태어났다.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역시 “BMW나 벤츠를 타보면 좋긴 하더라고”라며 웃었다.

아키사다의 말처럼 일본에서 경차의 인기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일본 경차는 엔진 배기량 660cc 이하이며 박스형(상자처럼 생긴) 자동차가 많다. 한국 경차인 모닝보다 엔진 크기는 작은데 차체는 더 큰 형태를 생각하면 된다. 이 경차의 비율이 일본 자동차 판매량 가운데 40%에 육박한다. 이 비율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일본 길거리에서 노란 번호판(일반 차는 흰색)을 단 경차를 만나는 것은 매우 쉽다.

일본 젊은이들의 인식 변화는 일본의 낮은 경제성장률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주차 공간 부족과 세제 혜택 등 경차의 인기 요인은 다양하지만, 최근의 변화는 경제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 역시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청년 실업률이 계속 올라가는 게 고민인 나라다. 아베 총리가 경제부양책인 ‘아베노믹스’를 내놨지만 뚜렷한 변화는 없다고 한다. 월급봉투가 얇아진 젊은이들이 연애와 결혼까지 포기할 정도인데 좋은 ‘구루마’(자동차)를 굴릴 여유가 나오겠는가.

이러니 경차를 모는 젊은이들이 실용적이고 생활력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 만하다. 또 다른 일본인 친구 역시 “경트럭을 몰면 생활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일본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어떤 상황이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경차 핸들을 힘있게 돌리며 주차하는 팔뚝이, 직장에서 셔츠를 살짝 걷고 일할 때와 비슷한 섹시함을 풍긴다고나 할까.

한국은 이런 분위기와 아직 거리가 멀다. 자동차 분야 기사를 담당했을 때 친구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떤 수입차가 괜찮냐’는 것이었다. 이들은 당장 수입차를 살 능력은 없지만 다음엔 꼭 한 번 타보리라는 생각이 많았다. ‘경차는 쓸 만하냐’는 질문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고유가’가 한창 이슈였을 때도 ‘가만히 있어도 고연비’인 경차보다 ‘고연비를 주장’하는 디젤 자동차가 더 관심을 끌었다.

지난 4월 한국의 청년 실업률은 10.2%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절인 2000년 4월 이후 최고치라고 한다. 지나가는 일본 경차의 노란 번호판을 보니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생각난다. 한국에서도 아키사다처럼 말하는 젊은이들이 나올까.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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