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차 출시 행사장은 긴장감과 함께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스파이샷’에 의해 이미 외관 디자인이 노출됐어도 기자들이 직접 눈으로 보는 건 또 다르다. 새 차가 무대 뒤에 있다가 앞으로 딱 등장하는 순간, ‘파바박’ 터지는 카메라의 불빛은 연예인도 부럽지 않다고 해야 할 정도다.
8월11일 서울의 한 최고급 호텔에서 쉐보레 ‘임팔라’(사진) 출시 행사가 열렸다. 임팔라는 한국지엠이 기존 모델인 알페온을 단종시키는 대신 내놓은 신형 준대형 세단 모델이다. 그동안 이 시장은 그랜저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전엔 성공한 사장님들이 각진 그랜저를 몰았고, 요즘엔 전문직 종사자들이 부드러워진 그랜저를 많이 타고 있다. 가격대가 높아 수익이 짭짤한 이 시장에 다른 자동차 업체들도 부단히 진입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 한국지엠 관계자는 “임팔라가 그랜저, K7 등과 경쟁할 것”이라며 “(내수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현대차에 경종을 울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세르지오 호샤 한국지엠 사장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른 새 차 출시 행사 때와 달리 부인과 함께 행사장에 나온 호샤 사장은 “임팔라의 국내 가격은 같은 트림과 사양 기준으로 미국 소비자가격보다 낮게 책정했다. 국내 고객의 호응을 받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만큼 한국지엠이 임팔라에 거는 기대가 커 보였다. 디자인은 미국차 특유의 건장한 모습이다. 최근 수입차 시장을 평정한 유럽산 디젤 세단이 세련미를 강조한 쪽이라면, 임팔라는 도로 바닥에 딱 붙은 날렵함보다 ‘나 여기 있소’라고 알리는 쪽의 디자인을 택한 것으로 보였다. 준대형 세단을 사려는 소비자에게 유럽차 외 다른 선택지를 준다는 점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임팔라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미국 디트로이트 공장에서 만들어 수입한 차라는 것이다. 국내 소비자는 변하고 있다. 더 이상 ‘메이드 인 코리아’를 사야 한다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외국에서 들여온 자동차 브랜드를 사면 오히려 선망의 눈초리를 받는 세상이다. 임팔라 역시 외국산을 강조할 수 있는 마케팅이 가능해진 셈이다.
실제 르노삼성은 소형 스포츠실용차(SUV) ‘QM3’를 르노 계열사인 스페인 공장에서 수입해 이른바 ‘대박’을 쳤다. 올해 7월까지 QM3는 2394대가 팔려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245%나 판매량이 늘었다. 국내 자동차 제조업체로 출발한 르노삼성이지만 새 모델을 출시하면서 부산공장에서 생산하는 것을 포기해버려도 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정부 역시 유럽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 자동차 수입 때 내야 할 관세까지 낮춰놨으니 장애물도 사라졌다.
QM3, 임팔라의 등장을 보며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얼마 안 되는 판매량이라도 알페온 생산이 중단되면서 한국지엠 부평공장 노동자들은 일감을 잃어버렸다. 한 공장에서 만드는 자동차 모델의 감소는 그 공장의 위치를 불안하게 만든다. 다른 생산 모델마저 판매가 부진하면 구조조정의 위협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물론 호샤 사장은 “임팔라가 국내에서 성공한다면 임팔라를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가능성을 열어놨다. 부평공장의 고용을 유지하려면 미국에서 수입한 임팔라가 잘 팔려야 한다는 숙제를 한국 사회에 던진 것이다.
이전에 던져진 숙제는 한국 사회가 잘 해결하지 못했다. 쌍용차 티볼리가 잘 팔린다면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있었지만, 자동차는 잘 팔려도 아직 그들은 돌아가지 못했다. QM3도 국내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지만 부산공장에서 생산한다는 이야기는 감감무소식이다.
호샤 사장은 이날 “돈이 왼쪽 주머니에 있든 오른쪽 주머니에 있든 차이가 없다”며 미국 본사보다 싸게 팔아도 장기적으로 결국 한국지엠에 이득이 될 수 있다고 내비쳤다. 자본은 전세계 주머니를 쉽게 옮겨다니며 생존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겐 왼쪽과 오른쪽 주머니가 따로 없는 게 문제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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