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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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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지체하면 위험하다”

고공농성 300일을 앞둔 차광호의 고립감과 두려움을 헤아릴 두 사람 김진숙과 천의봉,
그들이 기억하는 하늘 위의 시간… “우리가 원래 철탑에 있었던 사람처럼 되고 있었다”
등록 2015-03-14 14:11 수정 2020-05-03 09:54

저기 사람이 있다.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해서 본래부터 하늘이 사람 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하늘에 살고 있다고 해서 본래부터 하늘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하늘에서 노동자들이 일상을 살고 있다고 해서 이 사회가 아무 일 없는 일상인 것은 아니다.
3월22일이면 차광호(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의 하늘 생활 300일째가 된다. 사람이 살 수 없는 하늘에서 300여 일을 일상으로 살았던 사람이 국내엔 3명 있다. 김진숙(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309일 크레인 농성)과 최병승·천의봉(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철회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96일 철탑 농성). 차광호가 고공에서 견뎌온 시간의 길이를 아는 사람은 그들뿐이다.
3월2일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장기휴업자들(경기침체와 조선업 불황을 이유로 영도조선소 800여 명의 직원 중 다수가 순환 휴무에 돌입)이 일터로 복귀했다. 김진숙(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이번에도 제외됐다. 그는 “생존 해고자 중 마지막 비복귀자”다. 김진숙은 김정욱(쌍용자동차지부 사무국장)·이창근(정책기획실장)이 경기도 평택 쌍용차 굴뚝을 오른 뒤 10일째 되는 날부터 매일 부산역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천의봉(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지회 법규부장)은 금속노조 대의원대회 현장(3월3일 경북 문경 STX리조트)에서 만났다.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2월26일) 뒤에도 현대차는 변함없이 ‘신규 채용’(사내하청 정규직 전환 대신 지원자 중 선별 채용)을 밀어붙이고 있다. “대법원 판결을 준용하겠다던 회사가 지금은 노사 자율교섭으로 결정하겠다며 말을 바꿨다.” 그는 “판결을 따르지 않겠다는 뜻”이라며 답답해했다.
두 사람은 차광호의 ‘길고 먼 시간’을 염려하며 ‘극한과 싸운 초장기 하늘생활자’의 경험을 되짚었다. 따로 인터뷰해 합쳐 정리했다.

차 동지. 85호 크레인에서 309일을 보낸 노하우? 우선은 건강이에요. 몸이 조금이라도 안 좋은 날은 의지가 꺾이니까. 운동이 몸을 지탱하는 목적도 있지만 의지예요. 내가 살아서 내려가겠다는 의지를 매일매일 실현하는.
두 번째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 차 동지가 굳건히 버티는 것만으로도 역사와 정의는 이미 차 동지 편입니다. 그러니 느긋하게 마음먹으세요. 일희일비하면 내가 너무 힘들어요.
희망고문이라는 거, 그거 참 못할 짓입니다. 조금이라도 상황이 달라진다 싶으면 쉽게 희망을 키우게 되는 거예요. 나는 너무 절박하니까. 그때마다 실망하면 더 힘들어지더라고요. 몇 번 희망고문 당하면서 좌절을 해보니까 나중엔 웬만한 일엔 아예 신경도 안 쓰게 되더라고요. 차 동지는 단단한 사람이니 잘 견뎌낼 거라 여겨요. 밥 잘 먹고 운동 잘하는 게 차 동지의 투쟁입니다.

2011년 6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박승화 기자

2011년 6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박승화 기자

김진숙 이미 소용없는 메모(*김진숙은 차광호가 고공농성을 시작한 뒤 두 차례 스타케미칼 굴뚝을 다녀왔다. 지난해 8월21일 굴뚝을 찾은 그에게 차광호는 ‘309일을 견딘 법’을 물었다. 김진숙은 종이에 ‘노하우’를 적어 올려보냈다)다. 메모 당시(농성 87일째)라면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고공농성 300일을 앞둔 지금은 무용한 조언이다. 300일 동안 하늘에 매달린 사람이 하루를 견디는 법은 내게도 없다. 나도 300일을 넘어가면서 버틴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그냥 맥이 풀리고 기진맥진했다. 그래도 티를 내지 못한 채 웃어 보여야 했다. 설령 살아서 내려가더라도 정신병원에 실려갈 것 같았다. 차광호 동지는 이미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상황에 있다고 봐야 한다.

천의봉 고공농성을 부르는 사회다. 내가 초장기 고공농성의 경험자가 돼 조언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고공농성 300여 일이 돼도 해결이 안 될 땐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싶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 회사 입장은 완강했다. 이룬 것 없이 내려간다고 생각했을 때 도망가 숨고 싶었다. 조합원들 앞에 다시 설 용기도 없었다. 조합원들이 자포자기할까봐 두려웠다. 장기 고공농성이 위험한 것은 환경적·육체적 문제가 정신까지 곪게 만들기 때문이다. 차광호 동지가 굴뚝에서 열심히 운동한다고 하지만 그건 운동도 아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으면 그다음엔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다.


고공농성 선후배 사이가 되다


배추밭의 인연

천의봉(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지회 법규부장)씨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서울중앙우체국(서울 중구) 옆 20m 광고탑에서 고공농성 중인 장연의(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 연대팀장)씨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다.
지난 2월26일 대법원이 ‘현대차 불법파견’을 판결한 날 천의봉씨는 광고탑 아래 섰다. 법원 방청을 마친 동료들과 농성장을 지지 방문했다. 그가 대표로 장연의씨와 통화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배추밭에서….” 천의봉씨는 깜짝 놀랐다.
지난해 11월20일 그는 방송인 김미화씨의 텃밭(경기도 용인)에 있었다. ‘씨앤앰 고공농성 지원 김장행사’(11월23일)에 필요한 배추를 김미화씨가 뽑아줬다(제1038호 ‘배추 한 포기라도 힘이 됐으면’ 참조). 통신 비정규직 노동자 몇 명이 밭에 동행했다. SK브로드밴드의 한 노동자가 ‘296일 철탑농성자’인 천의봉씨에게 물었다. “고공농성에 가장 필요한 게 뭡니까.” 천의봉씨는 “겨울이니까 보온이 중요하다”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배추밭에서 질문했던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장연의씨가 말했다. 천의봉씨는 아득해졌다. “그때 이미 그는 고공농성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괜한 걸 알려줘서 고생시키는 것 아닌지 자괴감이 든다.”
작은 인연도 베일 만큼 하늘은 날카롭다.

김진숙 한진의 경우 크레인 아래엔 적지 않은 동지와 연대자들이 있었고 희망버스도 다섯 차례 찾아왔다. 스타케미칼은 공장이 문을 닫고 전류를 공급하는 송전탑까지 철거한 상태다. 회사가 공장을 재가동할 의사가 전혀 없다. 사 쪽은 답답할 게 없는 거다. 교섭도 아예 취소했다. 스타케미칼 사태는 잘 안 알려져서 찾아오는 사람도 많지 않다. 차광호 동지는 나보다 훨씬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나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다. (*4월1일이면 차광호는 김진숙의 고공농성 기록을 앞지른다.) 고립감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천의봉 현대차처럼 일할 현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성과 없이 내려오면 올라가기 전보다 더 악화될 수 있다고 차광호 동지는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회사는 고공농성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때문에 조직되는 노동자들이 두려운 거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김진숙 나(2011년 1월6일 농성 시작)의 경우 100일 무렵까지는 관심을 별로 못 받았다. 4월에 ‘김여진과 날라리외부세력’이 찾아오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일이 됐을 땐 ‘예상보다 길어지는구나’ 했다. 300일 즈음엔 ‘내가 끝내 못 내려갈 수 있겠다’ 싶었다. 국회 청문회가 열리고 조남호 회장이 불려나가도 해결이 안 되고 있었다. ‘크레인 위에서 죽는구나, 정말 끝낼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한계상황이었다. 내가 가진 총알을 다 소진하고 적을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죽는다는 게 별 느낌이 없었다. 다만 깨끗하게 목욕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죽고 싶었다.

천의봉 2012년 10월17일에 올라갈 땐 12월19일 대선을 기점으로 봤다. 비정규직 문제가 쟁점이 될 것이고, 그럼 회사도 압박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안철수·이정희 후보가 철탑에 다녀갔다. 문재인 후보와는 전화 통화를 했다. 박근혜 후보는 ‘당선되면 모든 불법파견 사업장을 대상으로 근로감독을 실시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대선 결과를 본 뒤엔 기대를 버렸다. 악으로 버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지막 방법이라 생각하고 철탑에 올라갔는데 그마저 사태 해결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때 느끼는 절망감이 컸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극단적 생각도 했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해결될까 싶었다. 철탑에 나 혼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실제 행동이 되지 않도록 병승이 형과 많이 이야기했다.

2013년 5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명촌중문 주차장에서 200여 일째 철탑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최병승·천의봉(왼쪽)씨. 한겨레 김명진 기자

2013년 5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명촌중문 주차장에서 200여 일째 철탑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최병승·천의봉(왼쪽)씨. 한겨레 김명진 기자

김진숙 크레인에선 무슨 일만 터지면 바로 죽음밖에 생각이 안 난다. 크레인에서 선택할 수 있는 다음 수단이 죽음밖에 없으니까. 처음엔 129일만 버티는 게 목표였다. 주익씨(*김주익 전 지회장)가 129일을 버텼으니 그만큼은 해야 죽어서 주익씨를 만나도 덜 부끄럽겠다 싶었다. 크레인 위에서 한번 우울한 마음이 들면 마음을 회복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음악 하나에도 기분이 다운되고 추스를 수 없어 음악도 듣지 못했다. 크레인 밑에 와서 우는 사람이 가장 싫었다. 자기들은 울고 가면 되지만 그 울음이 크레인 위로 고스란히 전달됐다. 크레인에 올라갈 결심을 했을 땐 정리해고를 막아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삶과 죽음은 의미가 없었다. 더구나 8년 전 나의 동지이자 친구가 죽었던 곳이다. 당시 내가 올라가서 주익씨 주검도 보고 목맸던 자리도 확인했다. 꼭 살아 내려가야지 했다면 오히려 못 버텼을 것이다.

천의봉 철탑에 있는 동안 땅에서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누가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길 바랐다. 내가 아는 사람이란 사실을 확인하면서부턴 맨정신으로 하루를 버티기 힘들었다. (*비슷한 시기 평택에서 송전탑 농성을 벌이던 쌍용자동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복기성씨도 같은 이유로 몸과 마음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희망버스가 왔을 때 오래 서 있은 뒤부턴 허리에 끊어질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2013년 8월8일 땅을 밟았을 때 그는 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었다.) 몸은 마음과 연결돼 있다.

김진숙 크레인 위에서 내려다보면 내가 발 딛고 서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줄에 묶여 매달려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두 달 동안 토할 정도로 멀미도 심했다. 크레인 전기가 끊기면 공포가 밀려왔다. 얼마 전에도 집에서 자는데 전기가 나갔다. 예전 같으면 그냥 정전이구나 할 텐데 그땐 공포로 받아들여졌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평범한 상황을 과도하게 받아들이는 거다. 늘 다니던 길에서 방향감각이 없어지는 경우도 많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내가 지금 크레인에 있나 땅에 있나 하는 착각이 든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고공농성 뒤엔 굉장한 공포로 다가온다.

천의봉 200일이 지나면서 매우 힘들었다. 그전까지는 어차피 해야 한다면 즐겁게 하려고 했다. 200일이 지나면서는 오만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00일이 넘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잊힌다는 뜻이다. ‘우리 여기 있으니 좀 봐달라’고 호소해도 올려다보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근처를 지나가는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조차 ‘아직 거기 있냐’는 눈길로 봤다. 우리가 원래 철탑에 있었던 사람처럼 되고 있었다. 포기하고 내려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가자니 너무 막막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309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기록을 경신할까봐 두려워 하루하루가 정말 안 가더라.

김진숙 단 하루도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에서 노동자들이 요구를 관철하고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수백 일을 매달려 있어야 하는 현실이다. 한국 사회가 그만큼 위험해졌다는 뜻이다. 쌍용자동차는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스타케미칼 공장은 폐업되고 동료는 흩어졌다. 하늘은 그들의 마지막 선택지다. 이 사회가 노동자들을 쓰고 버리기만 하지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안 한다. ‘309일’이 최후의 기록으로 남길 바랐고 희망의 근거가 됐으면 했다. 차광호 동지의 농성이 조만간 309일을 넘어선다는 의미는 박근혜 정부 들어 노동자의 삶이 그만큼 더 위태로워졌다는 뜻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정리해고가 남발되고 있다.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의 힘이 약화된 것도 원인이다. 방어막을 쳐주지 못하고 있다. 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갈라지면서 정규직이 투쟁 자체를 두려워하는 현상도 작용하고 있다.

천의봉 철탑에서 우리의 시간이 다른 고공농성자들에게 하나의 기준이 될까 두려웠다. 사태의 본질은 해결되지 않고 무엇 때문에 농성하는지도 흐려진 채 우리의 기록만 남는 상황이 무서웠다. 기록을 깼는지에만 관심을 갖고 그 기록이라도 깨야 한 번 더 쳐다보는 사회 아닌가. 사다리차를 타고 내려올 때는 1분도 안 걸렸다. 서러웠다. 땅에 발을 딛는 순간 긴장했던 근육이 풀려 걷지도 못하겠더라. 내려가면 뛰어다니겠다 싶었는데 땅멀미 때문에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내려오던 날 울산은 기온이 40℃ 가까이 올라갔다. 땅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만 봐도 숨이 막혔다.

김진숙 크레인에서 내려온 뒤 독일 금속노조의 초청으로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고공농성 경험을 강연했다. 한편으로 매우 부끄러웠다. 독일 노동자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해고됐는데 왜 크레인에 올라갔냐는 반응이었다. 설명하기가 난감했다. 그들은 해고돼도 올라갈 일이 없다. 사회안전망이 갖춰진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에선 질문 자체가 다르다.

천의봉 혼자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위험하다. 조바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막상 내려와서 보면 혼자가 아니다. 같이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차광호 동지, 절대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나는 버티기 위해서 즐거운 목표를 정했다. 내려가면 ‘나만의 바다’를 가보겠다고 다짐했다. 7번 국도를 혼자 여행할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김진숙 이 말을 꼭 써달라. 차광호 동지가 이젠 내려와야 한다. 한 사람이 자기 몸을 던져서 할 수 있는 100배 이상의 일을 했다. 싸움의 계기를 만들어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노동자도 몰랐던 스타케미칼의 상황을 이만큼 알려냈고 해고자들이 힘써 싸워왔다. 더 지체하면 위험하다. 본인은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말하지만 그 좁은 공간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다. 나도 내려왔을 땐 근육이 사라지고 없었다. 내려와서 살아야 한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운동이 너무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짐 지워선 안 된다. 이젠 민주노총과 금속노조가 조직적으로 받아안고 사태 해결에 나서야 한다. 금속노조가 그 약속이라도 확실하게 해야 차광호 동지가 내려올 수 있다. 김정욱·이창근 동지는 일희일비하지 말고 평상심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건강할 수 있도록 열심히 운동해야 한다. LG유플러스·SK브로드밴드 동지들도 씨앤앰 승리의 경험이 있으므로 힘을 모아 잘해낼 것이라 믿는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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