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보다 우울한 일이 있을까? 그런데 관객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사명은 개나 줘버린 채, 자살 나아가 자폭을 다루는 용감하고도 괴기한 영화들이 있다. 예컨대 (너무 자주 인용해서 이젠 식상한) (존 카펜터 감독)에서 남극기지 대원들은 바이러스 감염자를 색출한답시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다가 결국 다 죽는다. 헐. 자동차 충돌을 통해서만 성욕을 분출하는 인간들이 주인공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또 어떤가. 오직 자기파괴에서만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가엾은 현대인들이여. 자폭 영화의 숨은 거장은 사실 미하엘 하네케다. 그의 초기작 은, 영화 내내 일상의 지루함과 생의 무의미를 침묵으로 살아가는 일가족을 스멀스멀 보여준다. 결말은 대뜸 일가족 자살. 헐. 동양에서 자폭에 능한 작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는 와카마쓰 고지가 될 것이다. 테러를 위해 폭탄을 준비한 혁명가들이 내분 와중에 결국 폭탄을 놓쳐 자폭하고 만다는… 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각기 다른 역사적 문맥 속에서, 그리고 감독의 각기 다른 스타일로 연출된 영화들이지만, 자폭 영화들은 언제나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자폭에는 언제나 준비동작이 있다는 것이다. 남극기지의 대원들이 바이러스 감염자를 색출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가하는 의심과 테스트가 바로 그 준비동작이고(), 혁명가 입장에서는 누가 프락치 혹은 배반자인지를 의심하는 것이 그 준비동작이다(). 고로 자폭의 준비동작은 두 단계로 이뤄져 있다. 그룹의 구성원들이 공동의 적을 잃어버리는 첫 번째 단계(적은 바이러스처럼 숨어버리거나, 혹은 이데올로기처럼 공허해진다), 그리고 구성원들이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오인하게 되는 두 번째 단계(의심, 경계, 오해, 적대시 등등).
이 영화 같은 설정이 요즘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친다. 강원도 양양 방화 사건, 인천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 경기도 안산 인질극 사건 등이 우리네 그룹이 자폭하기 위해 취하는 준비동작인 것처럼 보인다면, 그래서 요즘 신문 보기가 자폭 영화 열전을 보는 것 같다면, 나는 임꺽정 신드롬일까? 양양 방화범도 생의 타깃을 잃고서 채권자의 죽음을 탈출구로 삼았으며, 어린이집 보육교사도 칭얼대는 어린이들을 자신의 미래 없는 삶의 배후 세력으로 오인했으며, 안산 인질범 또한 피해자들을 자신의 비루한 생을 책임져야 할 적으로 오인했다고 가정해보는 것은, 나만의 영화적 망상인가? 하물며 모자랄 것 없는 조현아도 자기 식구에서 적을 색출해내며 자폭의 준비동작을 취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이 마당에, 없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불행히도 자폭의 징후는 가난하고 열악한 부위부터 차례차례 나타난다. 가진 것이 없기에, 공동의 타깃을 되찾고 또 서로에 대한 오인을 털어낼 수 있는 여유도 그만큼 없기 때문이리라.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요즘 지상파나 극장가에 부는 복고 열풍도 자폭의 방증은 아닐까? 공동의 타깃을 더 이상 현실에서 찾지 못하자, 과거에서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한때의 열광과 추억을 억지로 소환함으로써 어떻게든 자폭의 화학반응만은 늦추거나 막아보려 하는 나름의 자정작용처럼? 추억은 그래도 공공의 적을 가설적으로라도 상정하며, 또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의심과 오인의 눈초리를 잠시나마 거두게 해주기 때문에….
하지만 자폭과 그 준비동작을- 추억 중독과 같은- 환영으로는 막을 수 없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더라면-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린- 박근혜 대선 복지 공약이 인천 어린이집 보육교사의 날아가는 싸대기 손바닥을 이미 막았어야 한다. 전술했던 자폭 영화들이 자폭을 막는 동작을 제시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 있으리라. 자폭은 환영이 아니라, 실재로만 막을 수 있다. 실재란 실재다. 영화 같은 허세 정책들 말고, 작지만 실질적이고 체감적인, 내 눈앞의, 그리고 내 손안의 삶.김곡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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