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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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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빨갱이 새끼

등록 2015-01-23 18:35 수정 2020-05-02 04:27

낯선 사람이 집을 기웃거릴 때마다 어머닌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곤 했다. 대문 밖에 까만 차가 보이면 어머닌 나와 동생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낯선 사람이 개천에서 놀던 나와 동생을 불러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귀가하던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울부짖었다.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세요? 제발 애들한텐 그러지 마세요.” 그때 내 나이 7살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양복을 꺼내 입으면 난 으레 누군가 결혼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식 음식을 먹을 요량으로 그날은 몰래 아버지 뒤를 따랐다. 예식장까지 갔는데 설마 집에 가라고 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간 곳은 결혼식장이 아니라 경찰서였다. 아버지가 주기적으로 경찰서에 간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내 나이 10살 무렵이었다.

삼대가 함께 울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며칠 뒤 어머니와 누나가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어머니가 입을 못 연 채 울기만 하자 누나가 나서서 육군사관학교를 포기하라고 했다. 아버지의 연좌제에 대해 처음 안 날이었다. 내 평생 그날처럼 서럽게 운 건 처음이었다. 허리가 꺾이도록 울면서 개 같은 세상을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내 나이 18살 때였다. 이듬해 동생이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을 땐 내가 동생을 말렸다. 동생도 눈물을 떨궜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구속되고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던 아버지가 만기 출소를 한 달여 앞두고 있을 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세 가지를 물었다. “배 안 고프냐? 잠은 자냐? 안 맞냐?” 아버지는 굶주리고, 못 자고, 맞으며 수감생활을 했던 당신의 모습을 떠올리기 고통스러워서, 당신 나이에 자식이 감옥에 갇혀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면회를 오지 않았던 것이다. 내 나이 27살 때였다.

안전기획부에서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몇 년이 흘렀다. 아버지가 계모임에서 해외여행을 떠나게 됐다. 어디서 들었는지 동생이 아버지는 여권 발급이 안 돼 출국이 어려울 것 같다고 얘기했다. 국정원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어떤 새끼인지 당신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문제 생기지 않도록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평생 처음 비행기를 탔다. 연좌제가 폐지됐다고는 하지만 아버지는 2000년대에도 신원조회 대상자였던 것이다. 내 나이 30대 중반이었다.

재작년 딸내미와 고향에 들러 뇌졸중으로 두 차례나 쓰러졌던 아버지와 밤이 깊도록 얘길 나눴다. 아버지의 과거 얘기는 우리 집에서 금기였다. 하지만 그날은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살아생전에 아버지한테서 직접 듣기로 작정했다. 귀가 좋지 않고 발음은 부정확했지만 기억은 또렷했다. 1953년 당시 늦깎이 고3이던 아버지는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돼 4·19혁명 이후에야 교도소를 나올 수 있었다. 삼대가 함께 울었다. 딸내미는 내가 허리가 꺾이게 울었던 그 나이(18살)에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가 감옥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조용히 눈물지었다.

거기에 작별 인사를 고할 날은 언제

아버지는 평생 공사판 막일을 했다. 왜소한 몸뚱이로 우리 5남매, 삼촌, 고모, 이모를 키웠다. 마치 가족 부양이 전생의 업인 양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1년 365일 손에서 연장을 놓지 않았다. 분단의 역사가 준 상흔을 당신 탓이려니 생각하고 입을 닫고 숨죽이며 살아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사상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동토의 땅에서 국가보안법이라는 개에게 물려 평생을 빨갱이로, 또 빨갱이의 새끼로 낙인찍혀 살아내야 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국가보안법에 작별 인사를 고할 날은 언제쯤일까? 굿바이, 국가보안법!

이은탁 데모당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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