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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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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인권밥상’을 차리는 그날까지

국제앰네스티 등 8개 단체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권리를 촉구하는 소비자·이주노동자·생산자 선언’ , 탄원서명에 2만여 명 참여…
고용노동부는 농·축산 이주노동 첫 실태조사에 나섰지만 제도 개선 의지 안 보여
등록 2014-12-17 06:02 수정 2020-05-02 19:27

고용노동부가 농·축산 이주노동 실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첫 조사’를 진행하면서도 “법·제도 개선으로 이어지긴 어렵다”며 선을 긋고 있다. 문제를 “강도 높게 점검하겠다”는 정부가 문제의 근거가 되는 제도는 고수하겠다는 태도다. ‘불변의 제도’를 전제하고 실시되는 조사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앰네스티 권고에 대한 거부

고용노동부는 과 8개 단체(국제앰네스티·이주공동행동·이주인권연대·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한살림·아이쿱·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국제식품연맹)가 진행한 ‘인권밥상’ 공동캠페인(10월20일 시작)의 영향으로 지난 10월29일부터 실태조사를 시작했다. 밥상은 계약의 산물이며, 계약은 제도가 떠받친다. 법·제도의 독소조항이 허위계약서 작성과 가혹한 노동환경의 근거란 지적(제1034호 ‘약속을 배반하는 비정한 계약들’ 참조)이 많았다. 고용노동부가 보도자료에서 밝힌 조사 착수의 배경도 근로기준법 제63조(근무시간·휴게·휴일 적용 제외)의 폐해였다.

국제앰네스티가 지난 10월20일 한국 농·축산 이주노동 실태보고서를 발표한 직후 네팔 현지에서 시민들이 ‘인권밥상’ 캠페인에 참여하며 탄원서명을 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네팔지부 제공

국제앰네스티가 지난 10월20일 한국 농·축산 이주노동 실태보고서를 발표한 직후 네팔 현지에서 시민들이 ‘인권밥상’ 캠페인에 참여하며 탄원서명을 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네팔지부 제공

“농·축산업은 근로기준법상 근무시간·휴게·휴일 규정의 적용이 배제됨에 따라 외국인 근로자의 지나친 장시간 근로의 문제가 상존해왔으며, 최근에는 국회, 언론 등을 통해 표준계약서상의 최저임금 미만 지급, 폭행·성희롱 등 인권침해 사례도 지적되어왔다.”

고용노동부는 “농·축산업 분야 외국인 근로자의 근무실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점검 대상 사업장 수도 지난해(1331개소 중 120개소·전체의 9%)보다 2배 수준(1300개소 중 260개소·전체의 20%)으로 늘려 잡았다. 조사 영역으로는 “△일일 근무시간 △휴일 △임금에서 숙소비용 공제 여부 및 공제액 △임금체불 경험 △폭행·성희롱 등 근무환경 및 인권침해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들었다. “이번 실태조사 결과를 분석하여 향후 농·축산업 분야 고용허가제 제도 개선시 참고자료로 적극 활용”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그러나 한 달 뒤 고용노동부는 실태조사와 제도 개선 사이엔 절차적 인과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고용노동부는 12월3일 국제앰네스티에 보낸 답변서(‘권고에 대한 의견’)에서 “농·축산업 부문은 업무 특성상 기상이나 계절 등 자연적 조건에 영향을 받으므로 근로시간 관련 규정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근로기준법 제63조를 폐지하고 근로시간·일일 휴게시간·유급 주휴일에 대한 권리 등이 이주노동자에게 확대되도록 하라’는 앰네스티 권고에 대한 거부다.

고용노동부는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변경 제한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반대했다. 사업장 변경 제한은 동의하지 않는 노동조건에서도 추방 위협을 감내하며 일할 수밖에 없도록 이주노동자들을 묶어두는 장치다. ‘내국인 노동자의 일자리 잠식을 막는다’는 이유가 따라붙는다.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공간은 ‘뺏고 뺏기는 영역’이 아니란 목소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농·축산업을 외면한 한국인들을 대신해 이주노동자들이 국내 생산을 지탱하고 있다(제1038호 ‘나쁜 사장님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참조)는 사실을 고용주들도 인정(제1039호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우리의 권리처럼’ 참조)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답변서에서 “우리 헌법재판소도 사업장 변경 제도에 대해 외국인 근로자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2011년 9월)하였다”고 말했다.

실천을 다짐한 생산자·소비자들 의지 담아

고용노동부 외국인력담당관실 관계자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고쳐야겠지만 현재로선 (근로기준법 제63조를) 바꿀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업장 변경 제한을 두고도 “사업주들은 노동자들이 너무 자주 사업장을 바꾸고 변경을 위해 태업을 벌인다고 생각한다”며 “고용허가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잘 정비된 제도”라고 했다. 고용노동부의 실태조사는 사업장 점검·감독과 행정지도에 주로 맞춰져 있다. 정부는 애초 12월19일(‘인권밥상’ 캠페인 종료 다음날)까지 마무리하려던 조사를 현장 여건을 고려해 12월 말까지 연장한다는 방침이다. “자료 수합과 분석을 거치면 발표는 2015년 1월 말이나 가능할 것”이라고 담당자는 설명했다.

정부의 ‘제도 개선 권고 거부’에 국제앰네스티는 반발했다. 김희진 한국지부 사무처장은 “고용노동부가 현장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점은 환영하지만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인권침해 상황을 정부가 극단적인 사례로만 치부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사업주의 허락 없이 사업장을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를 유지하겠다는 답변은 완력을 써서라도 값싸고 말 잘 듣는 이주노동자를 농업에 묶어두겠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인권 밥상’ 캠페인 참여 단체들은 12월18일 세계이주민의 날에 맞춰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권리를 촉구하는 소비자·이주노동자·생산자 선언’을 발표한다. 이주노동자들과 그들을 고용한 생산자 및 그들의 생산물을 먹는 소비자들이 뜻을 모아 문안을 다듬었다.

“젊은 사람들을 찾기 힘든 농촌에서 일손 구하기에 절박한 생산자에게 정부는 값싸고 인권침해에 저항할 수 없는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고용허가제를 그 대안으로 내놨다. …이주노동자의 노동착취를 기반으로 한 농업 역시 ‘도시와 농촌의 상생’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농업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다.”

선언문은 이주노동자의 노동 현실 개선을 촉구하며, 실천을 다짐한 생산자·소비자들의 의지도 담았다. “노동시간과 휴식, 휴게시간을 보장받는 것이 농·축산업 이주노동자의 권리임을 인정하며, 이를 지키고 생산하며 소비하겠다….”

‘인권밥상’ 캠페인 탄원서명(근로기준법 제63조 폐지·사업장 변경 허용) 참가자는 이날까지 2만 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 외에도 네팔과 벨기에 시민(11월30일 기준) 998명과 3253명이 각각 이름을 보탰다.

농·축산 이주노동자의 주요 송출국인 네팔에선 현지 시민들의 참여도 뜨거웠다. 국제앰네스티 네팔지부는 한국지부와 보고서(‘고통을 수확하다: 한국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착취와 강제노동’)를 동시에 발표했다. 캠페인 부스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명했다. 언론도 주요 뉴스로 보도했다. 라메슈와르 네팔지부 사무국장은 전했다.

“네팔 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서 취업하는 게 꿈이지만 제도의 쓰디쓴 이면까진 잘 몰랐다. 착취나 강제노동 현실을 잘 모른 채 한국으로 떠난다. 네팔 언론과 국민들이 큰 관심을 보인 까닭이다.”

서명운동의 영향으로 한국 정부가 네팔 노동자들의 취업을 막을까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했다. “캠페인으로 바뀌는 것이 있겠느냐”는 의구심도 없지 않았다.

농·축산 노동자의 실태를 ILO에 알리는 작업

탄원서명은 12월18일 기자회견 직후 고용노동부를 방문해 전달할 예정이다. 캠페인 종료 뒤에도 제도 개선을 위한 참여 단체들의 행동은 계속된다. 유엔과 국제노동기구(ILO) 등을 상대로 로비를 진행해 국제사회의 압박 강도를 높일 계획이다. 2015년 상반기에 방한하는 유엔 이주노동자 특별보고관에게 한국 실태를 설명할 준비도 하고 있다. 양대 노총과 국제식품노련(IUF)은 국내 농·축산 노동자의 노동 실태를 ILO에 알리는 작업을 병행한다. ILO는 ‘농업노동자 결사의 자유 협약’(11호·1921년 제정)과 ‘농촌노동자 조직 협약’(141호·1975년 제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우리의 ‘밥상’에서 이주노동자들의 눈물을 거두려는 마음과 손길들이 모여 따뜻한 ‘인권밥상’은 차려진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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