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 300여 명이 국내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발표한다. ‘사장님’인 농민들이 피고용인인 이주노동자들을 대신해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국내 첫 선언이다.
우리의 밥상이 ‘노사관계’를 통해 차려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어머니의 손맛’으로만 밥상이 구성되는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농업노동의 결정적 존재가 됐고, 이주노동자들 삶의 질은 고용조건이 결정한다. 근로기준법과 고용허가제 독소조항이 불합리한 고용환경의 근거가 되고 있다. 생활협동조합 아이쿱의 생산자회는 12월2일 ‘인권밥상’ 캠페인(과 인권·이주노동·먹거리정의 관련 8개 단체 공동 진행)을 지지하는 공식 견해를 밝힌다.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은 아이쿱이 추구하는 ‘윤리적 생산’의 필수 조건이란 뜻을 품고 있다.
밥상을 만드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조성규(55) 아이쿱 생산자회장은 “이주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권은 한국 농업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다”고 했다. 그는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에서 딸기와 토마토, 고추 농사를 짓는다. 조 회장을 11월26일 그의 농장에서 만났다. 그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3명을 고용하고 있다.
“아이쿱 생산자들은 ‘생산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진다. 내가 먹을 먹거리와 동일한 먹거리를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윤리적 생산은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이주노동자와의 관계도 같다. 태어난 장소는 달라도 모든 생명은 존귀하다. 권리도 동일하다. 생산자가 소비자를 생각하면서 농사를 지어야 하듯, 고용주도 노동자의 권리를 자신의 권리처럼 보장해야 한다. 노동자를 노동자로 대우하지 않을 때 윤리적 생산은 불가능하다.”
아이쿱엔 소비자 회원 21만 명이 가입·활동하고 있다. 그들에게 먹거리를 공급하는 생산자회 회원은 농업과 축산업을 합쳐 291명이다. 정회원·준회원·계약자(소비자에게 공급할 물량이 부족할 때 아이쿱 생산 기준에 맞춰 계약생산)를 모두 더하면 2500여 명에 이른다. 선언문 제목은 ‘밥상을 만드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행복한 윤리적 생산’이다. 생산자회 정기이사회(12월2일)에서 추인·발표된다. “우리 생산자들이 ‘그동안 이주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이사회를 통해 자기·상호 점검하고 마음을 모으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조 회장은 말했다.
‘인심 넉넉하고 따뜻한 고향’이었던 농촌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중 FTA, 한-뉴질랜드 FTA가 연달아 타결되었고 쌀시장 개방도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체 농업인구는 줄고 있고 그중 65세 고령인구가 3분의 1을 넘어 계속 늘고 있는 상황입니다. 날이 갈수록 절망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는 우리 농촌은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선언문)
너무하는 고용주, 너무하는 노동자
‘왜 이주노동자 입장만 고려하냐’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하는 고용주’가 있는 것처럼 ‘너무하는 노동자’도 있다는 항변이다.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이 심한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는가 하면, 한국인 생산자들이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농장에 온 지 하루이틀 만에 사라져버리는 노동자들이 있다. 농사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국 고용주의 인성이 각각이듯 이주노동자의 인성도 각각이다. 인성을 놓고 이야기하면 답을 찾을 수 없다.”
조 회장은 1984년부터 농사를 지었다. 지금까지 14명의 이주노동자를 고용했다. 동티모르, 타이, 중국 등 국적도 다양했다. 동티모르 노동자 3명은 3년 전에 모두 귀국했다. 그들이 농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조 회장은 동티모르로 가서 그들의 가족을 만났다. “동티모르엔 젊은이들이 일할 곳이 부족했다. 가족 한 사람이 이주노동을 해서 번 돈에 가족과 친지들이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고 그는 기억했다. 한국에 와서 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에 대한 그의 이해도 깊어졌다.
“입국한 지 얼마 안 된 노동자들이 일을 잘 못한다며 답답해하거나 ‘빨리빨리’ 하라고 다그치는 고용주가 많다. 한국은 씨를 뿌리고 거둬야 하는 시기가 정해져 있어 때를 놓치면 농사짓기가 어렵다. 이주노동자들이 온 남쪽 나라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간이 한국보다 훨씬 길다. 그들은 빨리빨리 해야 하는 한국과는 다른 환경에서 왔다. 서로 이해하고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가혹한 노동 경험이 회자되고 노동자들이 한국 농촌을 기피하면 우리 농업엔 출구가 없다.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선언문은 우려했다.
자생력을 잃은 농촌에 서로가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각지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정책과 제도를 내놓아야 하는 의무를 오랫동안 방기하고 있는 정부의 무관심 속에 농촌의 생산 환경은 날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젊은이는 떠나고 노인만 남은 농촌에서 어느덧 없어서는 안 될 구성원이 되어버린 농·축산업 이주노동자의 인권, 노동권 착취 사례들은 그 대표적 단면 중 하나일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희생만 강요하는 구조
그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고 했다. “한국 젊은이들은 극심한 취업난에도 농업에서 일을 찾지 않는다.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노동력은 대개 70대 이상의 고령인데 그마저도 부족하다.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한국의 농·축산업은 생존이 불가능하다. 아이쿱 생산자들만 해도 30%는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인 노동력에만 의지할 경우 농·축산업은 이미 틀렸다. 인권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주노동자들의 인간답지 못한 노동환경은 결국 한국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해치게 될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인권·노동권 보장이 한국 농·축산업 생존의 필수 전제가 됐다는 뜻이다.
캄보디아 여성노동자 3명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딸기꽃을 따고 있었다. 조 회장이 가르쳐준 대로 꽃을 떼어내 딸기 수를 조정하는 작업이었다. 9월 중순에 하우스 안으로 옮겨 심은 딸기 모종은 벌써 작은 열매를 맺고 있었다. 12월 중순이면 그들의 손은 빨간 딸기를 수확할 것이었다.
ㅊ(26)은 부모 없이 큰언니 집에서 살다 한국에 왔다. 그는 돈을 벌어 캄보디아에 집을 살 꿈을 꾸고 있다. ㅅ(27)의 언니는 뇌종양을 앓고 있다. 캄보디아 밖에서 치료받게 하려면 ㅅ은 돈이 필요하다. 3년 체류 기한이 찬 두 사람은 조 회장에게 기간 연장(3년 고용 뒤 사업주가 1년10개월 추가 고용 가능)을 요청했다. 조 회장은 내년 초 캄보디아에 다녀올 수 있도록 두 사람에게 한 달씩 휴가를 줬다. 그는 노동자들이 캄보디아의 가족과 연락할 수 있도록 무선인터넷이 가능한 휴게실을 지었다. 숙박과 식사 및 모든 생필품도 무료로 제공한다. 여러 작물을 1년 내내 번갈아 재배하는 이유도 노동자들의 임금 보장과 관계가 있다고 했다.
“한 작물만 하는 농가들은 농한기엔 일거리가 없어 월급을 주기 힘들다. 결국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불법파견을 한다. 노동자들의 월급을 제대로 주려면 계속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이탈하는 이유도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이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이다. 농업은 계절노동의 특성이 강하다. 노동자들의 희생만 강요해선 안 된다.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
농·축산업 노동자에겐 휴게·휴일·근로 시간에 적용 예외를 둔 근로기준법 제63조의 폐단을 그는 지적했다.
“농·축산업의 노동시간이 탄력적인 것은 맞다. 여름과 겨울의 노동시간도 다를 수 있다. 겨울에 1시간 덜 하면 여름에 1시간 더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근무시간 제약 없이 일을 시키고 초과노동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다. 현실을 방치해선 안 된다.”
그는 “농민도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가치 없는 농사는 도로아미타불이다. 한국 농업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꾸준히 신뢰를 쌓아야 길을 찾을 수 있다.”
“고용허가제 독소조항 개정해야”
생산자회가 ‘가치’를 담아 정리한 선언문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강제노동’에 대한 국제적 기준과 합의를 지지한다. ②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농·축산업 노동자의 인권·노동권을 지지한다. ③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농·축산업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현행 고용허가제의 독소조항들이 개정될 것을 지지한다.
순천=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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