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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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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배반하는 ‘비정한 계약들’

고용주가 마음대로 노동조건·숙박비용을 설정한 이면계약서에 옭아매인 농·축산 이주노동자들…

계약서에 적힌 숫자보다 실제 노동시간은 월등히 많고 일한 만큼 임금도 받지 못하고
등록 2014-10-29 17:22 수정 2020-05-03 04:27
한 농업 이주노동자가 농작물에 농약을 뿌리고 있다. 등 뒤에 빈 농약통들이 수북하다(큰 사진). 하루 노동시간과 한달 노동시간, 급여 산출 일수가 모두 불일치하는 ‘문제적’ 표준근로계약서(작은 사진 왼쪽)와 고용주들이 임의로 만든 이면계약서 사본. 김정용 제공

한 농업 이주노동자가 농작물에 농약을 뿌리고 있다. 등 뒤에 빈 농약통들이 수북하다(큰 사진). 하루 노동시간과 한달 노동시간, 급여 산출 일수가 모두 불일치하는 ‘문제적’ 표준근로계약서(작은 사진 왼쪽)와 고용주들이 임의로 만든 이면계약서 사본. 김정용 제공

우리의 밥상은 ‘계약’의 산물이다.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양분을 공급해도 상추와 배추가 저절로 밥상에 오르진 않는다. 씨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고, 노동하는 ‘근로계약’이 있어야 쌀이 익고 돼지가 살찐다.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이 전국의 논밭을 밥상(제1025호 표지이야기 참조)에 올리기까지 약속을 배반하는 ‘비정한 계약들’이 넘실댄다.

11시간 일했는데 급여는 8시간어치만

ㄱ(30·여)은 네팔 카트만두에서 2012년 한국에 왔다. 경기도 안성에서 이주노동을 시작했다. 상추와 시금치, 얼갈이배추를 재배하는 농장이었다. 하루 11시간씩 일했다. 일이 끝난 뒤엔 근무시간과는 별도로 20~30분씩 포장 박스를 접었다. 계약서는 하루 ‘근로시간’을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라고 썼다. 휴식을 1시간 줬고, 한 달에 이틀 쉬었다. ‘산수’를 하면 월 노동시간은 308시간(11시간×28일)이 맞다. 실제론 ‘308’의 자리에 ‘44’가 표기돼 있다. 계약서대로라면 그는 매달 7배씩 일을 더 한 셈이다. 앞과 뒤가 따로 노는 엉터리 계약서다.

계약서상 월급은 103만5080원이었다. 하루 8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2012년 최저시급(4580원)을 곱해 산출한 금액이다. 실제 노동시간(11시간)을 대입하면 시급은 3360원(법정 최저시급의 73%)으로 떨어진다. 하루 노동시간을 11시간으로 설정하되, 급여는 8시간으로 계산하고, 한 달 노동시간은 44시간으로 합산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계약서가 ‘공식’ 발행됐다. ㄱ은 계약의 ‘실체’를 모른 채 2년을 일했다.

농장엔 캄보디아 여성 동료(2013년 계약) ㄴ(26)과 ㄷ(24)이 있었다. 셋은 같이 일하고 같이 쉬었다. ㄴ과 ㄷ의 계약서는 노동시간을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로 정했다. 하루 8시간이었고, 한 달 226시간이었다. 계약서대로라면 ㄴ과 ㄷ은 하루 3시간씩 더 일하고 있었다. 급여는 하루 8시간만 최저임금(4860원)으로 계산(109만8360원)했다.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설정하되, 실제 일은 11시간 시키고, 급여는 8시간어치만 주는 계약이었다. 믿고 의지할 유일한 법적 근거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ㄱ은 좌절했다.

“왜 그렇게 일해야 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세 사람은 노동시간에 못 미치는 임금에 항의했다. 고용주는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외국인 노동자 고용계약시 근로합의서’란 제목의 이면계약서였다. 합의서는 ‘○○ 시설채소 작목반’ 이름으로 한글과 영문으로 작성됐다. 특정 작목반(작목별로 공동 생산·출하하는 농업인 모임)이 조직적으로 만들었다는 인상이 짙다. 합의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밖에 나가면 병 걸린다”며 외출 막는 사장

“(정당한 사유가 없거나 대체 근로자 채용 전) 부득이하게 퇴직시 농장주에게 피해보상금으로 150만원을 배상하고 퇴직한다.”

임금체불이나 계약불이행 등으로 사업장 변경을 원하는 노동자에게 고용주는 돈을 요구(이주노동자 고용에 든 행정비용을 보상하란 이유)하는 경우(제1025호 ‘이문영의 恨국어사전’ 참조)가 많다. 함께 일하던 남자 노동자들도 60만원과 110만원을 주고 일터를 옮겼다고 ㄱ은 전했다.

“작업방해, 작업거부, 불성실근무 등은 1일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다”거나 “무단결근, 무단이탈 등으로 결근시 휴일 1일을 제외하거나 3일간의 급여를 공제한다”는 내용도 있다. “근로자 부담인 기숙사 사용 비용은 월 25만원을 기본으로 하고, 계절 여건에 따라 비용이 가감될 수 있으며, 근로연장수당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대목이 세 사람을 겨냥했다. 연장근로 수당을 숙소 사용료로 대체할 수 있다는 내용에 서명시켜 ‘일한 만큼 달라’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무마하려는 시도였다.

ㄱ은 서명을 거부했다. 화난 고용주는 더는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ㄱ은 분쟁이 발생한 달의 임금과 초과근로수당, 퇴직금, 취업 초기 10일간 급여 등을 받지 못한 채 일을 그만뒀다.

ㄱ은 충북의 한 달걀 포장업체에서 새 일을 구했다. 현재 일터에선 계약서를 보지도 못했다. “사모님”이 보관하면서 보여주지 않았다. 계약 내용을 모르는 그는 새 일터에서 자신의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는 달걀 포장 일이 없을 때마다 사장의 밭일을 한다. 사장의 집에 가서 풀을 뽑거나 청소를 하기도 한다. 한 달에 하루 쉰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발행한 은 농업 이주노동자에겐 “휴일을 주지 않는 것도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평일 퇴근 뒤 외출하려 할 때마다 “밖에 나가면 병 걸린다”며 사장이 막는다. “사장님 너무 무서워서 말 들어야 된다”며 ㄱ은 전화기 저편에 갇혀 있었다.

논리가 닿지 않는 계약서가 공인되고 계약과 현실이 등을 돌리는 세계에 한국의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은 살고 있다. 허위계약서와 이면계약서가 남발한다. ‘문제적 계약서들’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14개월 초과노동 임금만 700만원이 넘어

ㄹ(25·캄보디아·2013년 입국)의 계약서는 하루 11시간 노동을 명시했다. 한 달에 이틀 쉰다. 매월 노동시간으로 308시간을 적었다. 한 달 급여는 102만원이다. 계약 당시 최저임금은 149만6880원(308시간×4860원)이다. 노동시간은 솔직하게 밝히지만 임금을 속이는 경우다.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아예 노동시간 자체를 기입하지 않거나 ‘한 달에 350시간 노동’을 당당하게 써넣는 계약서도 있다.

‘산수’를 무시하는 계약서도 흔하다. ㅁ(26·캄보디아·2013년 입국)은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것으로 계약했다. 하루 60분 쉬고, 휴일은 이틀이다. 고용주는 월 노동시간 합계를 308시간이 아닌 226시간으로 적었다. 급여도 226시간을 기준으로 지급했다. ‘의도’를 부인하기 어럽다. 319시간을 일한 지난해 8월의 평균시급은 3448원이었다. 약 4개월 보름치 기본급 440만원을 체불했고, 계약서와 다른 주소지에서 일하도록 했다.

‘휴게시간 부풀리기’는 최근 경향이다. ㅂ(22·캄보디아)은 올해 2월 한 달만 270여 시간 일했고 대부분은 300시간 이상 노동했다. 계약서엔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하는 것으로 돼 있으나, 한 달 합계는 226시간으로 적혀 있다. 휴게시간을 4시간으로 잡은 결과다. ‘하루 8시간 노동’을 맞출 목적(8시간만큼만 급여 계산)으로 휴게시간을 사실과 다르게 기입한 사례다. ㅂ이 14개월 동안 받지 못한 초과노동 임금만 700만원이 넘는다.

허위 계약서의 유형은 시기별 경향과 궤를 같이한다. 2012년 이전 계약서들은 최저임금법을 노골적으로 위반했다. 노동시간은 경계 없이 늘어났고, 논리도 산수도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2013년엔 하루 노동시간이 11시간을 넘나들어도 한 달 합계는 226시간에 맞추는 사례가 늘어났다. 초과노동 사실은 무심결에 밝혀도 임금만큼은 ‘하루 8시간 노동’으로 기재해 지출을 최소화했다. 같은 농장에서 일한 ㄱ(2012년 계약)과 ㄴ·ㄷ(2013년에 사인)의 계약서에서 관찰되는 차이도 이 흐름을 반영한다. ㅂ의 사례처럼 휴게시간을 만능열쇠로 사용해 ‘하루 8시간-한 달 226시간’을 끼워 맞춘 계약서들은 2014년 들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김이찬 지구인의정류장 대표는 분석했다.

“2012년 말 국회에서 엉터리 계약서 문제가 지적됐다. 이후 2013년부터 한 달 근무시간을 실제 노동시간과 무관하게 ‘226’이라고 써넣는 계약서가 많아졌다. 여기서 하루-한 달 노동시간의 논리적 불일치를 휴게시간을 늘려 잡아 해소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무의미한 계약서와 ‘먹통 시스템’

그러나 ‘계약과 실제의 간극’이란 허위 계약서의 본질은 그대로다. 계약서에 적힌 숫자보다 실제 노동시간은 월등히 많고, 노동시간과 무관하게 임금은 8시간 분량에 고정돼 있다. 표준근로계약서와 별도로 이중계약서(ㄱ·ㄴ·ㄷ의 경우) 작성 강요도 빈번해지고 있다.

약속이 무의미한 계약서가 널리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은 ‘먹통 시스템’과 직결된다. 계약 내용이 진실에 부합하는지 검증하고 확인해야 할 관리·감독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최근 고용노동부는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이 근로에 상응하는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업종별 특성에 맞는 표준근로계약서를 만들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부정적 의견(제1033호 표지이야기 참조)을 밝혔다. 숙소 기준을 마련하란 권고에도 “사업주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울 수 있다”며 반대했다.

고용노동부가 감독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노동조건과 숙박 비용을 일방적으로 설정한 이면계약서들이 표준근로계약서를 비웃고 있다. ‘계약이 성립할 수 없는 계약서’에 따라 계약이 공인받는 순간부터 우리의 밥상은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의 눈물로 차려진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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