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에서

캄보디아 출신 4명의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초과노동·미등록 선택 여부 둘러싼 이중의 딜레마
등록 2014-11-19 06:18 수정 2020-05-02 19:27

고르고 뽑을 것이 있을 때라야 선택은 의미를 이룬다. 택하는 것과 버리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없을 때 선택은 이유를 잃는다. 그때 선택은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딜레마’가 된다.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아도 좋은 상태는 평온하다. 평온함 속에서 선택의 압박 없이 일하는 농업 이주노동자도 있다. 반면 선택 자체가 무의미한 노동자도 많다. 현재를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 현재의 반복임을 확인할 때, 선택은 ‘절망의 연습’이 된다.
평온하지 못한 농업 이주노동자라면 공통으로 겪는 딜레마가 있다. 이 11월10일 네 명의 농업 이주노동자와 둘러앉았다. 세 가지 상황에서 각자 무엇을 선택할지 이야기했다. 이야기할수록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의 공허함에 직면했다. ㄱ(27·여), ㄴ(21·여), ㄷ(32·여), ㄹ(25·남)은 모두 캄보디아에서 왔다.

존재하지 않는 초과노동 ‘당연한 전제’

#휴게·휴일이 줄어도 일 더 하고 돈 벌겠다 ↔ 돈 덜 벌어도 휴게·휴일 꼭 갖겠다

[ㄹ뿐이었다. ‘초과수당을 안 벌어도 휴게·휴일을 보장받고 싶다’고 한 사람은 ㄹ 혼자였다. 2013년 7월에 입국한 그는 상추농장에서 일했다.]
ㄹ 가장 많이 일할 땐 11시간30분~12시간 일한 적도 있다. 점심시간은 30~40분 정도 주어졌다. 하우스 비닐을 치고 벗길 때 특히 힘들었다. 일단 아파선 안 되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처럼 일하다가는 아파서 아무 일도 못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계약서대로 8시간만 일하고 싶다. 아플 때만이라도 사장님이 쉴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캄보디아 농업 이주노동자 ㅁ이 2011년 당시 고용주로부터 폭행과 위협을 당한 일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고용주(위쪽 그림 윗줄 가운데)가 앉아 있는 ㅁ을 역기로 내리치려 하자 고용주의 자형(윗줄 오른쪽)과 누나(아랫줄 왼쪽), 다른 이주노동자들(아랫줄 왼쪽 두 번째·세 번째)이 말리고 있다. 한 달여 전엔 고용주(아래쪽 그림 오른쪽)가 멱살을 잡은 채 부엌칼로 위협했다고 ㅁ은 회상했다.  ㅁ 제공

캄보디아 농업 이주노동자 ㅁ이 2011년 당시 고용주로부터 폭행과 위협을 당한 일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고용주(위쪽 그림 윗줄 가운데)가 앉아 있는 ㅁ을 역기로 내리치려 하자 고용주의 자형(윗줄 오른쪽)과 누나(아랫줄 왼쪽), 다른 이주노동자들(아랫줄 왼쪽 두 번째·세 번째)이 말리고 있다. 한 달여 전엔 고용주(아래쪽 그림 오른쪽)가 멱살을 잡은 채 부엌칼로 위협했다고 ㅁ은 회상했다. ㅁ 제공

[ㄱ, ㄴ, ㄷ 세 사람은 초과노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가난한 나라의 딸들은 더 벌기 위해 더 일할 각오가 돼 있었다.]

ㄷ 돈을 벌려고 한국에 왔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을 더 할 수 있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하루 8시간 근로계약을 했지만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다.

ㄴ 어차피 관광 온 게 아니다. 계약서에 명시된 시간(하루 8시간)을 넘겨 노동할 수 있다. 하루에 2~3시간 정도는 가능하다.

ㄱ 나도 평일엔 계약 시간 이상 일할 수 있다.

[그들의 초과노동엔 ‘당연한 전제’가 있었다.]

ㄷ 일한 대로 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초과노동한 시간만큼 돈을 줘야 한다. 노동의 대가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지불한다면 더 일하겠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5월 입국한 뒤 나는 강원도 춘천의 토마토농장에서 일했다. 계약서상 노동시간은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40분까지였다. 실제로는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40분까지 일했다. 점심시간은 1시간이었고, 한 달에 이틀 쉬었다. 월급은 110만원이었다.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일했지만, 사장님은 내가 일한 만큼 월급을 주지 않았다.

ㄱ 돈을 제대로 주고 휴게시간을 지켜야 초과노동도 할 수 있다. 그 전제 없인 불공정하다. 2012년 4월부터 한국에서 일했다. 8시간으로 계약했으나 11시간 일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상추를 심고, 기르고, 약 치고, 수확했다. 점심시간은 1시간 줬다. 한 달에 308시간 일하고 92만원 받았다. 나중엔 몸이 너무 힘들어서 거의 기다시피 하며 일했다. 몸이 아파 사장님한테 병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사장님·사모님은 기다리라고만 했다. 병원에 가기 위해 밀린 임금을 달라고 부탁했다. 사장님은 다른 사람한테 빌리라고 했다. 돈을 빌릴 사람이 내겐 없었다. 사장님은 병원에 보내는 대신 누군가를 불러 링거를 맞혔다. 정식 의사는 아니었다. 링거 바늘을 잘못 찔러 피가 났다.

휴일만큼은 쉬기 원했다[‘전제’와 현실의 톱니는 어긋나 있다. 세 사람 모두 초과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했다. 지급받는다 해도 세 사람이 말하는 하루 노동시간의 한계는 10시간이다. 인간의 몸인 까닭이다. 휴일만큼은 쉬기 원했다.]

ㄷ 10시간 이상은 돈을 더 줘도 일할 수 없다. 내겐 그럴 힘이 없다.

ㄴ 여름엔 11시간씩 일했다. 딸기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데 너무 덥고 힘들었다. 쓰러질 것 같아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일을 할 수 없어 2시간 정도 쉬었는데 사장님이 월급에서 3만원을 제했다. 일한 만큼 돈을 준다고 해도 10시간 이상은 불가능하다.

[두 선택지가 현실에선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어느 쪽도 노동자의 뜻대로 되진 않는다. 노동자 스스로 일하는 시간을 결정할 수 없다. 계약서를 초과해 노동해도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근로시간·휴게·휴일 의무에서 농·축산업을 배제한 근로기준법 제63조 탓이다.]

ㄱ 초과노동만큼 돈을 더 주면 억지로라도 일하겠지만 돈은 안 주고 일만 시키니까 너무 힘들다.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무엇을 선택할 거냐는 질문은 아무 의미 없다.

#사업장 변경해주면 초과노동 임금 포기할 수 있다 ↔ 사업장 변경 늦어져도 초과노동 임금 받겠다 [초과노동 임금을 받지 못하는 농업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을 바꾸고 싶어 한다. 사인해주는 고용주는 많지 않다(고용주의 동의 없인 사업장 변경 불가). 초과노동 임금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고용주의 사업장 변경 사인을 받는 노동자도 있다.]
캄보디아 농촌 이주노동자들(여성 두 명)이 지난 11월10일 저녁 경기도 안산역(단원구 원곡동) 앞에서 지나가는 타국 이주노동자에게 ‘인권밥상’ 캠페인 탄원서명(근로기준법 제63조 폐지·사업장 변경 허용)을 받고 있다. 지구인의정류장 제공

캄보디아 농촌 이주노동자들(여성 두 명)이 지난 11월10일 저녁 경기도 안산역(단원구 원곡동) 앞에서 지나가는 타국 이주노동자에게 ‘인권밥상’ 캠페인 탄원서명(근로기준법 제63조 폐지·사업장 변경 허용)을 받고 있다. 지구인의정류장 제공

ㄹ 사업장 변경을 한 차례 했다. 사장님은 쉽게 사인해주지 않았다. 월급날이 돼도 제 날에 잘 주지 않았다. 일은 계약서보다 많이 시키고 돈은 계약서만큼만 줬다. 초과노동 임금을 달라고 하면 내가 묵는 숙소 사용료로 대체(제1034호 특별기획 ‘약속을 배반하는 비정한 계약들’ 참조)했다고도 했다. 숙소는 여름엔 너무 덥고 겨울엔 너무 추운 컨테이너였다. 노동청에 진정을 했다. 초과노동 임금을 못 받고 사업장 이동 사인을 받았다.

[‘사장님이 좋아서’ 스스로 포기한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좋은 사장님’의 기준은 소박했다.]

ㄷ 일이 너무 힘들어서 일터를 옮기고 싶었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미등록으로 사라졌는데 추가 인력을 구해주지 않았다. 많은 일을 혼자 해야 했다. 우리 사장님은 좋은 사장님이었다. 사장님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밥 먹는 동안엔 다른 일을 시키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할 때는 짬짬이 쉴 수 있도록 해줬다. 퇴직금도 줬고, 사업장 변경에 사인도 해줬다. 초과노동 임금은 주지 않았다. 그래도 사장님이 좋은 사람이어서 노동청엔 이야기하지 않았다. 받지 못한 돈은 수백만원이다.

‘좋은 사장님’의 기준은 소박했다[ㄱ과 ㄴ은 사업장 변경이 늦어져도 초과노동 임금을 꼭 받겠다고 했다.]

ㄱ 계약서보다 일을 훨씬 많이 했지만 사장님은 돈을 주지 않았다. 2년 반 동안 일한 초과노동 임금을 합치면 800만원쯤 된다. 적은 돈이 아니어서 포기할 수 없다. 사장님이 사업장 변경 사인을 해줘도 돈은 꼭 받고 싶다. ㄷ의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라면 나도 초과노동 임금을 안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장님은 나쁜 사람이다.

ㄴ 사장님이 월급날 월급을 주지 않고 건너뛴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계약서상 월급은 110만원인데 100만원만 주기도 했다. 사장님한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면 사모님한테 이야기하라고 했다. 사모님한테 이야기하면 사장님한테 물어보라고 했다. 초과노동 임금도 주지 않았다. 내가 일한 만큼 임금을 준다면 나는 사업장을 옮기지 않을 것이다. 농업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어딜 가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더 쉬운 일을 바라지도 않는다. 일한 만큼만 정직하게 받고 싶다. 사장님은 사인받으려면 28만원을 달라(이주노동자 고용 과정에서 든 수수료 요구)고 했다. 나는 주지 않았고 사장님도 사인해주지 않았다. 퇴직금도 안 줬다. 공장과 농장에 적용되는 법이 왜 달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농장에서도 법이 잘 지켜질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

[고용허가제는 사업장 변경을 금지하고 있다. 사업장 변경 기록을 남기면 4년10개월 뒤 체류기간을 연장할 수 없다. 고용주의 임금체불 등이 증명돼야 불이익 없는 이동이 가능하다. 입증 책임은 노동자에게 있다. 사업장을 옮기지 않고 견딘다고 초과노동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택 자체가 딜레마다.] #미등록으로라도 벗어나겠다 ↔ 어쩔 수 없지만 그냥 참겠다 [ㄷ은 갈등하고 있다. ‘미등록’ 선택 여부를 놓고 고민 중이다. 농업 쪽에서 일하는 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다. ‘좋은 사장님’도 무서울 때가 있었다.]

ㄷ 사장님이 술 마시면 자주 기숙사에 들어왔다. 샤워시설에도 문이 없고 커튼만 달려 있었다. 사장님이 말로 성희롱도 했다. 사장님과 같이 지내기 힘들어 미등록이 되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다. 미등록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불법’ 되는 건 두려운 일이다. 붙잡히면 출국당한다. 법도 모르고 언어도 안 통하는데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가족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참는 것도 힘들다. 사업장 변경 동의를 받았지만 다시 농업 쪽에서 일을 구할진 모르겠다. 농업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아 두렵다. 미등록이 돼 공장에 취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있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ㄱ, ㄴ, ㄹ은 견디는 쪽에 서 있다. 미등록이 됐을 때 닥칠 일을 그들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ㄱ 나를 포함해 세 명의 캄보디아 여성이 같이 일했다. 토마토 하우스에서 일했는데 늘 초과노동을 했다. 근무시간이 지나도 그날 정해진 일은 꼭 끝내야 했다. 임금은 계산해주지 않았다. 어느 날 한 명이 농장에서 사라졌다. 일을 너무 힘들어하다 도망간 거다. 한 명이 빠진 만큼 일이 많아졌다. 다른 한 명도 몸이 점점 안 좋아지더니 캄보디아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나 혼자 일했다. 세 명이 하던 일을 혼자 해야 했다. 외딴 농장에서 혼자 살면서 외롭고 무서웠다. 그래도 미등록이 될 순 없다. 한국말도 모르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다. 가족도 마음에 걸린다. 나중에 고향 갈 때 멋지게 돌아가고 싶다.

ㄴ 캄보디아 가족들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미등록은 못 된다. 미등록 됐다 잡히면 강제출국되니까 버티는 수밖에 없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어야 캄보디아 가족들한테 보내줄 수 있다. 한국에 올 때 빌린 돈도 갚아야 한다. 캄보디아가 가난하니까 한국 와서 돈을 버는 거다. 가족이 내게 기대고 있다. 내가 번 돈으로 가족이 살아간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노동력 거래 시스템[고용허가제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노동력 거래 시스템이다. 송입국과 송출국 간의 ‘계급’ 차이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자본주의는 선택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 국내 농업 이주노동자들에게 선택은 푹푹 가라앉는 늪일 때가 많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ㄱ은 ‘절망’이라고 표현했다.]

“미등록 안 되려면 사장님이 사업장 이동을 허락해줘야 하는데 거부했다. 노동청은 ‘사장님이 사인 안 해주면 계약이 끝날 때까지 참아야 한다’고 했다. 사장님은 놓아주지 않고 노동청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이젠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절망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인권밥상’ 캠페인 온라인 탄원 참여: http://amnesty.or.kr/mw2014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