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국제앰네스티의 ‘고통을 수확하다: 한국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착취와 강제노동’ 보고서(10월20일 발간)가 파악한 노동현장 실태와도 큰 틀에서 일치한다. 앰네스티 보고서도 선행조사 결과로서 인권위 보고서를 참고했다.
인권위는 보고서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고용노동부에 정책 개선을 권고했다. 노동부는 지난 8월21일 인권위에 이행계획을 제출했다. 은 장하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로부터 노동부의 계획서를 입수해 살펴봤다. 중요 권고 사항 대부분에 노동부가 난색을 표해 농·축산 이주노동의 현실 개선으로 이어지긴 어려워 보인다.
노동자 혹사의 핵심 근거법으로
인권위는 근로기준법 제63조(적용의 제외)를 개정해 ‘농·축산업 내 세부 업종별 특성이 반영되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해당 조항은 근로기준법상의 노동시간과 휴게·휴일 규정에서 농·축산업을 제외해 ‘노동자 혹사의 핵심 근거법’이란 비판을 받아왔다.
노동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답했다. “농·축산업 등 1차 산업은 업무 특성 때문에 근로기준법의 근로시간 등의 규정이 적용되지 않고 있다”며 업종별 특성에 맞춘 적용 제외 대상 구분은 어렵다고 밝혔다. “영세 농가의 현실을 감안할 때 근로시간 등의 규정을 적용하는 데에는 심도 있는 실태 조사, 외국 사례 등의 검토와 함께 당사자 논의 등 장기 검토가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현재 농·축산 이주노동 현장에선 사실과 다른 허위 계약서가 난무하고 있다. 고용주가 최저임금법을 위반한 계약서를 작성해도, 노동시간과 휴게시간을 엉터리로 계산해도,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계약서를 써와도, 고용센터는 제재 없이 추인해왔다.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이 근로에 상응하는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업종별 특성에 맞는 표준근로계약서를 만들라’는 권고에도 노동부는 “장기 검토가 필요하다”고 회신했다.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표준근로계약서에는 주요 근로조건을 명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므로, 농·축산업 사용자와 외국인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세부 내용을 명시하여 근로계약을 체결하면 될 것”이란 설명을 붙였다.
노동부의 답변은 현실을 외면한 책임 회피란 지적이 불가피해 보인다. 현재 농·축산 이주노동 현장에선 사실과 다른 허위 계약서가 난무하고 있다. 고용주가 최저임금법을 위반한 계약서를 작성해도, 노동시간과 휴게시간을 엉터리로 계산해도,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계약서를 써와도, 고용센터는 제재 없이 추인해왔다. 고용노동부와 고용센터가 거짓 계약서 양산을 승인하거나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관리·감독 부실이 농·축산 이주노동 현장을 뒤틀고 있는 현실에서도 노동부는 ‘노사 간의 문제’란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수준의 숙소인권위는 ‘외국인 근로자의 책임이 아닌 사업장 변경으로 근로자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방안’도 요구했다. 노동부는 “임금체불, 폭행 등 당사자 간의 주장이 불일치하고 객관적인 증거도 확보할 수 없는 경우에는 고용센터에서도 달리 처리할 방법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임금체불이나 인권침해 등을 당한 농·축산 이주노동자가 고용센터에 사업장 변경을 요청할 경우 현재 입증책임은 이주노동자에게 있다. 한국말이 서툰 이주노동자들은 통역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상황 설명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고용센터 직원들은 결국 고용주의 설명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 이주노동자들과 시민단체의 원성을 사왔다.
‘숙식’ 조건을 명확히 하는 문제를 두고도 인권위 권고는 수용되지 못했다. ‘최소 기준 이상의 숙소가 제공될 수 있도록 법령에 기준을 마련하라’는 의견에 노동부는 “우려”를 표했다. “외국인 근로자만을 대상으로 최소 기준 이상의 주거 제공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내국인에 대한 역차별은 물론 사업주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울 우려가 있다”고 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수준의 숙소’는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의 비인간적 삶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해왔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법에 강제 장치를 두지 않으면 개선이 어렵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임금에서 숙식비를 공제할 경우 근로계약서에 비용과 지급 방법을 명확하게 기재하도록 하라’는 권고도 사실상 거부했다. 노동부는 “숙소 무료 제공이 87% 이상으로 높은 상황에서 표준근로계약서에 구체적으로 명기하도록 하면 오히려 무료 제공 비율이 낮아질 가능성도 있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를 내놨다.
인권위는 ‘사업주 대상 교육을 의무화하고 교육과정에 근로기준에 대한 것을 포함하라’고 요청했다. 노동부는 부정적 견해를 냈다. “외국인 고용 사업장 전체에 의무교육을 강제할 경우 행정력의 한계와 함께 사업장에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는 반면 교육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불명확하다”고 했다. 사업주 교육을 임의제로 운영하고 인센티브를 주는 현행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이행계획서만 놓고 보면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할 정책 의지가 정부에는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앰네스티 보고서가 ‘강제노동과 인신매매에 기여하는 법·제도’로 지목했던 독소조항들도 계속 위력을 떨칠 것으로 보인다.
앰네스티도 보고서 발간과 동시에 13개 사항의 이행을 권고한다. △고용허가제 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허용 횟수 제한 해제 △근로기준법 제63조 폐지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했다는 이유로 비자 연장·갱신이 제한되거나 거부되지 않도록 현행법 개정 △사업장을 변경하려는 이주노동자에게 구인 중인 고용주 명단을 제공 △근로기준법에 적절한 식사 및 숙소에 대한 명확한 기준 설정 등이다. 인권위 권고와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고용주는 처벌받지 않고인권위에 보낸 노동부의 회신은 앰네스티 보고서가 내린 ‘결론’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재확인시킨다.
“지난 5년 동안 국제노동기구와 기타 유엔 기구들은 한국 정부에 고용허가제하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는 유연성을 보장해 인권침해와 차별을 당하게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하라고 반복적으로 요구해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몰염치한 고용주가 이주노동자를 착취해도 사실상 처벌받지 않는 상황을 낳았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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