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이 주로 불만이었다면, 혁명이 성공하는 비밀은 항상 희망이었다. 25년 전인 1989년 유럽에 몰아친 ‘혁명의 날들’은 이런 경험칙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89년 폴란드, 헝가리,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등 동유럽 공산국가들은 반체제 민주주의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89년 혁명’은 1789년 프랑스혁명이나 1917년 러시아혁명 때와 달리, 탁월한 지도자도 없었고 명료한 사상도 뒷받침되지 못했다. 심지어 혁명에 따라 나오기 마련인 폭력도 예외에 불과했다. 루마니아를 제외하면 혁명은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1989년 ‘평화혁명’은 일국적 차원을 넘어 여러 유럽 국가들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혁명의 영향은 장대했다.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로 유럽 냉전은 끝났고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으며 유럽은 통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1989년 ‘유럽혁명’이 특히 강력했던 배경은 단순히 공산주의 억압에 대한 거부를 넘어 새로운 삶의 양식을 지향했다는 점에 있다. 아울러 특정 계급이 아니라 평범한 인민들 대다수가 강한 시민이 되고자 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그들은 시민사회를 통해 결집하고 연대하며 국가와 당에 대항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열망과 지향을 폭발적으로 표현했다. 인민들은 이름 없지만 용기 있는 개인들의 집합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단체와 조직을 결성하며 새로운 열망과 지향을 강령적 요구로 전환하는 능동적인 정치 주체로 나섰다. 다시 말해, 그 혁명은 흩어진 불만을 최소한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조직된 희망이 폭발하는 방식의 것이었다.
조직된 희망의 폭발이런 과정을 미국 역사가 토니 젓은 1989년 당시 동유럽 주민들에게서 “공산주의의 반대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유럽”이었다는 말로 요약했다. 젓이 말한 공산주의 반대로서의 ‘유럽’은 단순히 자유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이데올로기 차원의 것이라기보다는 더 큰 희망들을 표현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복지와 삶의 안전 체제를 갖추고 평등과 연대를 지향하는 독특한 ‘유럽적 삶의 방식’이었다. 그 희망과 기대야말로 혁명의 진정한 동력이었다.
당시 불만의 표출과 어우러진 희망의 발현이 가장 잘 드러난 예가 1989년 가을 동독 반체제 민주혁명과 11월9일 베를린장벽의 붕괴였다. 1961년 8월13일 동독 공산정권은 서독과 서방의 파시즘 세력으로부터 동독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반파시즘 보호 장벽’을 베를린에 세우기 시작했다. 그 뒤 28년 동안 베를린장벽은 공산주의 억압의 상징이자 냉전의 아슬아슬한 곡예 현장이었다. 1961년 8월22일 장벽을 뚫고 동독을 탈출하다 첫 사망자가 발생한 뒤 1989년 3월8일 마지막 사고사에 이르기까지 베를린장벽 때문에 목숨을 잃은 동독인, 이름하여 ‘장벽 희생자’는 136명이었다.
장벽 희생자 수는 서독의 전투적 반공주의 단체들이 오랫동안 주장하던 규모보다는 훨씬 적었으나, 동독 정권의 폭력성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베를린장벽은 실제로 냉혹한 인권유린의 현실 그 자체였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이동과 소통을 막는 너무도 구체적이며 흉물스런 장치였던 것이다.
물론 1970년대 서독 정부의 동방정책을 통한 동·서독 간 화해·협력 정책으로 인해, 동독 주민들 일부는 서독이나 서베를린으로 합법적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상호 간 가족 방문도 큰 규모로 허용됐다. 이를테면 1987년 한 해 동안 모두 2만9033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합법 이주했고 동독 정치범 1083명이 서독 정부의 돈으로 ‘구출’되기도 했다. 다양한 경로로 몰래 서독으로 탈출한 동독 주민도 9718명에 이른다. 그뿐만 아니라 550만 명의 서독인들이 동독을 방문했으며 역으로 500만 명의 동독 주민들도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랜 공산주의의 억압 아래 동독 주민들의 불만은 그치지 않았고, 체제 이탈 움직임은 가속화되었다. 사실 1970~80년대 동·서독 사이에 지속되었던 대규모 상호 방문 및 교류, 동독 주민의 이주가 오히려 체제에 대한 동독 주민들의 불만과 분노를 더욱 자극했고 계속 상승시킨 건 분명하다.
점차 다가온 ‘진실의 시간’훗날 동독 지역 주민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동독 사회는 장벽 붕괴 한 해 전인 1988년부터 이미 확연히 ‘공기가 달랐다’. 예를 들어 당시 동독의 지방 도시와 시골에서 버스와 전차에 올라타면,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사람들은 말을 걸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누군가 정치적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다들 귀를 쫑긋해 듣거나 장단을 맞추는 일이 잦았다. 말이 터진 것이다. 특히 에리히 호네커 총리를 비롯한 동독 지배 엘리트들에 대한 비아냥거림과 조롱은 텃밭과 술집 같은 사적 공간에서 넘쳐났다. 아울러 세상 물정 모르고 여전히 체제에 충성하던 일부 당원들과 국가 관료들에 대한 적대감도 순식간에 퍼졌다. ‘진실의 시간’, 다시 말해 ‘인민공화국’에서 바로 그 ‘인민’이 사실은 체제의 희생자이면서 겉으로는 지지자인 척했던, 그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삶을 전복해 ‘진실’을 되찾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1989년 들어 동독 주민들이 가장 먼저 취한 체제 거부 행위는 동독 탈출이었다. 이미 1989년 초 호네커는 베를린장벽이 100년이 지나도 계속 존속할 것이라며 뻗대었기에 동독 주민들은 동독에서 더 이상 삶의 전망을 찾을 수 없다고 보았고 대량 탈주로 답했던 것이다. 기회는 우회로에서 생겼다. 1989년 봄부터 이미 민주화의 길을 앞서 걷고 있던 헝가리가 9월11일 동독 탈주자들을 위해 오스트리아 쪽 국경을 개방했다. 순식간에 체코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 바이에른주의 도시들로 몰려든 동독 청년들이 맥주를 마시며 환호하는 장면이 연일 서방 언론을 장식했다.
체코로의 여행을 일시적으로 봉쇄한 동독 정권에 맞서 “우리도 나가기를 원한다. 자유를 달라!”며 짐을 싸는 동독 주민들도 계속 늘어났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점차 ‘신포럼’(Neues Forum)이라는 이름의 반체제 운동단체를 중심으로 집회와 시위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9월 중순 들어선 동독 전역에서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체제 비판과 저항운동을 독려하는 단체가 잇달아 결성되었다. 애초 소규모로 시작된 라이프치히시 니콜라이 교회의 촛불시위에는 10월9일 7만 명, 23일 30만 명이 참여했다. 그들은 “우리는 여기 머문다” “떠나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지배자들”이라고 목 놓아 외쳐댔다. 특히 “비어 진트 다스 폴크”(Wir sind das Volk,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가 동독 방방곡곡에서 울려퍼졌다.
10월 내내 나라 전체가 시위를 배웠고 조직화를 실천했다. 10월 한 달 동안 동독 171개 시와 군에서 330회의 시위와 집회가 벌어졌다. 상황은 가속화됐다. 급기야 다른 도시와 달리 비교적 잠잠했던 동독의 수도 (동)베를린에서도 11월4일 30만 명에 이르는 군중이 모여들어 동독 체제의 숨통을 조였다. 11월1일부터 9일까지 열린 며칠간의 시위와 집회는 이미 10월 한 달 동안의 시위와 집회 수를 능가했다. 작은 시골에까지 혁명은 파급되었고,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함성과 아우성에 귀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은 단지 소수의 지배 엘리트에 대항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를 흡수하는 실천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동독 반체제 저항운동은 이미 폴란드에서 등장한 모델을 수용해 10월25일 ‘원탁회의’를 결성하고 전국적 연결망을 확보한 터였다. 그곳에서 만들어진 혁명의 요구는 정권 지배자들을 압박했다. 특히 자유선거, 선거 부정의 진실 규명, 국가안전부 해체, 여행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 자유, 정치범 석방, 부패와 권력 남용 조사, 권력 지배 엘리트들의 사퇴와 징계, 권력분립과 사법부 독립, 병역 대체의 사회적 복무 인정, 환경보호 등이 일차적 요구 사항이었다,
민족통일보다 민주주의를여기서 인상적인 대목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동독 체제에서 경제적 비효율성과 소비재 부족 등의 문제가 없지 않았고 시위에서 생활 개선 등의 요구도 간헐적으로 등장했다고는 해도, 혁명의 원인과 과정에서 경제가 적극적이고 결정적인 변수로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경제야’라는 명제가 여기선 통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1989년 동독의 혁명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거부하고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두 번째 눈여겨봐야 할 사실은 11월 초까지 동독 시위에서 독일 통일 주장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다수 반체제 저항가들은 여전히 ‘사회주의 동독의 민주주의적 갱신’을 추구했다. 특히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적 자유와 함께 사회적 정의와 평등과 연대의 가치가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되었다. 그들은 서독과의 민족통일이 그와 같은 동독의 민주주의적 갱신을 오히려 방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이때 동독 지배자들이 알렉시 드 토크빌의 책을 미리 읽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토크빌은 1789년 프랑스혁명을 분석하면서 혁명적 상황의 주요 특징으로 통치 엘리트들 스스로가 자신의 통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는 점을 들었다. 당시 동독 지배자들은- 토크빌이 프랑스 구체제 엘리트들에 대해 말한 대로- 자신의 권력을 옹호하거나 유지할 수 있는 포괄적인 지식과 통치 기술을 전혀 갖지 못했다. 10월 중순 호네커를 대신해 에곤 크렌츠라는 새로운 서기장이 등장했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할 능력도 대처할 지혜도 그에겐 없었다. 소련의 지지를 받지 못할 무장 진압의 정치적 위험성과 파국은 너무도 명확했기에 그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대안은 정치 개혁과 지배 엘리트의 교체를 서두르고 서독으로의 이주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그들은 실기하고 말았다.
11월6일 뒤늦게 동독 지도부는 새로운 여행법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으로 몰려드는 동독 난민 신청자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체코 정부의 압박과 동독 주민들의 연이은 대중 시위가 원인이었다. 11월9일 오전 동독의 내무부 관리들이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오후에 당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새 여행 규정에 따르면, 동독의 비자와 신고 담당 관청은 “서독으로의 이주 희망자들에게 조건 없이 출국 비자를 발급”할 것이며 “외국으로의 개인적 여행은 조건, 즉 여행 용무나 가족과 친척 거주 증명서 제출 없이 신청될 수 있”고 “즉각 허가될 것”이며 “거부는 특별한 예외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11월9일 저녁 7시. 그 내용조차 전혀 알 길이 없던 동독 정부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로 하여금 크렌츠는 새 여행 규정을 발표하도록 조치했다. “그 규정이 언제부터 발효되느냐”는 이탈리아 기자의 물음에 샤보프스키는 “즉시”라고 답했다. 물론 이것은 실수였다. 사실 새로운 여행 규정의 발표도, 발효 시점도, 애초 10일 오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규정은 곧장 베를린장벽과 동·서독 국경의 전면 개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구 이주는 비자 발급 절차가 필요했고 개인적 여행도 신청과 허가의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의 제한을 풀었다는 것이 특별했을 뿐이다. 끓어오르는 솥의 뚜껑을 잠시 열어두어야만 터지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 나온 동독 지도부의 고육지책이었다.
베를린장벽에서 일어난 ‘미친 일’그렇지만 상황은 곧 극적으로 변했다. 일부 서방 언론들은 동독이 서베를린과 서독으로의 국경을 전면 개방한다고 오해했고, 그날 저녁 서독 뉴스를 통해 그 소식을 들은 수천 명의 동베를린 주민들은 장벽 곳곳의 검문소로 몰려들었다. 희망과 기대를 듬뿍 안고서. 그 시각 동독 지도부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저녁 내내 경제 문제에 대해 엉뚱한 토론만 벌이고 있었다. 장벽은 무너졌고 국경은 열렸으며, 희망은 증폭했고, 상황은 가속페달을 밟았다. 오랜 냉전시대를 지탱하던 ‘철의 장막’은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독일은 곧 통일열차의 시동을 걸고 있었다.
1989년 11월9일 밤, 믿을 수 없는 눈앞의 현실에 독일인들은 모두 ‘반진’(Wahnsinn, 미친 일)이라며 감격했다. 이렇게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희망에 더해 ‘위’의 무능력과 실수로 ‘미쳐’서 믿기지 않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정말 춤을 출 것이다. 그로부터 25년이 흘렀다. 대중은 좌절과 절망에 스러지고 온갖 오만과 위선에 빠진 지배자들로 ‘미쳐’가는 세상 이곳 한반도의 주민들도 ‘우리가 인민이다’를 한번 외쳐볼까? 언젠가 우리도 불만과 거부를 희망과 기대로 키운다면 ‘미친 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25년 전 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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