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님, 그날은 피고인 정지원이 WBC 야구대회 중계가 있어서 재판기일을 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재판장님, 그날은 다른 피고인이 몽골 지역 다큐멘터리 촬영이 있어서 재판기일을 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판사보다 바쁜 피고인들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야구대회를 앞둔 2006년 초 인천지방법원. 무슨 피고인들이길래 판사보다 바쁠까. 피고인들은 박찬호 전담 아나운서로 불렸던 정지원 아나운서, 조직폭력배에게 칼침을 맞을 뻔했던 의 오창희 PD, 조선 성종 이후 인천에서만 17대를 산 인천 토박이로 인천의 언론을 창설하고 지켜온 3대 언론인 집안 출신인 이훈기 기자 등 7명이다. 다니던 회사는 없어졌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계약직으로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어서 여전히 바쁘다. 그래서 재판에 불출석하는 경우가 없도록 재판 시작 전마다 피고인들의 스케줄을 관리해 판사와 재판 날짜를 조율하는 임시 매니저 역할을 해야 했다.
이들은 경인 지역 지상파 방송사인 (구)iTV에서 근무하던 방송인이다. 지금이야 종합편성채널이 등장하면서 큰 차이가 없어졌지만, 전에는 방송이란 전파로 프로그램을 보내는 지상파 방송을 일컬었다. 지상파 방송사는 전국 단위의 KBS·MBC와, 일부 지역에만 전파가 도달하는 지역방송사로 구분된다. SBS도 지역방송사이다. 다만 방송권역이 소비수준이 높은 서울과 수도권이어서 빠르게 정착했다. 대부분의 지역방송사는 일부 프로그램만 자체 제작하고 나머지는 SBS 프로그램을 사서 내보내는 형식으로 운영한다.
(구)iTV만이 유일하게, 인천과 경기를 방송권역으로 하면서, 프로그램을 100% 자체 편성하던 지역방송사였다. 그래서 언론고시생 사이에서는 ‘제2의 SBS’라고 주목받았지만, 실상은 계속 적자여서 ‘만년’ 유망주 신세였다. 지상파 방송이면서도 실속이 없다는 점에서, 프로이면서도 실속이 없었고 연고지도 인천으로 같은 삼미 슈퍼스타즈(1982~85년 활동한 야구팀으로 소설 , 영화 의 배경팀)를 연상케 한다.
(구)iTV에서 일이 터진 건 2004년 12월. 회사는 재무구조 악화로 방송위원회로부터 재허가 추천이 거부될 위험에 놓였고, 이에 노조는 ‘공익적 민영방송’을 전면으로 외치며 대주주의 추가 출자를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회사는 노조와의 회사 정상화를 위한 간담회 전날 전격적인 직장폐쇄를 선언하면서 용역직원 100명을 동원해 회사에 있던 PD·기자 등 노조원들을 정문 밖으로 내모는 방송사 초유의 행태를 저질렀고, 결국 방송위원회는 재허가 추천을 거부해 2004년 12월31일 방송이 중단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7년 12월 현재의 OBS경인TV가 개국할 때까지 노조원들은 실직 상태에서 저임금의 계약직은 물론 일부는 대리운전, 음식점 보조까지 하며 경인 지역에 새로운 지역방송사가 탄생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했다.
유죄판결에도 “판결문 잘 써줬네”앞의 사건은 노조의 파업이 불법이라며 회사가 노조 집행부를 업무방해죄로 기소한 사건이었다. 결론은 50만~150만원의 벌금형. 당시 회사는 방송사가 문을 닫은 것은 노조의 불법파업 때문이라고 여론을 조성했던 터라, 판결문에서 “조합원들의 파업으로 iTV가 재허가 추천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고 오히려 피고인들은 임금협상에서 양보안을 제시하는 등 회사를 살리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회사 측이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자 대주주를 압박하여 재허가 추천을 받기 위하여 파업에 이르게 되었다”고 파업의 성격을 명확히 정리해준 것이 뜻깊었다. 그래서 이들은 유죄판결을 받고도 휴게실에 모여앉아 “판결문 잘 써줘서 판사 참 고맙네” 하고 판사를 칭찬하는 진풍경을 벌였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노조원들의 진정성을 곁에서 지켜보았고, 여러 관련 사건들을 처리했다. 한번은 노조원들에 대한 체불 급여와 퇴직금을 받아내려고 방송사의 방송설비에 이른바 ‘딱지’를 붙이기 위해 법원 집행관과 함께 회사를 방문했다.
안내하던 회사 직원이 집행관과 나를 대표이사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인천지방법원에서 나온 집행관이십니다.”
대표이사는 목례를 하며 정중히 인사했다.
“이쪽은 직원들 소송대리인 변호사이십니다.”
대표이사는 그동안 열받았던지 갑자기 넥타이를 풀면서 나에게 달려들려 했고, 옆에 있던 회사 쪽 변호사와 직원이 말렸다.
애고, 아무리 막판에 투입된 구조조정 전문가로 알려진 대표이사지만, 그래도 방송사 사장인데 행동이 저래서야…. 이런 분위기에서 일해야 했던 조합원들에 대해 새삼 측은감이 들었다.
새 방송사가 생긴 지 만 6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제대로 된 지역방송을 탄생시키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건만, OBS경인TV의 새로운 대주주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얼마 전에 만난 한 조합원은 “해서 뭐하나 거기서 거긴데. 무플방송인데” 하는 무력감과 피로감에 빠져 있었다. 3년간의 생활고는 방송인의 자긍심을 계속 붙들고 있기에는 긴 시간이었다. 그 조합원은 “평범한 월급쟁이지 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열성팬들에 대한 예의니까요나는 조합원들의 3년간의 생활고 못지않은 삶의 장애물에 부딪혀 벽에 달라붙은 딱정벌레처럼 꼼짝하지 않다가 이번주부터 꿈틀거리면서 사회로 나가려고 한다(필자는 뇌병변 3급 장애를 입어 28개월 동안 재활병원에 칩거하다가 7월 둘쨋주부터 서울시 복지재단 공익법센터에서 근무하기로 했다). OBS경인TV 조합원들도 계속 꿈틀거려야 한다. 그것이 박민규의 소설 처럼 방송계의 삼미슈퍼스타즈를 열렬히 응원해온 나를 포함한 열성팬들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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