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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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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빨간 RC 비행기

등록 2014-04-19 15:09 수정 2020-05-03 04:27

서울 어딘가에 한 아이가 살고 있다. 이 아이의 이름을 편의상 A라고 하자.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A에 대한 그저 그런 이야기다. A의 성별은 남자이고 현재 6학년이다. 집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평범하게 자라고 있다. A가 5살일 때, A는 유독 탈것에 흥미를 가졌다. 엄마와 외출을 나가는 날이면 길을 걷다 보이는 자동차들의 이름을 일일이 다 알아맞히기도 하고, 간혹 함께 서점에 가는 날이면 A가 집어오는 책들의 표지엔 대부분 자동차나 비행기가 대문짝만하게 있었다. 어쩌다 푸른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이 보이면 바로 안방으로 달려가 저 자국의 정체는 무엇인지, 대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보곤 했다.

저 비행기 자국은 어디서 오나요

A의 엄마와 아빠는 이런 A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열심히 번 돈으로 매달 자동차·비행기 모형과 관련 책들을 사다주었다. 탈것에 대한 A의 호기심은 줄어들지도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도 않았다. 더불어 A의 소중한 흥미에 대한 부모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 덕택에 A는 유치원에서 ‘박사님’이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보내는 편지에는 오히려 A가 다른 곳에도 흥미를 보였으면 좋겠다는 우려가 섞여 있을 지경이었지만, A의 부모는 그것을 별로 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하튼 그렇게 박사님 A는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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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과학 과목을 배우게 된 A는 4학년이 되자 곧바로 우주소년단(지금은 ‘한국과학우주청소년단’으로 이름이 바뀜)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A의 관심사를 잘 알고 있던 A의 부모님은 얼른 A의 단복을 맞췄고 매번 회비를 냈다. A의 포부는 날로 커져갔다.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A의 꿈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역시나 고학년이 되어서도 A의 별명은 박사님이었다. 매일 아침 A는 아빠와 뉴스를 보면서 “나도 훌륭한 우주인이 되어서 국가와 인류의 미래를 좀더 밝은 곳으로 이끌겠다”는 거창한 다짐을 하며 등굣길에 나섰다. 아빠는 미래의 박사님, A의 뒷모습을 보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해마다 4월은 A에겐 축제의 달이었다. A의 1년 중 가장 즐거운 달인 ‘과학의 달’이 바로 4월이기 때문이다. A는 항상 이맘때 빛나는 상장을 집 거실에 붙였다. 글라이더, 고무동력기, 물로켓, 과학상자…. 이 모든 것은 A의 손끝에서 특별히 빛났다. 다른 아이들이 만든 글라이더와 고무동력기 그리고 물로켓은 A가 만든 것들의 반도 날질 못했다. 상장을 받아오면 A의 아빠는 이른바 ‘특별 용돈’을 A에게 쥐어줬고, A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만들어준 어린이통장에 그것을 고스란히 저금했다. 꼬박꼬박 저축하는 버릇을 들인 A의 통장은 0이 7개를 찍기 직전이 되었다. A가 저축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기는 2학년 여름, A가 한강 둔치에서 봤던 빨간 무선조종(RC) 비행기 한 대였다.

“그 비행기는 다음에 사자”

A는 6학년이 되었고 가장 즐거운 4월이 다시 찾아왔다. A의 아빠는 심각한 표정으로 신문을 들여다보았고, 뉴스에서는 종일 북한에서 보냈다는 작은 비행기를 설명했다. 브라운관에 비친 새로운 비행기를 보고 신나는 표정을 짓던 A는 어느새 표정이 굳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300여 대의 무인기가 날아다니는데 국방부는 무엇을 했느냐고 호통치는 앵커도 보이고, 우리나라에도 비행기 좋은 거 있다는 기사도 보인다. A는 약간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A의 아빠, 갑자기 돌아서서 A에게 말한다. “A야, 그 RC 비행기 좀더 큰 다음에 사자.”

박정근 사진관 사장 겸 국가보안법 피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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