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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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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야, 한 명만 죽어서

⑫ 소년과 소녀의 전쟁
한국군이떠났다, 마을엔 무수한 주검과 불탄 집만 남았다
등록 2014-03-14 14:30 수정 2020-05-03 04:27
1968년 2월12일 사건 현장에서 배와 엉덩이에 큰 부상을 입은 응웬티탄의 오빠 응웬득상이 20살에 찍은 사진, 목숨을 잃은 엄마 판티찌, 이모 판티응우, 언니 응웬티쫑, 남동생 응웬득쯔엉(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응웬티탄 제공

1968년 2월12일 사건 현장에서 배와 엉덩이에 큰 부상을 입은 응웬티탄의 오빠 응웬득상이 20살에 찍은 사진, 목숨을 잃은 엄마 판티찌, 이모 판티응우, 언니 응웬티쫑, 남동생 응웬득쯔엉(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응웬티탄 제공

엄마.

소녀는 뛰었다. 무작정 뛰었다. 머릿속은 엄마의 얼굴뿐이었다. 엄마를 찾아야 해. 엄마, 엄마, 엄마. 들판을 가로질렀다. 옆구리를 손으로 누르며 뛰었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손은 핏물로 흥건했다. 뛰다가 자꾸만 넘어졌다. 찢어진 옆구리 사이로 창자가 삐져나왔다. 손으로 눌러 집어넣고 다시 뛰었다. 헬리콥터 소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또 넘어졌다. 하늘이 빙빙 돌았다. 누군가 손을 잡았다.

총성 듣고 숨어들어간 동굴

1968년 2월12일 오후. 베트남 중부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퐁넛촌은 지옥의 풍경이었다. 한바탕 총성과 폭음이 머물다 간 뒤였다. 곳곳에 흩어진 주검들의 침묵을 뚫고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의 신음이 한 줄기 연기처럼 새나왔다. 현장에 도착한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이 구조작업을 폈다. 마을 공터와 오솔길엔 주검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8살 소녀 응웬티탄은 엄마 판티찌(34)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랐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들판을 헤매다가 쓰러졌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피 흘리며 누워 있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까. 확인해봐야 하는데, 기운이 없었다. 창자는 자꾸만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죽는 걸까. 그때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은 뒤 작은 몸을 들어안았다. 남베트남 민병대원이었다. 그는 소녀를 헬리콥터 안으로 옮겼다. 프로펠러의 소음에 사람들의 고함과 외침이 묻혔다. 헬리콥터는 곧 하늘을 향해 날았다.

그날 오전 퐁니촌 야유나무 근처에 위치한 응웬티탄의 집에는 오빠 응웬득상(15), 언니 응웬티쫑(11), 남동생 응웬득쯔엉(6), 이모 판티응우(32), 세상에 나온 지 8개월밖에 안 된 이모의 아들인 조카 도안테민이 함께 있었다. 마침 동네 오빠 찐쩌(13)도 왔다. 아버지 응웬득푸엉은 없었다. 1년 전 서른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 홀로 된 엄마는 인근 다낭에서 장사를 하며 억척스럽게 돈을 벌었다. 새벽에 집을 나가 밤 9시가 되어야 돌아왔다. 이모가 엄마를 대신해서 남매들을 돌봤다. 그래도 이날은 엄마가 일찍 오기로 돼 있었다. 정월 대보름 하루 전날(음력 1월14일)이라 장을 보러 나갔다. 0살부터 15살까지, 친척과 동네 친구가 뒤섞인 6명의 아이들은 소란스럽게 놀았다. 채소심기 놀이를 하고 병모으기를 한다며 마당에서부터 집안 구석구석까지 어지럽게 쏘다녔다. 왁자지껄하게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총을 든 낯선 한국 군인이 집 안으로 침입하기 전까지는.

멀리서 들린 총성은 아이들의 웃음과 소란을 삼켰다. 총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이모와 응웬티탄을 비롯한 이들 7명은 모두 겁을 먹고 동굴로 숨었다. 미군 폭격에 대비해 파놓은 깊이 1m, 폭 4m의 작은 공간이었다. 집에 들이닥친 한국 군인은 동굴을 발견하고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모는 나가지 말라고 했다. 한국 군인은 수류탄을 보여주며 던지는 시늉을 했다. 아이들은 무서움을 견딜 수 없었다. 언니 응웬티쫑이 가장 먼저 올라가는 순간… 지우고 싶은 기억의 시간들이 흘렀다. 분명한 것은 응웬티탄이 배에 총을 맞고도 날쌔게 근처 쩐티득(41) 아주머니 집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이다. 쩐티득은 1시간 전에 응웬티탄의 집에 놀러온 찐쩌의 엄마였다. 쩐티득은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찐쩌도 따라오지 않았다. 배와 엉덩이에 총을 맞고 아예 일어서지 못하는 오빠 응웬득상만이 옆에 있었다. 숨이 찼다. 목이 말랐다. 주전자가 눈에 띄었다. 목을 뒤로 젖혀 주전자에 담긴 물을 다 비워버렸다. 살 것 같았다. 이제 엄마를 찾으러 가자. 그러곤 대책 없이 뛰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알았다. 한국군은 6살인 남동생 응웬득쯔엉의 입에 대고 총을 쏘았다. 동생은 입이 다 날아간 채 죽었다고 했다. 언니 응웬티쫑과 동네 오빠 찐쩌는 동굴 앞에서 총에 맞아 즉사했다. 이모 판티응우는 나중에 집을 불태우려는 군인들을 말리다 칼에 찔려 죽었다. 이모의 아들 도안테민은 엄마 옆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응웬티탄은 오빠 응웬득상과 함께 헬리콥터로 후송됐다. 집에 있던 7명 가운데 5명이 죽었다. 그렇다면 그토록 찾았던 엄마는 어디에 있는가.

6살 남동생 입에 총구를 대고…

응웬티탄은 인근 다낭의 병원 침상에서 눈을 떴다. 의식을 차리자 곁엔 외할머니 응웬티소아(67)뿐이었다. “엄마는 어디 있죠?” “아, 엄마는 집에 일이 많단다. 걱정하지 마라.” “동생은요? 오빠는요? 언니는요?” 속사포 같은 질문에 외할머니는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는 곧 온다”고만 했다. 순진한 8살 소녀는 진짜로 믿었다. 엄마는 괜찮지 않았다. 마을 구덩이의 그 주검 무더기 속에 엄마도 있었다. 정월 대보름 전날이 아니었다면, 다낭에서 일하느라 밤늦게 돌아왔을 텐데. 그렇다면 병원에서 딸을 지켜줬을 텐데. 소녀 응웬티탄은 엄마도 잃고, 언니도 잃고, 동생도 잃었다. 이제 유일한 혈육은 엉덩이가 날아간 오빠뿐이었다.

엄마.

소년은 뛰었다. 무작정 뛰었다. 엄마는 확실히 없었다. 아기를 낳으러 디엔반현에 있는 병원에 갔다. 아빠도 엄마를 따라갔다. 소년은 책임감이 강했다. 오른쪽 다리에 총을 맞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부위를 천으로 묶었다. 입에서는 “엄마”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동생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들판을 가로질러 달렸다.

쩐지옙(15)은 퐁넛 입구의 집에 있는 동굴에 숨어 있다가 나온 뒤였다. 마을 근처 구덩이에 쓰러진 10여 구의 주검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둘째 동생을 찾아야 했다. 안 보였다. 퐁니 쪽으로 달려갔다. 개울 근처에도 여러 구의 주검이 누워 있었다. 주검마다 바나나잎들로 덮였다. 쩐지옙은 바나나잎을 하나씩 뒤집으며 얼굴을 확인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마침내 찾았다. 5살배기 동생 쩐뜨가 처참한 모양을 하고 엎어져 있었다. 얼굴은 볏짚과 흙 범벅이었다. 가슴과 발에 총자국과 칼자국투성이였다.

뭔가 불타는 냄새를 맡지 않았더라면, 쩐지옙은 동굴 속에서 나오지 않았으리라. 첫 총성이 나자 할아버지 쩐호안(70), 할머니 응웬티우엉(77)과 함께 숨었지만, 연기 냄새를 맡는 순간 물소가 걱정됐다. 엄마·아빠가 애지중지하는 가족의 재산목록 1호였다. 벽돌로 지은 집과 달리 외양간은 초가집이었다. 물소가 타 죽으면 안 되었다. 가축을 지키겠다는 본능에 이끌려 집 밖으로 나왔다가 다리에 총을 맞았다. 50m 밖에서 한국 군인들이 떼지어 몰려왔다. 쩐지옙은 비틀거리면서도 물소를 묶은 줄을 풀었다. 할아버지는 뒤따라나오자마자 가슴에 총을 맞았다. 쩐지옙은 다시 집 동굴로 들어가 동생 쩐반린(9), 쩐티땀(3)과 함께 한참을 숨었다. 조용해서 나가보니 한국군이 물러간 자리에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이 몰려왔다. 그들이 든 총을 보자 다시 공포가 밀려왔다. 또 동굴로 숨었다. 조금 뒤 아버지 쩐탄(41)과 고모 쩐티옷(30)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살았다는 마음으로 나갔을 때 아빠가 물었다. “쩐뜨는?” 몇 시간 전부터 안 보이던 녀석이었다. 밖에서 놀다가 군인들과 맞닥뜨렸다면…. 불쑥 엄마의 질책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허겁지겁 달려나가 마침내 개울가에서 찾은 동생은, 바나나 잎사귀에 덮여 말이 없었다.

엄마는 물었다 “우리 식구 다 죽었나요?”

아빠는 디엔반현의 병원에서 마을이 불탄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모와 함께 달려온 터였다. 산후조리 중이던 엄마 응웬티수웬(39)은 빨리 집에 가보라며 아빠의 등을 떠밀었다. 고모가 동행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1번 국도에선 미군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접근을 막았다. 저 멀리 퐁니·퐁넛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민병대원 중 일부는 마을에 가족이 살았다. 그들은 빨리 들어가서 주민들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군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국군이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당장 뾰족한 수는 없었다. 되레 한국군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컸다. 총 몇 자루 들고 가봤자 화력에서 게임이 안 됐다.

아빠와 고모는 마침내 쩐지옙이 찾아낸 쩐뜨를 목도했다. 고모 쩐티옷이 쩐뜨를 들어올렸다. 총을 여러 발 맞은 쩐뜨의 몸은 너덜너덜했다. 아이들의 주검은 도처에 있었다. 돌이 채 안 된 아이도 있었다. 고모는 그날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람의 뼈와 내장을 처음 보았다. 이렇게 많은 주검을 보기도 난생처음이었다. 고모는 오전에 먹은 음식물을 몽땅 게워냈다. 그날로부터 일주일간 밥을 먹지 못했다.

엄마는 병원으로 돌아온 아빠에게 체념하듯 물었다. “우리 식구들 다 죽었나요?” 아빠는 “한 명만 죽었다”고 답했다. 엄마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아빠가 “안심해도 좋다”고 위로하자 역정을 냈다. “웃기지 마요. 거짓말하는 거 다 알아요. 살아 있다면 내 눈앞에 보여줘요.” 다리에 총을 맞은 쩐지옙과 가슴을 총을 맞은 할아버지는 엄마가 있는 디엔반현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나머지 멀쩡한 동생들도 왔다. 실물을 보고서야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믿었다. 한 명만 죽어 다행이라는 역설.

엄마.

두 명의 엄마는 결국 모두 하늘나라로 갔다. 응웬티탄의 엄마만이 아니었다. 그날 병원에서 막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던 쩐지옙의 엄마도 두 달 뒤 지뢰를 밟고 저 세상 사람이 됐다. 소년과 소녀는 살았다. 다리에 작은 총상을 입었던 소년 쩐지옙은 디엔반현의 작은 병원에서 일주일간 입원했다. 배에 치명적 총상을 입었던 소녀 응웬티탄은 다낭의 병원에서 1년간 입원했다. 오빠 응웬득상은 같은 병원에 있다가 다낭 앞 바다에 떠 있는 독일 배의 선상병원으로 옮겨졌고, 1975년 4월 호찌민에 있는 큰 병원에 가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서도 그들은 상처를 딛고 꿋꿋하게 살아갔다.

성별조차 식별할 수 없었던 주검들

“5명의 미 해병과 26명의 (남베트남) 민병대원과 두옹 준위로 구성된 경비조가 마을로 들어갔고 부상용 수송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2명의 여성과 1명의 소년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이들은 헬기로 수송됐다. 경비조는 불탄 주택 잔해에 깔려 있는 2명의 노인과 풀로 덮인 채 도랑 근처에 있는 많은 주검들을 발견했다. 몇몇 주검들은 잔해에서 끄집어냈다. 이들은 너무 심하게 불에 타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성별조차 식별할 수 없었다. 오솔길을 따라가보니 2명의 부상당한 여자와 또 다른 많은 주검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죽일까봐 두려워 신분증을 꺼내들었다. 경비대 일원인 본(Vaughn) 상병이 사진을 찍었다.” 그날, 현장에서 구조 작업을 했던 미 해병 실비아 중위가 사건 나흘 뒤인 2월16일 상급부대에 진술한 내용이다. 헬리콥터로 후송됐다는 2명의 여성 중 한 명이 응웬티탄이다. 또 다른 소년은 응웬티탄의 오빠인 응웬득상이다. 진술서 맨 끝엔 현장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본 상병이 등장한다. 그는 현장 구석구석을 돌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사진엔 어떤 장면들이 담겼을까.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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