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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어번스케처’가 되고 싶다면…

서울광장 땅 속 문화거리 갤러리ㅡ 도시를 화폭에 담아내는 ‘미술학교’로
등록 2025-04-04 19:16 수정 2025-04-09 11:41
어번스케처 차지원씨가 2025년 3월18일 서울광장 땅속 자신의 갤러리 앞에서 서울 양천구 목동 거리를 그린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어번스케처 차지원씨가 2025년 3월18일 서울광장 땅속 자신의 갤러리 앞에서 서울 양천구 목동 거리를 그린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서울 한복판 도시의 허파처럼 자리한 서울광장, 그 땅 밑에 뜻밖의 문화공간이 있다. 덕수궁 앞 지하도로 들어가 을지로입구역 방향으로 걷다보면 서점, 갤러리, 샌드아트, 뜨개질 공방 등이 줄지어 늘어선 땅속 문화거리를 만난다.

이 중 갤러리에서는 ‘길 위의 그림’ 어번스케치 작품들이 투명 창을 통해 행인을 마주한다. 도시(Urban)와 스케치(Sketch)의 합성어인 어번스케치는 19세기부터 이어져온 도시 풍경을 즉석에서 그리는 행위를 일컫는다. 2007년 스페인 출신의 미국 저널리스트 가브리엘 캄파나리오가 ‘어번스케처스’(Urban Sketchers)라는 글로벌 커뮤니티를 창설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차지원씨가 김희숙(오른쪽 둘째)씨 등 어번스케처들에게 그림을 지도하는 동안 지하도를 지나던 한 시민이 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차지원씨가 김희숙(오른쪽 둘째)씨 등 어번스케처들에게 그림을 지도하는 동안 지하도를 지나던 한 시민이 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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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지기’ 차지원(65)씨는 7년차 어번스케처다. 한국방송(KBS)에서 영상디렉터로 33년간 일한 차씨는 정년을 한 해 앞둔 2019년 어번스케치를 하는 화가의 작업실을 찾아 석 달 동안 이를 배웠다. 그리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80일간 걸으며 길에서 만난 풍경을 그 자리에서 그렸다. 이것이 그의 첫 어번스케치다.

그가 이렇게 속성으로 어번스케처가 될 수 있었던 바탕은 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미술학도였기 때문이다. 또 방송사에서 날씨 그래픽 등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에 쓰이는 그래픽을 끊임없이 제작한 덕도 있다. 한데 이 그래픽들은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이라 붓에 물감을 찍어 종이에 그리고 싶은 갈증과 열망이 더 깊어졌다.

붓과 물감, 펜과 잉크, 수첩과 스케치북을 든 채 그가 만난 장면들은 고스란히 그림으로 남았다. 이 작품들이 땅 밑 거리에 걸리자 이를 배우려는 이들이 찾아왔다. 2023년 3월 첫 수업에 참가한 후배 어번스케처들은 지금도 그에게 그림을 배우고 있다.

매주 수요일 수업에 참여해 열심히 붓을 놀리는 김희숙(63)씨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 2020년 퇴직했다. 그리고 인도와 포르투갈로 드로잉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때는 본 것을 기억해 그리거나 사진을 찍은 뒤 나중에 이를 보고 그렸다. 2년 전 차씨에게서 어번스케치를 배운 뒤 비로소 현장에서 바로 그리는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 뒤 수업 참여자들과 함께 떠난 3박4일의 제주 여행에서 별이 쏟아지는 밤 풍경까지 밤낮없이 그림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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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원씨가 서울 강남역 네거리 ‘강남스타일' 조형물 앞에서 그린 어번스케치 작품. 차지원 어번스케처 제공

차지원씨가 서울 강남역 네거리 ‘강남스타일' 조형물 앞에서 그린 어번스케치 작품. 차지원 어번스케처 제공


 

차지원씨가 2024년 10월18일 비 오는 거리 풍경을 그린 그림과 그날의 감상을 적은 글.

차지원씨가 2024년 10월18일 비 오는 거리 풍경을 그린 그림과 그날의 감상을 적은 글.


경기 고양시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최상호(80)씨는 화요일 수업에 참여한다. 서예가이기도 한 최씨는 자신의 글씨에 그림을 더하고 싶어 어번스케치를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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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번스케치에 빠진 전세계 어번스케처들은 도시별로 정기 모임을 열어 한 장소에서 함께 그림을 그린다. ‘어반스케쳐스 서울’ ‘어반스케쳐스 고양’ 같은 지역별 모임이 우리나라에만 20여 개가 있다. 매달 셋째 토요일 모이는 서울의 어번스케처들은 2025년 3월15일 서대문 독립공원에 100여 명이 모여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현장에서 바로 그렸음을 인증하는 어번스케치 도장을 그림 위에 찍었다.

김희숙씨가 어번스케치를 배운 뒤 2024년 가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그린 거리 풍경.

김희숙씨가 어번스케치를 배운 뒤 2024년 가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그린 거리 풍경.


당신도 어번스케처가 되고 싶다면….

영화 ‘해리 포터’에서 해리와 그의 친구들은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기둥을 뚫고 들어가 마법학교 호그와트에 등교한다. 당신도 시청역 3번 출구로 들어가 을지로입구역을 향해 몇 개의 계단을 지나면 ‘눈앞 풍경’을 마법처럼 화폭에 담아내는 ‘미술학교’에 이를 수 있다.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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