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인 나는 누군가의 미래를 예언하지 않는다.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물론 어떤 시대와 문화권에선 이원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가 신탁을 전달하거나 전통 의례를 주관했다. 하지만 2014년 한국엔 이런 문화가 없고 과거에도 없었다. 이런 문화적 인식이 있다고 해도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내겐 타인의 미래를 예언할 능력이 없고 타인의 일생을 보여주는 구슬도 없다. 내겐 ‘메이저리티 리포트’나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없다. 그러니 나는 내가 만난 그 사람의 과거를 직접 듣기 전까지 그의 과거를 짐작할 수 없고 그의 미래가 어떠할지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현재 모습만 겨우 가늠할 뿐이다.
나의 과거와 미래를 ‘아는’ 사람들하지만 내가 만난 사람 중 어떤 사람은 내 과거와 미래를 예단한다. 내가 레즈비언 mtf(male-to-female) 트랜스젠더란 점을 안 사람 중 일부는 내가 과거에 그리고 지금 얼마나 힘들(었을)지 지레짐작하며 날 위로한다. 의료적 조치를 하면 일찍 죽을 수 있으니 절대 하지 말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다른 트랜스젠더 ㄱ의 이야기를 하면 ㄱ이 당연히 트랜스젠더 업소에서 일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트랜스젠더 이슈로 대중강의를 할 때면 강사인 내가 트랜스젠더일 리 없다고 반응하는 사람도 적잖이 있다. 트랜스젠더가 강의할 수 있을 리 없다는 문화적 믿음이 나를 트랜스젠더 이슈에 그저 관심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트랜스젠더의 삶, 트랜스젠더의 시간, 즉 내 삶, 내 시간은 내 범주, 내 몸에 새겨져 있다. 범주만 알면 누구나 트랜스젠더의 일생을 단박에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사회에 만연하다.
트랜스젠더건, 양성애자건, 동성애자건 성인이 되어 10대 시절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아직도 그렇게 사니?”다. 이성애-비트랜스젠더가 아닌 삶이나 행동은 ‘철없는 10대 시절’에나 겪을 법한 일이란 뜻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서 다양한 혼란을 겪는다는 10대 시절엔 동성에게 애정을 느낄 수도 있고 자신의 젠더를 헷갈릴 수도 있지만 20대 이후의 성인이라면 바람직한 이성애-비트랜스젠더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그렇게 사니?”란 말은 단순한 비아냥거림 이상의 사회적 규범을 담고 있다.
“아직도 그렇게 사니?”란 언설은 10대인 사람이 자신을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양성애, 트랜스젠더)의 어떤 범주로 설명할 경우 아직 뭘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는 한때의 감정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10대 LGBT를 전면 부정한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한국 사회에서 10대의 젠더 범주와 섹슈얼리티는 대체로 부정해야 할 대상이자 논란거리로만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생인권조례에서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삭제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은 LGBT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10대의 현재 삶과 고민을 부정한다.
진정성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심문이런 부정은 다음의 질문과 이어진다, “언제부터 당신이 L/G/B/T란 걸 알았어요?” 이성애-비트랜스젠더에겐 결코 하지 않는 이 질문에 20대일 때보단 10대일 때, 10대일 때보단 10대 이전일 때부터 자신의 범주를 알았다고 답한다면 정체성의 진정성은 강해진다. 이것은 얼핏 모순 같지만 그렇지 않다. 뭘 잘 모르는 10대를 거쳐 뭘 안다고 여기는(하지만 무엇을 알지?) 성인이 되어서도 L/G/B/T로 산다면 그만큼 정체성이 확고하단 뜻으로 독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질문이 LGBT를 역사적 존재로 인식하느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질문은 그저 진정성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심문일 뿐이다. 10대의 삶과 LGBT의 삶을 부정한다는 점엔 변함이 없다.
다른 한편 “아직도 그렇게 사니?”란 언설은 LGBT를 과거의 특정 시기에 고착된 존재로 이해하는 발화다. 남성이 여성스럽게 혹은 여성이 남성스럽게 행동하거나 동성을 좋아하는 감정 등은 모두 어린 시절에야 할 법해도 성인이 되어선 그만둬야 할 행동이다. 그럼에도 여전하다면 이는 성장을 거부하는 철없는 행동으로 독해된다. “아직도 그렇게 사니?”란 말은 아직도 철없이 행동한다는 뜻이자 상대를 동시대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특정 순간으로 추방하는 행위다. 그리하여 LGBT(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회적 소수자)는 시간성을 박탈당하며 시간 없는 존재, 몇 가지 단편적 이미지로만 떠도는 유령이 된다.
타인을 시간적 존재로 이해함은 단순히 만나서 얘기를 나눌 시간이 있는지 궁금해하거나 몇 년생인지 나이를 궁금해하는 수준이 아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혹은 특정 정보로 그 개인의 일생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이 변함을 인식하면서 관계 맺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건너편 책상에 있는 사람이 이성애자란 사실을 알았다고 할 때 이 정보는 그 사람의 무엇을 알려줄까?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지 알 수 있을까?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까? 어릴 때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부모와의 관계는 어땠을지 알 수 있을까? 학교에 다녔다면 학교 생활은 어땠는지 알 수 있을까? 이상형은 어떤 스타일인지 알 수 있을까? 상대방이 이성애자란 점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는 그와 관련한 무언가를 알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직접 물어보거나 오랜 시간 친분을 맺으며 조금씩 알아갈 뿐이다.
이성애자라는 게 그 사람의 무엇을 알려줄까하지만 상대방이 LGBT라면? 많은 경우 ‘동성애자는 다들 어떤 가수를 좋아한다던데’(그 가수를 좋아한다니 정말인가보네/그 가수를 안 좋아한다니 너 좀 이상하네)라거나 ‘트랜스젠더라니 학교 생활이 정말 힘들었겠다’라거나 ‘상남자여서 네가 게이인지 상상도 못했어’라고 반응한다. 특히 10대에겐 성인이 되어서도 L/G/B/T로 살아간다면 혼자 외롭게 살아가며 많이 힘들 것이라고 걱정한다. 상대방이 LGBT라면 무엇을 궁금해하기도 전에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반응하거나 이미 알고 있는 정보에 상대방을 끼워맞춘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과거가 어땠을지, 미래는 어떠할지 꽤나 자신만만하게 (말투는 조심스럽다고 해도) 예단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LGBT와 관계를 맺고 대화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LGBT를 특정 이미지로 재현하며 안전하게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포박하는 행동일 뿐이다.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존재에게 시간성이 있음을 이해함이다. 존재에게 시간성이 있다는 것은 다양한 선입견으로 개인을 집단화하지 않음이다. 트랜스젠더인 나는 누군가의 일생을 예단하지 않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글의 서두 부분은 앨리슨 케이퍼의 글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루인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runtoruin@gmail.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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