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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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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쓰레기’가 받았던 ‘곱징역’

형기 마치면 다시 가두는 ‘보호감호소 제도’
2002년 헌법재판소가 법적 판단 내놓은 상황에서 ‘처우 개선’이라는 방법으로 부딪쳐보기로 했는데…
등록 2013-11-30 14:13 수정 2020-05-03 04:27

‘재소자들의 대모’.
같이 일한 선배 변호사가 붙여준 한때의 별명이다. 지금은 관련 사건을 전혀 다루지 못해 입에 담기도 부끄럽지만, 한때는 전국 교도소에서 일주일에 5~6통씩 편지가 올 정도로 교도소 관련 사건을 많이 다뤘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교도소 안의 처우 문제를 변호사에게 하소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교도소에서 글 쓰는 것조차 교도소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어느 교도관이 교도소 문제로 변호사에게 편지 쓰는 걸 선뜻 허가하겠는가 말이다. 재소자가 편지 쓰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교도관과 입씨름하는 것은 기본이고, 허가 없이 편지를 작성했다고 징벌을 받는 일도 많았고, 교도소 쪽이 내용을 문제 삼으며 발송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실제로 교도소 쪽이 재소자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못 쓰게 하거나 발송해주지 않아 소송까지 한 일도 있다. 그래서 내 책상 앞까지 ‘무사히’ 배달된 재소자들의 편지를 보면, 그 지난한 힘겨룸을 알고 있기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간단하게라도 답장은 꼭 하려고 노력했다.

지난한 힘겨룸을 겪고 도착했을 편지

징역형을 마친 뒤 다시 청송보호감호소에 갇혀 있는 감호자들이 ‘보호감호제’ 폐지를 주장하며 한겨레신문사에 보낸 편지. 이들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검찰이 추진 중인 ‘수형자 유전자 채취’에 응하겠다고 썼다.한겨레 자료

징역형을 마친 뒤 다시 청송보호감호소에 갇혀 있는 감호자들이 ‘보호감호제’ 폐지를 주장하며 한겨레신문사에 보낸 편지. 이들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검찰이 추진 중인 ‘수형자 유전자 채취’에 응하겠다고 썼다.한겨레 자료

2002년 어느 날 어김없이 사무실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보호감호제 폐지를 주장하며 감호자들이 집단단식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은 보호감호에 대해 정말 많은 고민을 해왔는지 절제된 언어와 차분한 논리로 감호자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보호감호제도가 갖는 허구성을 이야기했다. 감호자들이 사회보호법 폐지를 주장하며 집단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는 기사도 떠올랐다.

전두환이 사회 정화를 부르짖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삼청교육대에 잡아뒀다가 석방될 즈음에 이들을 다시 가두기 위해 만든 보호감호제도는 형기를 마친 사람을 다시 감호소에 가둬 ‘곱징역’이라고도 불렸다. 삼청교육대가 지닌 태생적 한계부터 이중처벌, 비인간적 처우 등으로 인해 인권침해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됐는데, 헌법재판소는 ‘형벌’과 ‘보호감호’는 서로 다른 것이라며 이중처벌이 아니라고 판단해왔다. 하지만 감호자들은 ‘우유를 사이다병에 넣고 사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며 형식적인 제도가 아닌 현실을 봐달라고 호소했다.

현실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면 형벌과 보호감호는 실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이중처벌에 해당한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못 배우고 돈 없는 이들인데, 이미 헌법재판소가 법적 판단을 내놓았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이처럼 상식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법원이 이미 다른 결론을 가지고 있는 경우, 변호사로서 실존적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단단한 바위라도 계속 부딪쳐야 바위도 깨질 수 있는 대상이라는 인식이 생기고 정말 그 언젠가는 깨지겠지만, ‘그 언젠가’의 시간이 올 때까지 감당해야 할 좌절감이 에너지를 잠식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한때 한승헌 변호사의 별명이 ‘패소 전문 변호사’였다고 하던데, 좌절하지 않고 계속 부딪히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존경스럽기만 하다.

집단단식 농성을 알리는 첫 편지 이후 계속해서 편지가 도착하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에, 지금은 한양대 로스쿨에 재직 중인 박찬운 변호사가 헌법재판소 문을 두드려보자고 제안했다. 헌법재판소가 보호감호제 자체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실제 감호자들에게 적용된 처우 규칙이 너무 비인간적이고 교도소에서의 처우와 다를 바 없으니 처우 규칙 자체에 대해 판단을 받아보자는 제안이었다. 정면 돌파는 아니지만, 문제의 핵심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참여연대에서 활동하던 장유식 변호사도 결합했다.

70%가 흉악범과 거리가 먼 절도범

우선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변호사 3명이 2002년 세밑에 경북 청송보호감호소를 방문했다. 물론 보호감호소 쪽이 처음에는 감호자들이 변호사와 만나는 것을 허가하지 않으려고 했다. 현행법상 수사 중이거나 형사재판 중에 있는 사람만이 변호인 접견을 할 수 있으므로 일반 면회 절차를 밟으라는 것이다. 일반 면회의 경우 횟수와 시간 제한이 있고 칸막이가 있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으며, 무엇보다 보호감호에 대한 헌법소원을 의논하려는 것인데 교도관이 감시하듯 입회하는 일반 면회 방식으로는 감호자들을 만날 수 없었다. 몇 시간의 실랑이 끝에 겨우 변호인 접견실에서 감호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사무실로 편지를 보낸 사람을 만났다. 문체만큼이나 차분한 외모를 가진 그는, 조목조목 보호감호의 문제를 제기하며 집단 농성하는 감호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전달해주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싶었지만 시간적으로 하루에 접견할 수 있는 사람이 한정돼 우선 6명을 모아 헌법소원을 하기로 했다.

감호자들의 편지는 인권단체와 언론, 국회 등에도 전달됐고 이제야말로 전두환 쿠데타 정권이 만들어놓은 반인권적 제도를 폐지해야 할 때가 왔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인권운동사랑방,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에서 인권시민단체에 보호감호 폐지를 위한 연대기구를 제안해 2003년 3월11일 연대기구(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유해정·김덕진·김정하·박성희·안동춘 활동가가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거나 국회·법무부 등을 찾아다니며 정말 헌신적으로 활동했고, 민가협 어머니들도 목요집회나 연대기구 기자회견 때마다 오셔서 보호감호 폐지를 주장해주셨다.

연대기구 활동 초기 보호감호 폐지 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고민하면서, 구금시설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역학관계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다. 보호감호소의 처우가 개선된다면 괜찮지 않은가, 흉악범죄자들을 사회에서 격리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많은 경우 해답의 실마리는 보호감호소에 있는 감호자들의 편지에 있었다. 사무실에 편지를 보낸 감호자는 자신들을 ‘사회의 쓰레기’라고 표현하며 보호감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직 이 세상엔 전과자·감호자라면 나와는 너무나 멀기만 한 이질적인 집단, 사회로 나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높은 담장, 철탑 우리 내에 가두고 그 안에서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인식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편견과 가림이 한 인간을 낙인찍고 결국엔 제도적 부당성을 합리화하여 영원히 기회 균등 없이 탈락자가 되게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사회적 쓰레기일 뿐입니다.” 연대기구가 감호자들의 도움을 받아 감호자들의 명단을 전부 취합해 설문조사를 했다. 그들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가장 많았고, 대부분 빈곤계층이었으며, 70% 이상이 흉악범죄와는 거리가 먼 절도범으로 사회적응력이 떨어진 이른바 ‘성가신’ 존재가 대부분이었다.

2005년 폐지… 100여 명은 보호감호 중

이 ‘성가신’ 존재는 권력과 자본의 입맛에 따라 누구나 그 당사자가 될 수 있기에, 장애운동단체도, 동성애인권단체도, 노동운동단체도, 이주운동단체도 사회보호법 폐지를 주장하며 함께 투쟁했던 것이다. 감호자 616명의 집단 헌법소원, 보호감호소 안팎에서 계속 이어진 단식 농성, 지속적인 인권시민단체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2005년 8월4일 드디어 사회보호법이 폐지됐다(안타깝게도 당시 경과 규정을 두어 아직도 100여 명이 보호감호 중에 있다).

보호감호 폐지를 위한 헌법소원과 연대기구 활동은, 패소를 두려워 말고 인권과 상식,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을 믿으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다. 다시 한번 이 지면을 빌려 그때 함께한 감호자분들과 활동가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바위에 달걀을 부딪치는 심정으로 이루어낸 변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모두 가슴이 막막한 요즈음, 세상은 이렇게 더디지만 조금이나마 진보한다는 믿음을 다시 한번 새기며 힘을 내본다.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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