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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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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인 돈 받아가세요

미국이나 유럽이었다면, 집단소송제가 도입돼 있다면 받게 될 반가운 통지서
등록 2013-11-13 15:09 수정 2020-05-03 04:27
당신이 혹시 2000년 1월~2007년 8월에 대한항공 미주노선을 이용했다면? 미국에서 적발된 대한항공·아시아나의 담합 보상금 청구를 돕는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부당요금 환불신청 범동포위원회’ 사이트(koreanairpassengercases.com/korean/).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당신이 혹시 2000년 1월~2007년 8월에 대한항공 미주노선을 이용했다면? 미국에서 적발된 대한항공·아시아나의 담합 보상금 청구를 돕는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부당요금 환불신청 범동포위원회’ 사이트(koreanairpassengercases.com/korean/).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다음 중 몇 가지 항목에 해당하시나요? 2001~2010년에 라면을 구매한 소비자. 그 시기에 분식점을 운영한 사람. 2000~2005년에 밀가루가 포함된 제품을 구입한 사람. 1991~2005년에 설탕을 구매한 사람. 2008~2012년에 휴대전화를 구매한 소비자. 2003~2006년에 항공화물을 이용한 화주. 2005~2012년에 인천~울란바토르 노선 대한항공을 이용한 사람. 2001~2005년에 액정디스플레이(LCD) 제품(휴대전화·컴퓨터·내비게이션·LCD TV 등)을 구매한 사람. 1999~2007년에 TV나 컴퓨터 모니터를 구매한 사람. 2003~2008년에 액화석유가스(LPG)를 구매한 사람(LPG 연료를 사용하는 차량 소유자, LPG 프로판가스 사용자, 부탄가스 사용자). 약을 복용한 사람. 1994~2010년에 비료를 구매한 사람. 2003~2011년에 농기계를 구매한 사람. 1997~2012년에 노스페이스 제품을 구매한 사람. 2006~2009년에 건축된 판유리(아파트나 주택의 유리)가 있는 건물 소유자. 1994~2004년에 건축된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주나 아파트 거주자. 2001~2006년의 생명보험 가입자. 그 밖에 두유·우유·세제·컵커피·빙과 구매자 등.

담합해서 21% 가격 올리고 20% 이익 얻고

영 가전제품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 기간에 가전제품과 휴대전화 서너 개를 구입하지 않은 집이 없을 것이고, 식료품은 필수품이고, 노스페이스의 옷은 대열풍을 일으켰고, 유리나 엘리베이터는 그야말로 흔한 것이기에 아마도 전 국민이 대여섯 가지씩은 해당할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담합의 피해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손해배상을 받을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미국이나 유럽에서였다면, 아니면 집단소송제가 도입돼 있었다면,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원에서 ‘담합 기업이 배상금을 내놓았으니, 떼인 돈을 받아가세요’라는 통지서가 여러 통 날아왔을 것입니다. 피싱 전자우편이 아닐까 놀라겠지만, 진짜입니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서는 ‘2000년 1월~2007년 8월에 대한항공 미주노선을 이용한 사람은 배상을 받을 수 있으므로 신청서를 제출하라’며 보상청구서 접수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를 돕기 위해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부당요금 환불신청 범동포위원회’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미국에서 집단소송의 결과 손해배상금으로 각각 727억원과 230억원을 배상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는 후속 절차입니다.

심층분석이 필요하므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기업에서 돌려받아야 할 금액은 어느 정도일까요. 이 분야의 저명한 학자인 코너의 실증연구에 따르면 담합을 통해 기업은 경쟁 가격보다 21~43% 정도 가격을 인상시킨다고 합니다(Connor, 2005). 유럽집행위원회에서 진행한 연구(Oxera Report, 2010)에서는 평균 20% 정도의 초과이윤을 얻는다고 보았습니다. 100만원짜리 TV라면 담합을 통해 20만~40만원을 더 올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2005년 밀가루 회사들이 담합으로 13.5%의 가격 인상을 한 것으로 분석된 사례가 있습니다. 담합 피해를 10~20%로 추산하고 계산해보면, 해당 기간에 구입한 물품의 가격이 500만원이었다면 50만~100만원 정도, 5년간 분식점을 운영하면서 라면을 구매한 금액이 1억원인 사업자는 1천만~2천만원 정도는 배상을 받아야 합니다. 2000년 이후로만 따져도 담합 기업의 부당이득액은 십수조원에서 수십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실제로 집단소송의 결과, 미국에서 LCD 담합 건만으로 삼성전자는 2760억원을, LG디스플레이는 4354억원을 피해자에게 배상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물론 국내에서는 단 한 푼도 배상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비용 많이 들고 다수 피해자 규합해야

이처럼 가구당 손해액을 따지면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에 이르러 결코 적지 않은데도 소송이 많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소송의 문턱이 높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와 제 사무실의 동료 변호사들은 담합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에 관심을 가지고 오래전부터 여러 부문의 피해자를 대리해 소송을 해왔는데, 변호사 입장에서도 담합 손해배상 소송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손해를 입증하려면 전문가의 감정을 거쳐야 하는데, 많은 감정비용이 들기 때문에 소수의 피해자만 소송하게 되면 배상금액보다 소송비용이 더 들 수 있으므로 엄두를 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기업에는 위협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다수의 피해자를 규합해 소송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광고 규제가 있어서 피해자들에게 소송에 참여하라고 권유하기도 어렵습니다. 구매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수만 명의 원고로부터 소송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일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공정거래위원회의 담합 과징금이 솜방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담합이 발각돼도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손해배상액은 그들이 거둔 막대한 이익에 비하면 그야말로 9마리 소의 한 가닥 털과 같으니, 기업들은 들키는 한이 있어도 숨어서 담합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모든 피해자에게 소송의 결과에 따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집단소송제가 도입된다면 양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소송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담합 피해 사건은 줄어들 것입니다. 소송도 구매 사실의 입증보다는 손해액 입증에 집중하게 되므로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이고, 기업들도 무리하게 3심까지 가기보다는 1심에서 합의하는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되면 9마리 소 중 몇 마리는 돌려받게 되는 셈입니다. 물론 담합이 적발되지 않은 기간의 이익은 기업이 고스란히 갖게 되므로, 여전히 담합의 유인이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이것까지 고려해서 손해액의 3배까지 배상이 가능하도록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지난 대선에서 여야 후보 모두 집단소송제의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조만간 입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기업 쪽에서는 여전히 남소의 우려가 있느니, 기업활동이 위축될 수 있느니 하며 반대 여론 조성에 힘쓰고 있는데, 건전한 기업 육성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제도입니다.

외국에선 손해액 3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

해가 지나야 입법이 되겠고 언제부터 시행될지 모르겠지만, 집단소송제가 도입된다면 법원에서 반가운 통지가 오는 일도 많을 것입니다. 담합이 사라지고 소송이 사라지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이 제도는 피해자에게 손해를 회복시켜주고 담합을 줄이는 효과는 있을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귀찮더라도 담합 손해배상 소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건전한 경제구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어렵게 담합 손해배상 소송에 참여하고 계시는 택시기사님들과 농업 경영인들, 건강보험 가입자분들 같은 소중한 제 의뢰인들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은우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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