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착한 사람을 피해가며 나쁜 사람만 벌주지 않는다.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무차별적으로, 제 생명이 다하도록, 제 길을 간다. 자연(自然)이라는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 사람은 태풍을 가린다. 돈과 권력을 움켜쥐고 튼튼한 집에 사는 이들, 대도시에 사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태풍 피해를 최소화한다. 볕도 바람도 들지 않는 반지하방에 사는 이들, 산자락과 들판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 바다에 기대어 사는 이들은 자연의 처분에 운명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아파트 9층에 사는 나는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고도 태풍 볼라벤과 덴빈을 피해 없이 넘겼다. 전남 나주에서 배 농사를 짓는 막내누이는 동분서주하며 온갖 대책을 세웠지만, 배 10개에 9개꼴로 땅바닥에 나뒹구는 참상을 막지 못했다. 가족 생계의 터전인 한 해 농사를 망쳤는데도 “다친 사람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누이에게 나는 건넬 말을 찾지 못했다. 예로부터 농부들은 ‘하늘과 땅이 주는 대로 거둔다’는 말을, 어부들은 ‘바다가 주는 만큼만 먹고 산다’는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그 도저한 체념과 달관의 경지를, 각박한 대도시에 사는 나는 가늠하지 못한다.
태풍 볼라벤이 두려운 자연의 힘으로 한반도의 뭇 생명을 숨죽이게 하던 8월28일, 한국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으로 불리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전태일’을 만나겠다며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박 후보는 전태일을 만나지 못했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전태일재단 앞에선 유족한테, 청계천 전태일다리 앞에선 쌍용차·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한테 가로막혔다.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4주째 농성하며 면담을 요청해온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모르쇠하며 ‘전태일’을 만나겠다는 박 후보의 행보를 두고 참 많은 말이 오갔다.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씨는 “대한문 쌍용차 분양소부터 방문하고 쌍용차 문제를 해결하고 오시는 게 순서”라며 “마음이 통하는 길로 오시라”고 했다.
소동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박 후보의 전태일재단 방문 무산 직후 새누리당 이상일 대변인은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을 반드시 물리칠 것”이라고 공식 논평했다. 박 후보의 한 측근은 “기업에 대한 압박으로 비칠 수 있다”며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나 노동자 파업 현장 방문에 난색을 표했다. 박 후보의 멘토임을 자처하는 홍사덕 새누리당 전 의원은 기자들을 앉혀놓고 “유신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달러를 못 넘었을 것” 따위의 막말을 일삼았다. 지난 3년간 22명의 동료와 그 가족의 장례를 치른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물리쳐야 할 ‘갈등 조장 세력’으로 여기고, 대자본의 탐욕을 제어하려 하지 않고, 종신집권 쿠데타인 유신독재 시절 ‘수출역군’이라는 미명 아래 스러져간 수많은 ‘전태일·김경숙들’을 외면하고도, 전태일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없다. 박 후보와 그의 친구들은 1970년 11월13일 전태일이 제 몸을 불살라 말하려던 게 뭔지 42년이 지난 지금도 모른다. 아니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어 보인다. 박 후보가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 화해 협력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국민대통합’ 행보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해도, ‘마음이 통하는 길’이 열리리라 기대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태풍 볼라벤이 여실히 보여준바, 자연엔 마음이 없다. 자연의 일을 사람이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에겐 마음이 있다. 사람의 일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다. 이 땅의 정치는 죽음의 행렬을 멈춰 세우는 ‘스물세 번째 인간’이 되어야 한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자리, 정치가 열어가야 할 공생의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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