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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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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트윗- 태풍과 범죄, 공포사회 한국

등록 2012-09-04 17:31 수정 2020-05-03 04:26

불안은 사회의 영혼을 잠식한다
극도의 불안, 흥분된 발화, 무력한 침묵… 태풍과 범죄의 공식

태풍 피해가 크다. 특히 제주도와 전라남도 지역 농민, 노인 등 취약계층 사이에서 인명과 재산 손실이 많았기에, 이에 대한 정부의 특별한 후속 대책은 물론 각별한 여론의 관심이 당연히 요구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태풍 직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호들갑스럽던 목소리들이 다음날 눈앞에서 싹 사라져버린 것이다. 전대미문의 대재난이 들이닥칠 것처럼, ‘엄청난’ 피해가 생긴 듯 떠들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기이한 침묵이다. 민망하고 어색한 느낌의 적요가 그다지 파괴적이거나 공포스럽지 않던 볼라벤을 뒤따른다.

‘고요’라는 표현은 이제 태풍 전야가 아닌 다음날 주요 미디어의 침묵 사태 묘사에 더 어울리는 듯하다. 태풍 다음날 아침 1면에는 놀랍게도 태풍 관련 기사가 단 하나도 없다. 일상처럼 평범하고 고요한 새벽을 연다. 그 대척점의 는 좀 낫다. 태풍 관련 기사가 1면에 살짝 끼어 있다. 그렇지만 같은 날 사설은 아무 일이 없었던 양 태연히 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터넷 지면에서도 오후 내내 태풍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나 여타 신문의 경우에도 진상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태풍 볼라벤이 몰아친 지난 8월28일 전남 목포의 해안도로 모습. 마침 이어진 ‘묻지마’ 살인과 자연재해를 다루는 미디어의 태도에서 ‘공포 코드’가 읽혔다. 사진 한겨레 박종식

태풍 볼라벤이 몰아친 지난 8월28일 전남 목포의 해안도로 모습. 마침 이어진 ‘묻지마’ 살인과 자연재해를 다루는 미디어의 태도에서 ‘공포 코드’가 읽혔다. 사진 한겨레 박종식

KBS의 흥분된 재난 보도가 돋보였다. 불안을 야기하기에, 태풍보다 가히 더 위력적이었다. 다음날에도 흉흉한 음악을 깔고 ‘엄청난’ 탄식을 뱉으며 공포의 흔적을 뒤진다. 그런데 진짜 이 찜찜함의 잔해는 뭔가? 태풍이 막대한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 어찌됐든 다행한 일이라 하면 되나? 관민이 대비를 잘해 피해가 이 정도였다고 자평하고 넘어갈 일인가? 태풍에 대한 극심한 공포와 그 직전의 이른바 ‘묻지마’ 범죄에 대한 불안이 묘하게 겹친다는 심증. 태풍 직전의 흥분과 직후의 침묵은, 사실상 태풍의 위력과 무관한, 불안한 사회 분위기의 파생물이자 반영처럼 보인다.

구조화된 사회적 위험에 대한, 결코 침착했다 할 수 없는 공황의 반응이 태풍이라는 자연현상에 그대로 투사된 듯하다. 극도의 불안과 흥분된 발화, 그리고 이후의 무력한 침묵이라는 동일 코드가 확인된다. 일시적 집단 흥분과 또 다른 충격적 사건 재발 때까지의 침묵이라는 패턴의 반복. 불안의 히스테리, 안전의 강박관념. 지금 ‘대한민국’은 명백하게 흥분한 국가와 흥분된 매체가 공모한 흥분사회다. 태풍을 ‘괴물’로 극화하고 사회적 모순을 개인적 악한으로 사건화하는 공포·테러의 리포팅, 불안·치안의 통치에 대중도 흥분으로 쉽게 감응한다.

흥분이 불안을 부추기고, 불안은 공포를 낳는다. 올림픽의 흥분이 일본 정부를 향한 흥분으로 이어진다. 흥분은 다시 일단의 흉악범들에게 쏠리고, 이제 잠깐 동안 태풍이다. 다음엔 또 무엇이 악으로 지목되고 ‘우리’의 공적으로 그려질 것인가? 다가올 태풍, 다음에 또 일어날 살인, 그리고 대통령이 저지를 또 다른 재난에 대한 대처법은 이런 흥분과 무관심의 불안정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대체 누가 이 불가능성을 조장하나? 훨씬 더 극악한 폭력과 무서운 공포, 엄청난 테러로부터 사회 안보를 지켜내기 위한 지적·반성적 안정제가 절실하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선일보 9월 1일자 53판 1면.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범의 얼굴이라며 사진을 공개했으나 다른 사람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일보 9월 1일자 53판 1면.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범의 얼굴이라며 사진을 공개했으나 다른 사람인 것으로 밝혀졌다.

공포를 팝니다 도매가로 드립니다
눈앞의 누군가를 악마로 만드는 미디어… 여기에 기생하는 대중의 가십 취미

미디어가 공포를 적극 전파하고 나아가 조장하며 궁극적으로 사익을 도모한다는 이야기는 하루 이틀 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란 이율배반적이다.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도 당장 눈앞의 교통사고 현장 앞으로는 모여든다. 어제 그 연쇄살인에 관련된 기사에는 관심을 보인다. 웹툰이, 애니메이션이 폭력을 조장한다는 분석에는 귀를 기울인다.

언론이야말로 그들의 갈증을 달래주는 첨병이다. 간혹 애초 목마름을 조장해두는 장사꾼이다. 그들은 이 알 수 없는 살인의 이유가 ‘웹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때문이다! 사이코패스로 밝혀졌다!’식의 분석을 내놓으며 공포를 판다. 여러분 공포를 사세요! 공포를 사세요! 그럼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공포를 산다. 원래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하거나 알지 못하는 대상에 명료한 이름을 붙여 그것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떠벌리기 좋아하는 종자다. 언론이 해법을 제시한다. 애니메이션 때문이다. 웹툰 때문이다. 왕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미지의 공포가 아닌, 가십으로 전락한다. 이제는 쉽고 재미있는 점심시간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 도매’ 마케팅은 당장 눈앞의 편한 대상을 원흉으로 몰아 문제를 단순화하고, 실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고민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악랄한 성격을 갖는다. 저 미국의 콜로라도주 콜럼바인고교 총격사건 가해자의 행동이 메릴린 맨슨 음악과 1인칭 슈팅게임 때문이라고 암시해버렸던 뉴스의 옹색함을 떠올려보자. 그런데 말이다. 과연 우리는 애초 그 고민을 하고 싶었던 걸까. 기회가 있다면 폭력의 맥락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을 했을까. 언론의 관련 보도 자체를 불의라 규정하는 건 짜증의 결과는 될 수 있어도 정확한 지적은 될 수 없다. 공포를 도매가로 판매하는 언론의 무책임은, 쉽고 편한 오락거리를 도매가로 요구하는 우리의 여가와 공생하고 있다. 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끊어야 할까.

최근 ‘묻지마’ 살인을 비롯한 폭력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를 보자. 서울 여의도에서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 일어난 날 공중파 뉴스를 보며 나는 흡사 좀비가 등장하는 묵시록 영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세상이 멸망한 것 같았다. 집 밖으로 나가면 바로 공격당할 것 같았다. 그래서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지난 8월26일치 기사를 보자. ‘무차별 칼부림 공포의 사이코들’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상태로 피해자 가족의 원통한 심정을 여과 없이 옮기며 ‘악귀’라는 단어를 ‘지면’이라는 매대에 올려놓고 신나게 팔아댔다. 같은 소재의 기사임에도 타 언론사보다 월등히 높은 댓글 수를 기록했다. 를 예로 들었지만 진영이나 매체를 가리는 태도가 아니다. 대개 유사하다.

이미 벌어진 일을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선정적 사건일수록 선정적이지 않게 다루고, 무분별한 판단이 이뤄지지 않도록 정교하게 편집·배열해야 할 책임이 언론에는 있다. 이들은 더 이상 언론인이 아닌 보부상처럼 보인다. 나는 언론인들이 오히려 스스로 언론 엘리트라는 자존심 위에서 글을 쓰고 편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시정잡배 같은 자세로 당장의 광고 한 면과 클릭 수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지금과 같은 불신과 오명을 씻을 길이 없다. 고리도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허지웅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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