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예능의 끝판왕식상해진 ‘리얼’ 포맷의 끝물에 등장한 ‘최후의 쇼’
억압·부조리 웃으며 소비할 만큼 우리 감성은 황폐한가
최초의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했던 의 ‘도전’은, 그러니까 예능의 익숙한 관습, 즉 클리셰(Cliche·판에 박은 문구나 표 현)를 넘어서가나 혹은 희화하겠단 것이었다. 각본의 파기는 그 대표적 약속이었다. 미리 정 해진 짜임이 있고, 그 연출된 의도에 따라 웃 음의 경로를 안내하던 과거와의 작별이었다.
그리고 7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TV 예능은 차라리 ‘리얼 버라이어티’가 아닌 것 을 찾는 게 더 쉬울 정도로 모든 것이 ‘리얼’ 을 표방하고 있다. 그사이 한층 다원화된 매 체 환경의 격랑 속에서 리얼은 이제 ‘가혹’의 동의어가 되고 있다. 연예인의 사생활을 폐 쇄회로텔레비전(CCTV)에 담고, 스타가 되 고자 하는 이들의 숙소 생활을 가감 없이 중 계하고, 지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지인 곳 에서 악전고투하며 생존하는 이들을 보며 낄낄거리는 수준이다.
이처럼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모든 마이크 로트렌드(Microtrends)를 흡수하며 TV 장 르 최후의 메가트렌드(Megatrends)가 된 상황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리얼’을 표방하는 쇼들이 맞고 있는 최대의 위협이 된 지 오래다. 이제 시청자는 무엇을 보여줘도 그 생생 함에 놀라지 않고, 어떤 다이내믹함을 연출 하더라도 진부하게 받아들일 만큼 그 세계 에 적응해버렸다. ‘마이크로트렌드’와 ‘메가 트렌드’ 사이를 여전히도 가장 영민하고 탁 월하게 횡단해 다니고 있는 을 제외한 쇼들이 ‘고전’하고 있는 건 근본적으 로 그 때문이다.
는 그래서 최후의 신호일지 모른다. 군대를 무대로 한 이 쇼는 ‘리얼 버 라이어티’의 어쩔 수 없는 ‘끝판왕’이다. 군대 보다 더한 ‘리얼’을 말할 수 있는 곳은 아마도 ‘감옥’뿐일 텐데, 예능이 ‘감옥’을 소재로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최후의 쇼 는 최후의 그것이 갖춰야 할 거의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애초부터 ‘리얼 버라이어티’ 는 남자들의 정글짐이었다. 대놓고 아류작 이라고 할 를 제외하면 리얼 버라 이어티는 딱 한 명의 여성(이효리)만을 제외 하곤 온통 ‘수컷’들의 세계였다( 등등). 신체적 부대 낌을 통해 웃음을 만들어내고, 극한의 상황 에 놓인 출연자의 곤궁한 선택에서 공감을 끌어내야 하는 쇼의 특성상 불가피했고 또 의도적이었다.
는 말하자면 이 ‘수컷’들의 세계와 그들의 정글짐을 가장 가혹하게 설 계하기 위해 ‘군대’를 끌어들인 포맷이다. 그 래서 이 쇼는 ‘군대’란 공간의 부조리나 폭력 성에는 당연히 전혀 관심이 없다. 이 프로그 램에서 군대란 그저 더 엄격하게 출연자들 을 통제할 수 있고, 그 통제에 정당성을 부여 하는 구조일 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에 식 상해졌단 이유로 이 가열찬 억압에 우리가 더 낄낄거린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우리 안 의 ‘군사주의’는 그만큼 두꺼워졌고, 우리의 감수성 역시 그 황폐한 바닥을 드러내고 있 는 건 아닐까? 벌써 10년 전에 ‘대한민국 학 교 ×까라 그래’라고 외쳤던 것 같은데, 다시 ‘까라면 까라’는 세계로 그렇게 회귀해버렸다.
병영국가의 민낯리얼리티 장점 극대화해 군필자 남성층 향수 자극
폭력·위계에 대한 굴종을 ‘남자답다’ 찬양할 일인가
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 다. 간단히 말해 연예인들의 병영 체험이다. 시청률이 14%를 넘으니 ‘대세 예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6월30일 기준). 구성원을 보 면 이미 병역을 마친 이들이 다수지만 아직 입대 전인 젊은 연예인도 있고 샘 해밍턴처럼 한국 군대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외국인도 있다. 공식 홈페이지를 보면 방영 취지가 나 온다. “이 프로그램은, 여타 군 소재 프로그 램이 보여줬던 단순한 체험에서 벗어나 대한 민국 대표 연예인들이 실제 군대에 입대하여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리얼하게 보 여주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연예인이라는 신분을 잠시 벗어두고 군 생활을 통해 생겨 나는 남자들의 진한 땀방울과 전우애, 유쾌 한 내무생활 등 드라마보다 더 리얼한 ‘진짜 사나이들의 이야기’를 담아갈 예정입니다.”
연예인이 왜 직업이 아니라 신분(status) 인지부터 의문이고, 이 표현에서 이미 무언 가 ‘낮은 곳으로 임하는’ 선민의식 같은 게 느 껴지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핵심은 ‘리 얼’에 있다. “지상파 버전 육군 홍보영상”이라 불릴 만큼 군의 전폭적 협조와 지원을 받는 다는 게 실감이 난다. 프로그램에 노출되는 정보량 자체가 전례 없는 규모다. 예를 들어 K9 자주포에 연예인들이 들어가 직접 조종 을 하는데, 내부 구조는 물론 조종석 계기판 이 화면에 그대로 나왔다. ‘저렇게 그냥 보여 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물론 군의 철저한 자문이 있었으니 방영이 가능했겠지만, 확실히 기존 연예인 병영 체 험과는 질적으로 다르게 보였다. 리얼리티를 높이다보니 훈련 과정도 매우 구체적으로 공 개되는 편이다. 실제로 한국 병사들이 어떤 훈련과 교육을 받는지, 분위기나 긴장감 따 위가 (비록 연출일지라도) 그대로 전해진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 시청자 상당수가 “에이, 저게 무슨 군대냐”고 비아냥대기보다 “맞아, 저랬었지” “그래도 요즘 많이 좋아졌네”라며 향수에 젖을 만큼 ‘리얼’하다.
훈련 과정이 실감나면 날수록, 한 명의 인 간이 군대에서 폭력과 위계에 얼마나 철저하 게 굴복하고 끝내 그것을 내면화하게 되는 지 목격하게 된다. 규칙·기술·신호 따위를 제대로 숙지시키기도 전에 실행하게 한 다 음, 못하면(당연히 못한다) 일단 ‘굴린다’. 일 방적 지시에 정신없이 구르는 과정, ‘될 때까 지’ 육체적 고통을 반복 체험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몰합리적이다. 몰합리적 훈련의 일차 적 목적은 ‘설득’이나 ‘교육’이 아니다. ‘길들이 기’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위계에 복종하는 살아 있는 전쟁 도구를 만들어내 기 위해 나름대로 최적화된 ‘합리적’ 메커니 즘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의 운영 원 리가 사회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이 다. 프로그램 취지 소개의 첫 부분은 이 진 실을 자랑스럽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누설 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군대에서 배 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회의 축소판인 군대.” 정말로 무서운 점은 이것이다. 폭력과 위계, 그리고 이에 대한 굴종이 ‘진짜 사나 이’니 ‘남자다움’ 따위로 미화되고, 그 이데올 로기가 군대를 넘어 사회 전체 조직에 퍼져 있다는 것. 오랫동안 ‘병영국가’였던 한국에 서 를 마냥 웃고 즐길 수만 없 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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