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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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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는 무엇을 말하는가

등록 2013-08-13 14:48 수정 2020-05-03 04:27
체제 바깥을 향한 쓰레기들의 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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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 교체냐, 체제 해체냐’ 딜레마에 부딪친 인민 봉기
역사의 동력이 바깥을 향한 무모한 열정임을 역설하다
김민하 정치평론가

는 지적인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각종 사회학적 ‘떡밥’들이 많이 등장한다.

최후의 인류를 싣고 한없이 달리는 설국열차는 공리주의적 세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설국열차의 탑승객들은 대체로 기본 이상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꼬리 칸 사람들만은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꼬리 칸 사람들의 존재가 체제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노동계급이 반드시 필요하다. 노동계급이 재화를 생산하며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착취를 통해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꼬리 칸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체제의 ‘항상성’을 유지하면서 이들의 존재를 어떻게 감당할지를 고민하고 일정한 조처를 취하는 게 열차의 주인인 윌포드의 역할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윌 포드와 길리엄의 공조는 나름의 공리주의적 해결책인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라는 공리주의적 원칙이 관철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체제를 향한 꼬리 칸 사람들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는다. 커티스는 이러한 불만을 열차의 시스템을 점거하는 것으로 해소하려 한다.

물론 길리엄을 지도자로 만들겠다는 것 외에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는 없다. 따라서 커티스의 반란은 대중의 인민주의적 봉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민수와 그의 딸 요나는 열차 구조 일부에 대한 지식과 직관을 가지고 있다. 를 봉기에 대한 드라마로 읽는다면 그들은 지식인이며 예언가이며 선지자인 셈이다. 그들은 반란에 조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름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준비를 해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는 윌포드의 문 앞에서 드러나는데 그것은 봉기의 결과가 체제의 지배세력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체제 그 자체의 거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는 민수의 제안 을 뿌리치고 커티스는 체제에 포섭되는 길을 선택하려고 한다. 하지만 요나의 직관으로 꼬리 칸의 아이들이 체제 유지를 위해 착취당하고 있음이 폭로되면서 커티스는 민수와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한다. 이 결과로 그는 한쪽 팔을 잃는데 이것은 속죄인 동시에 체제의 진실을 안 것에 대한 대가이다. 이 덕분에 커티스는 ‘벽’으로 여겨지던 열차 밖으로 나가는 문, 즉 환상을 넘기 위한 소멸을 감수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환상 너머에 반드시 긍정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북극곰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협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열차 밖으로 나가기 위한 수많은 몸짓이 역사를 이끌어온 것 또한 진실이다. 체제는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하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많은 논쟁거리를 불렀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출연할 만큼 세계적으로 입지를 다진 감독의 작품이라는 ‘애국 코드’ 못잖게, 이 영화의 ‘논쟁성’이 흥행을 이끌어가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설국열차>에는 이 영화에 대해 자꾸 얘기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많은 논쟁거리를 불렀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출연할 만큼 세계적으로 입지를 다진 감독의 작품이라는 ‘애국 코드’ 못잖게, 이 영화의 ‘논쟁성’이 흥행을 이끌어가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설국열차>에는 이 영화에 대해 자꾸 얘기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무임승차자도 살 권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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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평등·박애의 보편성 이야기하는 인간주의 서사
영화를 둘러싼 논쟁적 담론들이 내 사유를 깊게 만든다
최서윤 월간 〈잉여〉 편집장

이번에는 봉준호 감독님이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뒤집어놓으셨다. 무엇보다 타임라인과 뉴스피드를 뜨겁게 달군 것은 그가 연출한 영화 관련 떡밥이다. 양갱·코카콜라 등 ‘먹거리 드립’, 커티스·에드가·그레이 역을 맡은 배우들이 멋지다는 찬사, 결말에 대한 해석, 신자유주의 논란 등 떡밥이 많기도 하다. 떡밥 문 사람들끼리 엄청 수다 떠는 데 끼어들지 못해 좀 쓸쓸했지만, 이제 나도 봤으니 끼어들 수 있다. 신난다!

가장 끼어들고 싶었던 건 ‘꼬리 칸 무임승차 논쟁’이다. 생존을 담보하는 ‘설국열차’에 탈 수 있는 인원과 기차 내 자원이 제한돼 있는 상황에서 불법으로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꼬리 칸 사람들이다. 이들 때문에 ‘합법적으로’ 탑승한 사람도 피해를 볼 수 있기에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필요하므로 기차의 창조자이자 독재자인 윌포드의 독재는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오히려 폭동을 일으킨 꼬리 칸 사람들이 뻔뻔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반문의 여지도 있다. 기존 시스템이 붕괴되는 인류 절멸의 상황에서 돈과 권력으로 생존을 거래하며 ‘합법’을 논하는 것이 타당한가. 또한 창조자의 독재가 한정적인 자원을 배분하고 열차의 시스템을 유지시키기 위한 최선의 체제인가. 좀더 민주적인 형태의 협의체를 만들고 좀더 인도적인 방식으로 ‘폐쇄된 생태계’의 균형을 맞췄다면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나는 17년이라는 세월에 주목한다. 꼬리 칸 사람들은 17년 동안 가축처럼 사육당했고, 개인의 자유가 배제된 채 윌포드의 선택에 의해 해야 할 일을 배정받으며, 가족이 찢기고, 제대로 된 사법 시스템 없이 신체훼손형을 받았다. 핍박받는 것이 무임승차의 대가라면 그 대가는 언제쯤 다 치를 수 있나. 꼬리 칸 사람들은 무임승차 의 ‘죄’를 대대손손 떠안고 기꺼이 착취당하며 살아야 하는 건가?

근대 이전, 국가가 새로 세워질 때마다 개국 공헌도에 따라 계급이 나뉘고 그 계급은 고착돼 대대손손 내려왔다. 아니, 꼭 근대 이전으로 국한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 우리나라는 오늘날 일제에 충성한 사람들, 독재정권에 공헌한 사람들이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며 부를 대물림하고 있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현대 국가는 연좌제를 금지하고 기회의 평등을 주고자 한다. 자유·평등·박애.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반영된 덕이다. 이 정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역사적 서사가 앞으로도 이어져나가길. 아니, 좀더 진보하길 희망한다. 재난이 닥친다 해도, 비록 적은 자원과 적은 개체 수의 인간이 남는다고 해도. 하지만 무임승차했으니 ‘그 정도는’ 당해도 싸다고 느끼는 이가 다수라면 아마 안 될 거야. ‘꼬리 칸 무임승차 논쟁’이 씁쓸하게 다가왔던 이유다.

는 이 밖에도 많은 논쟁거리를 불러왔고, 이 열기는 쉽게 식지 않을 것 같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출연할 만큼 세계적으로 입지를 다진 감독의 작품이라는 ‘애국 코드’ 도 기록적인 흥행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논쟁적인 영화라는 것을 흥행 요인 중 으뜸으로 꼽고 싶다. 이 영화는 이 영화에 대해 자꾸 얘기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사유가 깊어지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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