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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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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공화국’ 논란

등록 2013-08-20 17:36 수정 2020-05-03 04:27
자살은 윤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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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이들의 ‘생명 경시’
한윤형 〈미디어스〉 기자

대한민국은 ‘자살 공화국’이다. 20대 사망 원인 1위가 교통사고가 아닌 자살이 된 지도 오래됐고, 빈곤층이 많은 노년 세대로 갈수록 자살률은 증가한다. 통계로 볼 때, 한국 사회에서 55살 이상의 성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할 확률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하는 미군이 전사하거나 자살할 확률보다 높다. 75살 이상 노인이 되면 10만 명당 자살자가 160명 이상으로 증가하는지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표를 만들 때 한국의 수치를 표시하기 위해 표의 오른쪽 단위를 따로 써야 할 정도다.

별로 나이를 많이 먹지 않은 나도 지인의 자살을 경험한 적이 있다. ‘죽고 싶다’는 친구를 달래본 기억이 있고, 나도 친구에게 ‘죽고 싶다’고 말해본 기억이 있다. 평균수명대로 적어도 수십 년을 더 살게 되기를 희망하지만, 그렇더라도 앞으로도 이런 경험이 죽 이어질 거라 생각된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자살 충동은 어떤 사변적인 고민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구체적 삶의 문제의 실패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이탈할 때마다 더 이상 생존하기 어렵겠다는 공포를 주는 사회가 됐고, 그런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지극한 가난을 지극한 노동으로 극복해낸 기성세대에겐 도무지 이해가 안 갈 듯하다. 가난했지만 일이 널려 있었고 일손이 너무 부족했던, 성장하는 시대에 과중한 노동을 하며 자신과 가족과 사회를 지탱했던 그들은,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의 죽음을 어떤 게으름이나 소심함의 증표로 받아들일 법도 하다.

하지만 자살 문제를 대하는 가장 어리석은 태도가 그것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것일 게다. 하나의 개인은 하나의 세계이며 자살은 그것을 소멸시키는 행위다. 그리고 그 행위는 돌이킬 수 없다. 인간은 어차피 언젠가는 죽기에 자살을 어리석은 선택이라 평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죽어버린 사람에겐 이미 그러한 평가가 무의미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과 공동체가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다. 그리고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느냐다. 죽음의 문제는 죽은 이의 것이 아니라 결국 산 자의 것이 아니던가?

냉소적으로 질문하자면 이렇다. 과연 우리 공동체는 개인의 자살을 아쉬워는 하는 걸까? 물론 구성원 대다수가 죽어버린다면 큰 문제가 되겠지만, 일자리는 적고 부양해야 할 사람은 많은, ‘내려가는 사회’에서 잉여인간들 몇몇은 죽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 공동체가 작동하는 방식에 영혼을 부여한다면, 입을 열어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프다.

친구들은 ‘죽고 싶다’고 토로할 때 주로 ‘내가 죽은들 신경 쓸 사람이 누가 있겠어?’라고 했다. 자신을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들은 죽음을 고민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자살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들이야말로 ‘너는 죽어도 된다’며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 아닐까?


지난해 9월 설치한 생명의 다리의 문구가 바뀌었다. 6월 마지막 날인 30일 오후 서을 마포대교 남단에 국민 응모로 선정된 48명의 희망을 주는 메세지를 다시 설치 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지난해 9월 설치한 생명의 다리의 문구가 바뀌었다. 6월 마지막 날인 30일 오후 서을 마포대교 남단에 국민 응모로 선정된 48명의 희망을 주는 메세지를 다시 설치 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자살 방조의 기차를 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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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정체·이념·계급·성별 가리지 않는 사회적 대형 참사
비정한 자본과 무정한 국가의 방치 속에 반복되는 문화로 고착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열차 꼬리칸의 존재들은 질주하는 체제에 브레이크를 걸거나 엔진칸의 지배자에 맞서 혁명을 성취해낼 수 있을까? 아니면 힘에 밀리고 속도에 내몰린 끝칸의 신체들은 기차에서 미끄러지거나 떨어져 사라지고 마는가? 가상의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이 아닌, 실재의 현실을 목격해야 하는 우리에겐 영웅담보다 잔혹극이 더 어울리는 시나리오다. 많은 생명을 짐짝처럼 내던지면서 냉혹한 ‘설국열차’는 어둠 속으로 내뺀다. 레일 주변의 뒹구는 주검들은 모두 ‘자살’로 처리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기이한 느낌의 초현실적인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남자가 아래로 뚝 떨어진다. 서울 마포대교 난간에서 쓱 손을 놓아버렸다. 근처 다른 한강다리에서 또 다른 남성이 풀쩍 뛰어내린다. 어리석은 과잉 퍼포먼스? 비리를 의심받는 자의 해프닝?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 혹 최근의 몇몇 사례가 자살의 진상을 가리거나 냉소의 의식을 키우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이 글을 쓴다.

아니다. 바로 ‘내’가 투신하려는 것이다. 자살은 너의 모습이며, 우리의 선택이다. 정체와 이념, 계급, 성별을 가리지 않는 사회적 대형 참사다. 학생과 주부, 장애인, 노동자, 노인, 이방인 모두가 매일같이 죽음에 시달린다. 무색무취의 연탄가스를 마신 건 빚진 감독만이 아니다. 버려진 아이들이 떼로 가스를 흡입한다. ‘취객’이 되어 지하철에 풀쩍 뛰어드는 중년. 아파트에서 투신한 저 몸뚱이는 또 어떤 비운의 자취를 참혹하게 바닥에 남길 것인가?

우울의 공황이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다. 체제가 폄훼한 생명의 가치를 떠오른 주검들이 기괴하게 폭로한다. 선택을 위장한 강요, 폭력이 빚은 자폭. 자살은 가치 없어진 삶, 취약해진 인구, 보호망에서 빠진 존재들의 흉흉한 현신에 다름 아니다. 저 많은 주검들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우리와 한국 사회에 대해, 그 부조리와 모순에 관해 대체 무엇을 마지막으로 증언코자 하는 것인가?

불행하게도, 지배권력은 30분에 1명꼴로 자멸하는 현 체제의 위험신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알고도, 입으로만 떠들면서, 몸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비참의 현실을 현실감 있게 감지하고 책임감 있게 대비하지 않는 비정한 자본과 무정한 국가. 강화된 신자유주의 자본국가는 인구 일부의 삭제와 무능력한 신체의 훼손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적인 일, 개인적인 이야기로 처리하고 만다. 그래서 자살의 문제는 무관심 속에 방치돼 반복되는 문화로 고착된다.

상품의 가치를 따지고 시장 생존의 능력을 강조하는 설국열차 ‘대한민국’에서는 그 많은 생명의 탈락이 충격과 공포로 다가오지 않는다. 꼬리칸에 탄, 끝칸으로 밀린 가치 없다고 느끼는 인구와 잉여로 취급받는 세대, 힘없는 무능력자들 사이 자멸의 분위기가 더욱 팽배해질 수밖에 없다. 살인 기차가 뿌리는 ‘자살’이라는 허위 진단서. 저 야수의 질주를 어떻게 스톱시킬 것인가? 영화 에 흥분한 수백만의 시선이 극장 바깥 스쳐가는 주검의 행렬로 일시에 돌아갈 수 있다면? 자멸할 종족으로 가득 찬 칸을 불안하게 꼬리에 달고 미친 듯 질주하는 이 기차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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