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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트윗, ‘일베’와 표현의 자유

일베와 표현의 자유
등록 2013-06-11 17:10 수정 2020-05-03 04:27
짖을 권리는 허용하되 품고 가르치자혁명을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등장한 수동적 극우파
해결책은 악마화 아닌 더 많은 민주주의와 불평등 해소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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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가 순식간에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연일 비판과 분석이 쏟아져나왔다. 이라는 책에서 이미 쓴 바 있지만, 일베를 포함한 넷우익·신우익의 탄생은 기존 적대들, ‘진보와 보수의 게임’이 공히 위기에 봉착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몫’을 공동체 내부의 타자에게 빼앗겼다는 박탈감은 ‘피해자 되기’로 이어지고, ‘자격’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공동체 내의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공격성으로 발현된다. 실제 착취자는 자본과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넷우익·신우익은 자본과 국가에 좀체 저항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격’과 ‘능력’을 인준해주는 주체가 바로 자본과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상과 이념의 관철을 위해 국가에 대한 저항도 불사하는 전통적 극우파와 다른 지점 중 하나다. 넷우익·신우익은 불평등이 극단적으로 확산되고 경제적 파이 자체가 쪼그라드는 불황기지만 도저히 혁명을 상상할 수는 없는 시대에 등장한, 일종의 ‘수동적 극우파’라 할 수도 있을 게다.

이런 분석에 따른다면 일베 등의 현상은 단지 입을 틀어막고 처벌한다고 사라지는 수준의 일시적·예외적 일탈이 아니라 중·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된다. 그러나 민주당은 곧바로 ‘사이트 폐쇄’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른바 진보라 분류되는 지식인들조차 형사처벌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일베의 ‘막가는’ 발언들에 분노하는 건 자연스럽다. 광주 희생자를 두고 ‘홍어택배’ 운운하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자 나 역시 손이 떨렸다. 하지만 국가가 나서서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인 표현의 자유가 걸려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에는 이미 인종주의적 혐오·차별 발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시민사회의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정책제안’이 그것. 이 제안은 2012년에 인권활동가, 법률가, 학자들이 모여 유엔의 권고와 국제 인권 기준에 부합하는 제안을 정부와 사법부에 제출한 문서다(인터넷에 공개돼 있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혐오 발언을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의 사람들이 주로 드는 근거는 독일 등 유럽국가에서 제정된 혐오적 표현에 대한 처벌 조항이다. 하지만 유럽에는 홀로코스트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있었다. 미국은 유럽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제안서는 찬반 논의를 검토한 뒤 “형사처벌은 여러 한계와 부작용이 있을 뿐 아니라 표현의 자유 옹호의 일관성을 해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면서 “차별시정기구를 통해 비사법적 구제(조정·화해·시정권고)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혐오 발언이 명백한 위협이나 손해로 발생할 경우 기존 형법과 민사소송으로도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일베는 사회적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의 최전선이어야 한다. 민주화를 조롱하는 일베를 민주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악마화·괴물화를 통한 배제가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 이를테면 시민교육의 강화와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다.

지난 5월24일 일간베스트저장소 회원들이 국가정보원 안보특강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역 앞에서 국정원이 제공한 버스에 오르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지난 5월24일 일간베스트저장소 회원들이 국가정보원 안보특강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역 앞에서 국정원이 제공한 버스에 오르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배제된 자들의 비뚤어진 울분마저 내칠 것인가

뭉뚱그려 호명되다 소란 일으킨 뒤에야 이름 갖는 존재들
내치고 재갈 물리는 ‘건전한 다수’의 폭력은 정당한가

김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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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는 정말 낯선 것인가. 도처에 일베에 대한 통탄과 분노가 넘쳐나는 이때에, 오히려 이 질문은 그래서 과감하게 혹은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생략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남들보다 한참 늦게 병역 의무를 수행한 까닭에 남들 민방위 받을 나이에 여전히 예비군을 받고 있다. 한국 사회가 낳은 가장 거대한 지루함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그 의무방어전에서 그나마 유의미한 건 어떤 귀동냥을 하는 것뿐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많은 이들을 만나는 것 같지만 적당히 추려진 범위 속의 관계에서 살아간다. 대학교수들은 20대를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그들이 아는 20대는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기자들 역시 어떤 대상을, 세대를 취재하곤 그들의 문제에 해박한 척하지만 기자들이 알고 있는 건 취재원이던 존재들의 단편적인 모습일 뿐이다.

동원 미지정자들이 참가해 동미참 훈련이라고 불리는 예비군 훈련에 가보면 대략적으로 심란하다. 귀동냥으로 듣는 얘기의 대부분은 ‘여자’ ‘게임’ 그리고 ‘스포츠 도박’에 관한 것이다. 몇 년간 지켜본바, 그 또래 수컷들의 집단에서 큰 목소리로 떠들 수 있는 ‘발화’의 헤게모니를 가진 이들의 관심은 정말 딱 그 3가지로 압축된다. 대화의 수준은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건 그것보다 훨씬 더 저열하다. 공익근무요원이 성폭행과 살인을 저지르고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는지, 1990년대 판타지스타 출신의 농구 감독이 어쩌다 스포츠 도박의 마수에 걸렸는지를 예비군 훈련장에 오면 어렴풋하나마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렇게 실컷 떠들던 아이들은 일당 1만원을 받곤 우르르 게임방으로 몰려간다. 그나마 점심을 먹으면 식대가 공제되고 4천원만 수령할 수 있어, 그 아이들 상당수는 점심을 건너뛴다.

대학생들은 ‘학생 예비군’이란 배려를 받으며 빠져나가고, 현역을 다녀온 이들 중 성실한 이들은 ‘동원지정’ 훈련을 이수하는 것이 보통이다. 동미참 훈련은 말하자면 예비군 훈련 가운데서도 전혀 배려받지 못한, 그리고 대접받지 못하는 이들이 주를 이루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뤄지는 대화는 그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소외받는 이들의 날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표현 수위는 성적 희롱을 훌쩍 뛰어넘는 모멸적 언사 그리고 현행법으로 충분히 잡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공모들, 세상에 대한 비하와 권력자에 대한 맹목적 불신들이다.

자, 이들을 모두 가둬넣어야 하는 것일까. 일베에 대한 보편 다수의 공격성 문제 역시 여기서 유추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미참 예비군의 상당수는 호프집 따위의 알바이거나 혹은 길거리에 널린 통신판매점 알바이거나 또는 무직이다. 이들은 말하자면 그렇게 중요하다는 ‘청년 문제’에서조차 소외된 혹은 배제될 가능성이 높은 이들이고 언제나 뭉뚱그려 호명되다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하면 그때에야 불릴 이들이다. 그렇다면 일베는 무엇에 소외되고 또 배제된 이들일까. 어떤 문제적 상황이 발생하면 일단 소외시키고 궁극적으로 배제하며 상황을 봉합해온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일간베스트’라는 사이트에, 그리고 그 사이트를 향해 ‘닥쳐’를 외치는 우리 안에 모여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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