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 앞세워 군비 증강한 노무현이 어떻게 종북인가김민하 <r> 정치평론가</r>
옛날 일이 떠오른다. 2002년 12월의 어느 날 밤, TV를 보고 있던 아버지는 리모컨을 집어던지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너희 아 무것도 모르는 젊은 녀석들 덕분에 빨갱이 대통령이 탄생했으니 이제 다 북한에 넘겨주 게 생겼다!”라는 말을 남기고. 나는 민주노 동당원이며 노무현 후보가 아닌 권영길 후 보를 찍었다고 설명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라가 금방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계속 화를 냈다. 16대 대통령 선거 결과가 발 표되던 날의 기억이다.
또다시 세상이 ‘노무현’으로 뒤덮이고 있 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이제는 어느 정도 잊혀진 그 이름을 다시 불러낸 것은 정 부·여당과 국정원이다. 국정원이 공개한 남 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읽으며 머릿속에 노 무현 전 대통령의 육성이 울리는 듯한 느낌 을 받았다. 황망한 일이다.
대화록의 내용을 곰곰이 뜯어봤다. 지도 자 간의 대화라고 보기엔 ‘오버’로 볼 수 있 는 발언이 종종 나왔지만 새누리당 일부 정 치인들이 주장한 ‘북방한계선(NLL) 포기’ 같 은 발언은 찾아볼 수 없다. 소셜네트워크서 비스(SNS) 공간 등에서는 새누리당의 ‘허당’ 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분명히 ‘역풍’으 로 볼 수 있는 조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새누리당 소속 정치인들은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에 새삼스러운 놀라 움을 표한다. ‘군 통수권자가 영토주권을 북 한에 사실상 상납’ ‘영토 포기 발언은 쿠데타 반란 행위’ ‘반역의 대통령’과 같은 정제되지 않은 표현이 난무한다.
‘독해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 도 나오는 모양이지만, 나는 화내던 아버지 의 모습을 떠올렸다. 새누리당 정치인들이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한 것일 게다. 국정원 직 원이 인터넷 공간에 댓글을 단 것은 선거에 개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북주의자들의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러 한 주장이 사람들에게 더 잘 받아들여지려 면 이 땅에 종북주의자가 매우 많다는 사실 이 강조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지어 대통령마저도 ‘종북’이었다는 주장을 새삼 꺼내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해본 일이 없다. 하지만 그를 종북주의자로 부를 수는 없다 고 생각한다. 오히려 일부 아마추어 군사·무 기 애호가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꿈과 희 망의 군국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자주국방’을 외치며 국방 예산을 증강했고 이지스함 등 최신 무기 도입을 추진했다는 것 때문이다. 평화와 군축을 외치는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야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종북’의 기준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일 아 닌가?
그럼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모를 당 하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옛날 중국 에서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는데 여 기서는 산 중달이 죽은 공명을 불러 동탁으 로 둔갑시킨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정치 의 세계는 그저 비정하다.
노무현 매도의 본질은 그와 교감한 대중에 대한 업신여김원용진 <r> 서강대 교수</r>[%%IMAGE3%%]
노무현 불러내기가 한창이다. 퇴임했고, 이승과 작별한 지 한참이 지났건만 그를 부 르는 쪽은 잠깐의 쉼도 없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끊임없이 업고 다니는 형국이다. 직접 불러다 업고 다니는 쪽에서는 축귀를 한다 며 대중을 을러댄다. 정치적 국면마다 그를 불러 재미를 봤다고 생각하는 탓일까. 이번 여름 다시 불러, 업고 다니며 설레발을 치며 비상, 비상을 외친다.
대중 내면에 노무현은 그가 남긴 스타일로 각인돼 있다. 더 이상 정치를 할 수 없는 그 가 기억될 수 있는 방법은 그 말고는 없다. 그 를 열광적으로 따랐던 쪽은 정치적 업적 때 문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대중 기억엔 그 의 몸짓, 표정, 말하기가 더 많이 묻어 있음 을 부정키는 어려울 것이다. 다른 정치인들 이 갖길 원했으나 갖지 못했던 스타일이다. 퇴임 뒤 그를 방문해 맞대화를 했던 그 많던 대중을 떠올려보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스타일은 특정인이 가진 독특함이면서 몸 에 배어 자연스러워 열광받을 만한 매력을 말한다. 누구든 스타일을 갖고 싶어 하지만 좀체 갖추지 못한다. 그건 본인의 의사와 관 계없이 봐주는 쪽에서 정해주기 때문이다. 발신하는 쪽과 그를 받는 쪽이 통해야 가능 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스타일을 가졌던 이 를 무너뜨리려 하면 그를 받아들였던 쪽도 쳐야 하는 부담을 가져야 한다. 노무현을 불 러내는 일은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축귀해야 하는 자의 다 급함 탓에 노무현을 불러내기만 하면 제 몫 을 챙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로 넘친 다. 그의 기일에 뭉실 피어오르는 노란색 기 운도 못 느끼는 무뇌적 정치인이 많다. 대중 의 기억을 지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욕망을 밀어넣자는 이기적 정략을 편다. 대중과 통 하려 않고 억지로 구겨 들어가겠다며 폭압적 태도를 취한다. 노무현의 스타일과 대중의 기억을 잇는 인대를 억지로 끊어보겠다며 대 중을 업신여긴다.
축귀를 계속함은 늘 그 일이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스스로 자신을 세울 능 력 없음을 드러내는 무능력의 고백이다. 영 원히 대중의 마음과 기억 속으로 들어가 통 할 의지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으며 대중을 속이며 묻어가겠다는 기생(寄生) 선언이다. 자신의 스타일 갖추기를 하지 않은 채 익명 의 정치를 택하며 어둠 속으로 기어들겠다 는 반 공공의 발로다. 소란스런 축귀, 노이즈 마케팅으로 정치판을 잠깐 선점할 수 있으 리라 기대하겠지만 그로써는 결코 대중 속 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이기적 욕망을 채우 는 임시방편이 될 뿐이다. 그래서 정치 발전, 사회 발전에도, 인간 발전 그 어디에도 기여 하지 못한다. 소모적일 뿐이다.
노무현을 업고 달리며 설레발을 치는 쪽 에 권한다. 이젠 그를 내려두시라. 한국 정치 역사에서 그나마 단 한 번이라도 대중과 스 타일로나마 통했던 그를 대중 안에 남아 있 도록 그냥 놓아두시라. 털끝만큼이라도 당 신들이 그렇게 중히 여긴다는 대중을 위하 는 맘이 있다면 그를 편케 해주시라. 동시에 스스로 스타일을 구축하고 대중과 통해 그 맘속으로 들어가야겠다는 다짐이라도 해보 시라. 설레발만 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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