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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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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트윗, 성재기의 죽음이 던진것

등록 2013-08-07 09:19 수정 2020-05-03 04:27
생 의지 넘어버린 비틀린 과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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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차별의 문제를 남성의 문제로 오해한 성재기
연대가 절실한 건 노량진·방화대교 사고의 희생자들
김완 기자

딱한 죽음이다. 그가 뛰어내려 ‘증명’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누 군가의 말처럼 그가 최소한 ‘남성해방’ 정도 의 명분을 그 추락에 실었더라면 그나마 이 렇게까지 모호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했다. 그를 부끄 럽고 또 죄송하게 만든 것이 ‘1억원을 빌려달 라’는 부탁의 면구함이었는지, 아니면 하릴 없이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 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숱한 죽음들처럼 그 저 딱하고, 또 어떤 죽음들처럼 애매할 뿐이 다. 그 죽음을 둘러싸고 말의 성찬이 펼쳐지 고, 자신이 특정한 진영의 ‘전사’ 혹은 일원 이라고 믿는 이들의 난동이 벌어지고 있지 만, 그럴수록 더욱 공허할 뿐이다. 그의 추 락은 그저 한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 이처럼 허망할 수 있으며 생의 의지보다 앞선 존재 과시의 욕구는 얼마나 한 사람의 운명을 가 혹하게 만들 수 있는지만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그의 죽음과 겹쳐져 그가 뛰어든 그 강 물에서 남성 노동자들이 잇따라 목숨을 잃 었다. ‘중국동포, 건설현장, 노동’을 키워드 로 갖는 노량진 수몰 사고와 방화대교 상판 붕괴 현장의 그 죽음들은 제 한 몸 움직이 는 것으로 생을 꾸려온 남자들이, 불어난 강물과 세찬 빗줄기를 견디지 못해 발생한 사고였다. 그들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여전 히 어디에서 ‘지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증 명’해냈다. 남성 인권을 대변한다는 이의 죽음이 격렬한 정치적 언어로 ‘마사지’되는 동안, 역설적이게도 이 남성들의 죽음은 그 러나 전혀 남성들로부터 조문받지 못하고 있다.

벌써 10여 년 전에, 어떤 대통령은 ‘죽음 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입 에 담기 참 쓴 말이었다. 하지만 그 대통령 에게도 어떤 ‘진심’이 있었다는 걸 믿어보자 면, 그건 죽지 않아도 투쟁할 수 있는 방법 과 개별적으로 산화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 을 찾을 수 없는 절박함은 이제 구분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판단의 주관성과 적절함의 기준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 면, 남성의 인권이야말로 죽음으로 응답해 야 할 문제도, 투쟁으로 쟁취해야 할 대상 도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인권이 의미를 갖 는 지점은, 그가 아닌 그가 뛰어내린 그 강 물에서 살고자 발버둥쳤지만 끝내 어쩌지 못하고 휩쓸려버린 남자들의 문제일 것이 다. 제도 바깥의 남자들, 사회가 배제하거 나 추방하려는 남자들은 아직도 있다. 하지 만 그건 남성의 문제라기보단 노동의 문제 고 차별의 문제다. 그러나 남성 인권을 말하 는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문제에 둔 감하다.

여전히 죽어야만 존재가 ‘증명’되는 이들 의 죽음에 무감한 사회에서, 이 죽음은 그래 서 더 딱하다. ‘연대’하지 않아도 될 것의 연 대를 주장하며, 그 환상 속에서 존재를 구현 하려다 실패한. 세상의 깊이와 자신의 존재 감 사이에서 혼돈에 빠졌던 그이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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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액션의 과잉이 그를 떠밀었다 [%%IMAGE3%%]타인의 주목 얻기 위한 강박적 경쟁이 빚어낸 비극
인터넷상 무수한 ‘자기전시자들’의 보편 운명일지도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r>

비루한 신념도 신념이다. 그것을 위해 싸 우다 죽은 이를 굳이 ‘열사’라 부르지 못할 까 닭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게 있다. 어떤 정황 을 봐도 성재기씨는 죽음을 결심한 게 아니 었다. 사회악 혹은 거대한 폭력과 싸우다 희 생된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돈 1억원을 모으 기 위해 농담처럼 튀어나온 이벤트였다. 그런 데 시나브로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가 돼 갔다. 지지하던 이들은 열광적으로 응원했 고, 혐오하던 이들 중 상당수는 ‘말만 해놓고 도망가기 없기’라며 압박했다. 대중의 관심 은 끝없이 부풀어올랐다. 성재기씨는 이 전 대미문의 호객 이벤트를 실행에 옮긴다. 그리 고 끝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사전 연습 까지 했지만 워낙 무모한 짓이었기에 소용이 없었다. 한강을 헤엄쳐나와 저녁 파티에 참석 하겠단 선언은 애당초 지켜지기 어려운 약속 이었다. 황당한 소극은 황망한 비극이 됐다.

그는 나름대로 절박한 투쟁을 하고 있었 던 것 같다. 대중의 주목과 관심을 얻기 위 한 투쟁 말이다. 대체 무엇이 그를 조바심 나 게 만들고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걸까? 예 전부터 많은 이들이 인터넷에서 특히 도드라 지는 자기과시, 노출증을 설명하기 위해 인 정욕구나 인정투쟁 같은 고전적 개념을 끌 어왔다. 하지만 이 개념이 지금의 현실에 정 확히 들어맞는 것 같지 않다. 헤겔이 말한 ‘인정투쟁’(recognition struggle)은 나와 타 자의 갈등 속에서 자기존립의 근거를 찾는 행위다. 또한 이는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라 때에 따라 역전되는 관계(‘주인과 노예의 변 증법’) 속에서 벌어지는 역동적 사건이다.

반면 성재기씨를 포함한 인터넷의 무수한 ‘자기전시자들’의 경쟁은 순전히 타자의 욕망, 대중의 욕망에 따라 성패가 결정되는 일방적 게임이다. 그것은 인정(recognition)을 둘러 싼 변증법적 투쟁이 아니라 주목(attention) 을 얻으려는 강박적 경쟁이다. 미국의 사 회학자 찰스 더버는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라는 개념을 통해 미디어 과잉이 만들어낸 ‘주목사회’의 단면을 보여준 바 있 다. 이념 또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단순히 관 심과 주목을 얻기 위해 개인이 행위하고 의 사 결정을 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 이다. 주목 경쟁에서 핵심은 ‘얼마나 많은 사 람이 반응하느냐’이다. 내용이 지니는 의미나 가치는 물론, 심지어 그것이 부정적 반응인지 긍정적 반응인지조차 부차적이다. ‘리액션의 질량’ 자체가 자본이고 권력인 까닭이다. 미디 어가 많아지고 정보가 넘쳐날수록 숙고와 성 찰은 공허해질 뿐 아니라 점점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해진다. “저 사람은 왜 유명한 거지?” “저 사람은 유명한 걸로 유명한 사람이야.”

성재기씨의 죽음이 단지 기묘한 개인의 해 프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떤 보편성을 획득하는 건 바로 이 부분이다. 사회적 자원 을 풍족하게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 짧은 시 간에 자신의 지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많 지 않다. 인터넷 같은 뉴미디어는 새로운 형 태의 셀러브리티들을 만들어냈고, ‘나도 그 럼?’이라는 기대와 환상도 거대해졌다. 심지 어 이미 유명한 개인들도 더 유명해지려고 온갖 황당한 짓을 벌인다. 성재기씨 본인을 포함해서 그가 한강에 빠져죽기를 진심으로 바란 이는 드물었을 게다. 그를 싫어했던 이 들조차도, 원했던 건 더욱 조롱할 수 있는 대상이지 쓸쓸한 익사체는 아니었으리라. 아무도 원하지 않은 이 죽음이 누구에게든 닥쳐올 수 있는 죽음임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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