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된 인과관계
언론도 낚였다
비정치 행위도 정치적 동기로 포장해 의미 찾는 세태 씁쓸허지웅 <r> 영화평론가</r>
인터넷 게시판에서의 갈등으로 칼부림이 벌어졌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다. 이 사건은 애초 ‘진보-보수 칼부림 사건’으로 일컬어졌 다. 그러나 상황을 따져보았을 때 ‘정사갤 살 인사건’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난 7월16일 검거된 피의자 백아무개씨 는 부산 해운대구 김아무개씨의 집 아파트 계단에서 피해자 김씨를 9차례 칼로 찔러 살해했다. 백씨는 경찰에 “정치적 성향이 다 르다는 이유로 김씨가 날 조롱하고 명예훼손 으로 고소하려고 해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조사를 담당하고 있는 부산 해운대 경찰서의 관계자는 피의자의 범행 동기를 다 르게 설명했다. 정치적 갈등이 동기라기보다 는 개인적으로 다투다가 감정이 폭발한 상 황이라는 것이다.
최근 ‘용인 엽기 살인사건’에선 흡사 피의자 가 영화 을 보고 그것을 모방해 범 죄를 저지른 것처럼 언론에 도배가 된 일이 있 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피의자는 먼저 이나 잔인한 영화에 대해 언급 하지 않았다. 피의자는 처음부터 동기가 없 다고 진술했다. 답답해진 기자들 가운데 하 나가 먼저 “ 같은 잔인한 영화를 즐 겨 보느냐”고 물었고, 그에 대해 피의자가 “봤 다. 공포영화를 자주 본다”고 대답했다. 이를 두고 언론은 평소 공포영화광인 피의자가 영 화를 모방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듯한 보도를 내보냈다. 이유가 없다면 이유를 만들고 선정 적으로 포장해서 기사를 팔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언론의 태도를 ‘성급한 인과관계의 발 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정사갤 살인사건’에서도 ‘성급한 인과관계 의 발명’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용인 엽기 살 인사건’과 달리, 존재하지 않는 인과관계를 만들어낸 최초 발화자가 피의자 자신이라는 점이 다르다. 피의자는 끊임없이 자신이 진보 성향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인터 넷 게시판에 남긴 글들을 읽어보면 사실과 전 혀 다른 진술임이 드러난다.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는 관계없이, 현실세 계에서 체념하고 좌절한 개인들이 인터넷상 에서 위악을 부리며 서로 경쟁하듯 더 강한 수사를 동원해 스트레스를 푸는 모습을 종 종 볼 수 있다. 정사갤이나 일베가 대표적인 공간이다. 피의자와 피해자 모두 보수적 색깔 만 남아 있는 정사갤에서 활동했고 특정 지역 을 비하하고 희화화하는 행동을 보여왔다. 피 의자가 피해자를 일컬어 사생활이 문란하다 는 등의 내용을 유포했고, 이에 피해자가 명 예훼손 등으로 고소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피의자 백씨가 주장하는 “정치적 성향이 다르 다는 이유” 따위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치 환하고 설명해야만 자존감과 자의식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성향이나 사안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백씨의 행동과 사건 정황에서는 여성혐오와 비뚤어진 자기애를 찾아볼 수 있을 뿐, 어떤 종류의 정치 적 대립각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가 범행 동기 를 정치적 이유라고 설명한 것은, 그런 식으로 자기 행동에 스스로 원인을 제공하고 ‘설명 가 능한’ 차원으로 바꾸어놓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금세 찾아낼 수 있는 사 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단지 그것이 더 자극 적이라는 이유로 피의자의 진술에만 의존해 “살인 부른 디시인사이드 정사갤, 보수·진보 가 뭐라고 칼부림까지”식의 기사를 유포한 언 론 또한 책임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진영 프레임 전후 맥락 생략한 채 기사화 쉬운 자극적 사연만 부각
과잉 정치화된 담론 세계에 거친 ‘진영 환원주의’만 판쳐
이동연 <r> 허지웅 <r> 영화평론가</r></r>
최근 두 남녀 네티즌이 한 인터넷 사이트 에서 정치적 논쟁으로 시비가 붙다 남성이 여성의 집에 찾아가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바 있다. 공교롭게도 남 성은 광주 출신, 여성은 부산 출신이다. 명 절 날 집안일로 가족 간에 시비가 붙거나, 이 웃 간 주차 시비로 끔찍한 살인사건이 난 예 가 간혹 언론에 오르내린 적이 있지만, 이처 럼 네티즌끼리 정치적 논쟁을 벌이다 살인사 건이 벌어진 것은 이례적이다.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의 내막을 정리하 면 다음과 같다. 두 남녀는 한 인터넷 사이 트의 ‘정치사회 갤러리’에서 3~4년 전부터 진보적인 논객으로 활동했는데, 살해한 남 자가 갑자기 여자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글 을 싣다 서로 사이가 갈라졌고, 이후 살해당 한 여성이 몇 개월 전부터 보수적인 글을 올 리는 것에 격분한 남성이 여성이 살고 있는 부산까지 찾아가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 살인사건을 보도한 기사의 논조는 인터넷 보수-진보 논쟁이 살인사건 으로 비화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살인사 건에 대한 네티즌의 의견은 좀 다르다. 사건 의 당사자들은 처음부터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고, 특히 남성의 아이디를 추적해 보면 실제로 친북 인사들과 호남 사람들을 비하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같은 사 이트에서 남성이 여성의 사생활을 폭로하고 다녔다는 기사를 감안하면, 이 사건은 정치 적 논쟁이 아닌 개인적 갈등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살인사건의 동기가 언론을 통해 보도될 때면, 대체로 전후 맥락이 생략된 채, 기사 화될 만한 자극적인 사연이 중점적으로 부 각되기 마련이다. 살인에까지 이르게 한 정 치적 진보-보수 네티즌들의 갈등 이슈는 최 근 친북·친노·호남 비방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일간베스트저장소’ 사이트 논란과 연 계해 부각할 만한 기삿거리다. 이 사건에 대 해 실제 ‘일베충’들의 반응을 보면, 여전히 좌 빨 음모론으로 접근한다. “죽인 남자가 부산 수꼴이고, 죽은 여자가 광주 좌빨이었으면 좌좀들은 분명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주장이나, 이 사건은 죽은 여성이 결과 적으로 “홍어의 강물에 휩쓸려버렸다”라는 주장이나 모두 사건의 실체를 여전히 편협 한 좌우 문제로 재생산한다. 살인의 실제 원 인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됐을 수 도 있다. 아니면 적어도 정치적 성향, 개인적 감정, 온라인 활동이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 일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은 이 사건을 진보- 보수 갈등으로 몰아갔고, 일부 ‘일베충’ 네티 즌들은 여전히 좌빨 혐오론으로 몰고 간다.
살인사건의 과정도, 언론 보도도, 사건에 대한 재생산도 모두 정치적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정작 정치는 결핍되고 담론만 과잉 돼 있다. 결핍된 정치란 바로 정치적 이성과 논리에 바탕을 둔 생산적 논쟁을 말한다. 과 잉된 담론이란 모든 것을 진보-보수에 대한 편견으로 환원하려는 태도다. 정치적 갈등 으로 보도된 살인사건 안에 실제 정치는 존 재하지 않으며, 쓸데없는 과잉된 담론만 떠 돌아다닌다. 비극적인 것은 살인사건 자체 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단순 하고 무책임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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