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8월9일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완강하게 버티던 대일본제국은 8월15일 항복을 선언하고 무너졌다. 그리고 2천만 명의 아시아 사람들과 약 300만 명의 일본인을 죽음으로 내몬 전쟁이 끝났다.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의해 독립될 때까지 7년 동안 미군 점령을 경험한다. 대일본제국의 붕괴와 ‘신생 일본’의 출범. 역사적 전환점이 된 8월15일을 일본에선 ‘종전기념일’이라 한다. 패전이라 하지 않고 종전이라 하는 것에 일본 정부의 공식 역사관이 드러난다. 그래서 매년 8월이면 일본의 미디어는 각종 특별 프로그램을 내보낸다. 올해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메뉴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항복 선언문’을 낭독하는 히로히토의 목소리다.
조작이 틀림없는 8월15일 기사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로 시작해 4분30여 초 동안 계속된 항복 선언문은 1945년 8월14일 녹음돼 8월15일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다. 이 문서를 일본에선 공식적으로 ‘종전조서’라 하고, 이 방송을 ‘옥음(玉音)방송’이라 한다. 천황의 목소리가 옥구슬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일까? 하지만 옥구슬 같은 목소리라는 별칭과 달리 히로히토의 육성을 듣고 그 내용을 바로 파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라디오 방송에 잡음이 섞여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히로히토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처음이었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난해한 비일상적인 한자가 섞인 문어체여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이해한 것은 히로히토의 육성 뒤 이어진 해설 방송을 듣고 나서였다. 그리고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물론 항복 선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이 정보를 사전에 탐지한 군부가 항복 선언을 저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육군의 중견 장교들은 8월14일 밤에 군부 쿠데타를 시도했고, 해군은 비행기를 이용해 각지에서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유인물을 살포했다. 항복 선언 이후에도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군인과 우익들이 집단 자살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옥음방송을 들었던 당시 일본 사회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곧잘 인용되는 것 중 하나가 기사다. 1945년 8월15일 신문 2면에 “원통하고 분한 마음이 가슴속을 후벼판다. 고난의 길을 참고 견디어야” “옥(玉)모래를 부여잡고 궁성을 참배, 한없이 눈물만”이라는 표제하에 실린 기사는 옥음방송에 대한 반응을 이렇게 전한다. “흐느껴 우는 소리 있고 조금 앞 그곳에도 옥모래에 이마를 조아리고 대군에게 불충을 사죄 올리는 민초들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일어나 ‘여러분!’이라 외쳤다. ‘천황 폐하에게 죄송합니다.’” 기사 내용을 보는 한, 기자는 분명히 8월15일 정오에 현장에 가서 옥음방송을 들으며 궁성 앞에서 슬퍼하는 민초들의 모습을 취재한 기록과 느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를 게재한 신문은 8월15일 발행된 조간이다. 기묘하다. 아침에 발행된 신문이 어떻게 정오에 일어난 현장을 전할 수 있을까? 8월15일은 조간신문이 옥음방송 때문에 늦어져 낮에 발행됐다고 하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를 보니 기자는 오전 12시에 궁성 현장에서 취재를 마쳤고 이를 바탕으로 12시30분 편집부에 기사를 넘겼으며 오후 3시께 신문이 발송됐다고 썼다. 30분 안에 현장을 취재하고 본사로 돌아와 기사를 썼다는 것인데, 기자가 초인이 아닌 이상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우익 평론가 가세 히데아키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12시 전에 이미 신문 인쇄가 모두 완료돼 배포만 남겨두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쓴 기사가 아니라 그 전에 미리 써놓은 기사임에 틀림없다. 조작인 것이다.
조작 증명 증언, “하라는 대로 했다”
8월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단골 메뉴가 있다. 옥음방송을 들으며 남녀노소가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통곡하는 사진이다. 천황이 살고 있던 궁성 앞에서 무릎 꿇고 울음을 터뜨리는 청년, 공장에서 목이 메어 울고 있는 여자 종군위안부들, 그리고 직장에서 기립한 상태로 약간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는 소년의 모습 등을 담은 사진은 8월15일부터 8월16일까지 전국의 신문에 게재되었다. 사토 다쿠미가 쓴 (궁리·2007)에 따르면, 삿포로 야스쿠니신사 앞에서 옥음방송을 듣고 천황에게 사죄를 드리는 여학생들의 모습, 기립한 상태로 혹은 무릎을 꿇은 채 울먹이는 상태로 옥음방송을 듣는 모습을 담은 8월16일치 의 사진, 궁성 앞에서 무릎 꿇고 오열하는 남녀노소의 모습을 담은 8월16일치 의 사진 등은 모두 사전에 촬영됐거나 합성한 조작 사진이다. 에 실린 사진의 주인공은 1995년 “사진에 있는 사람이 나인 것은 확실하다. 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도 모른 채 하라는 대로 했다. 카메라맨의 요구에 따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포즈를 취한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하나다 쇼조라는 청년은 8월14일 궁성 부근을 지나다가 완장을 찬 카메라맨으로부터 “사진을 찍고 싶으니 궁성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때 찍은 사진이 8월16일치 에 실렸다. 사전에 촬영된 사진인 것이다.
공상과학(SF) 소설로 유명한 호시 신이치의 증언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도쿄제국대학 학생이던 호시는 학교에서 옥음방송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해 궁성으로 갔지만 “넓은 광장에는 한 대의 자동차도 없었다. 사람이라고 해야 멍하게 걸어가는 세 사람 뿐.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군인이라도 나타날까 해서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전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며 훗날 8월만 되면 어김없이 신문 등에 궁성 앞에서 무릎 꿇고 오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썼다.
병역거부자의 해방일, 패전을 기뻐한 사람들
물론 이런 사실을 들어 당시 일본인들이 항복을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익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앞에서 사례로 든 카메라맨이 조작 사진을 촬영하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는 목격담을 들어 사진과 기사가 조작이라 해도 옥음방송을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일본인의 모습은 진실이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카메라맨의 눈물의 진위를 따지지 않아도 당시 일본 사회가 패전을 충격으로, 슬픔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8월15일부터 9월 말까지의 자살자가 모두 426명에 달한다는 기록을 봐도 그 충격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중에는 철저 항전을 주장하기 위한 항변의 뜻으로 죽음을 택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슬픔과 충격 혹은 공포 때문에 자살을 감행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각종 기록을 보면, 슬픔 이외에도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한국에도 유명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1963)에는 히로히토의 옥음방송을 배경으로 다다미방에서 남녀가 뒤섞여 정사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변함없는 일상을 그려냄으로써 8월만 되면 슬픔을 강요하는 판에 박힌 ‘슬픔 공동체’에 딴죽을 걸고 싶었을지 모른다. 아톰을 그린 유명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는 자서전에서 옥음방송을 듣고 “전쟁이 끝났다!”며 이제는 하고 싶던 만화를 그릴 수 있게 되어 행복했다고 썼다. 일본 항공엔진 연구의 개척자이며 오토바이의 아버지라 불린 도미쓰카 기요시는 ‘세키한’(팥을 넣은 찰밥)을 해먹었다고 썼다. 일본에는 경사스러운 날이나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세키한을 지어 먹는 관습이 있으니 그에게 일본의 패전은 기쁨이자 축복이었을 것이다. 마루야 사이이치가 병역거부자의 삶을 그린 소설 (대나무 베개·1966)에서처럼 약 4만 명에 이르던 병역기피자나 병역거부자에게 옥음방송이 있던 날은 일단 해방의 날이었을지 모른다. 8·15를 계기로 천황주의자에서 반천황주의자로 변신해 천황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히로히토의 충복이자 비서실장을 지낸 기도 고이치는 옥음방송을 듣고 모여든 신민들이 항복 선언에 박수 갈채를 보내는 모습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고 일기에 썼다.
올해도 반복될, 변주될 ‘슬픔 공동체’
조작 사진과 조작 기사를 통해 히로히토와 일본 정부가 의도한 바는 명백하다. 항복 선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히로히토와 일본 정부가 가장 우려한 것은 패전을 계기로 민중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그래서 다종다양한 반응 중에서 오직 슬픔이라는 반응만을 끌어냄으로써 히로히토 및 지배층에 대한 분노가 설 수 있는 언설 공간을 없애버린 것이다. 이 ‘슬픔 공동체’ 프로젝트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히로히토에게 전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회는 없어져버렸다. 히로히토를 대신해 A급 전범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파시스트 히로히토는 평화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처벌은커녕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1989년까지 천수를 누렸다. 중국 전문가이자 작가인 다케우치 요시미가 8·15를 ‘포츠담 혁명’으로 부르며 민족의 힘으로 혁명을 달성하지 못하고 인민의 힘으로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민족의 굴욕’으로 명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올해도 히로히토의 옥음방송을 배경으로 궁성 앞에서 무릎 꿇고 오열하는 8월의 풍경은 어김없이 반복될 것이다. 지난 60여 년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 만들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슬픔 공동체’가 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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