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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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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멸시에 더욱 강해진 삶

모교인 인천 ‘작은자야간학교’ 교사로 일하는 중증장애인 최성미씨
일상의 모멸과 상처를 이겨내며 부지런히 자신의 일과 꿈을 찾아가다
등록 2012-05-05 16:29 수정 2020-05-03 04:26
최성미씨는 장애인에게 무엇 하나 거져 주지 않는 세상 덕에 강해졌다. 지난 4월20일 저녁, 인천 남동구 간석동 작은자야간학교 교실에서 그녀가 밝게 웃고 있다. 박승화 기자

최성미씨는 장애인에게 무엇 하나 거져 주지 않는 세상 덕에 강해졌다. 지난 4월20일 저녁, 인천 남동구 간석동 작은자야간학교 교실에서 그녀가 밝게 웃고 있다. 박승화 기자

최성미(39)씨는 야학 교사다. 인천 ‘작은자야간학교’ 기초반 담임을 맡고 있다. 그녀를 본 어머니뻘 학생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는다. 때로는 불쾌함을 드러내며 수업받기를 거부한다. “왜 하필 우리 반이래. 도움을 받긴커녕 도와줘야 할 사람이구만.” 학생들이 이리 말하는 이유는 성미씨가 중증장애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팔다리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다. 휠체어 생활을 하고 발음이 조금 부정확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의심한다.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어? 하지만 성미씨는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 야학 교사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초·중·고등 교과과정 모두 검정고시로 졸업한 경험이 있다.

그녀를 ‘흠’이라 여긴 가족

성미씨는 작은자야간학교 학생 출신이다. 검정고시로 고졸 학력을 얻고 방송통신대 영문학과에 입학한 이후로는 야학 교사로 있다. 올해로 8년째다. 성미씨에게 야학은 친정 같은 곳이지만, 마냥 편할 리는 없다. 얼마 전에 한 학생이 수업 중에 나가버렸다. 장애인 선생님이 성에 차지 않은 것이다. 화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성미씨는 내색하지 못했다. 자신은 한 반을 책임지는 교사였다. 그리고 저들은 자신과 같은 사회적 약자였다.

“화를 못 내요. 그 마음들을 아니까. 40년, 50년 평생을 글자 모르는 것에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사는 세월이 순탄치 않았을 텐데, 그분들보다 더 약자인 나까지 상처를 줘서는 안 될 거 같아요. 내가 아니라도 그분들 공격하고 무시할 사람이 많을 테니까.”

성미씨 본인이 차별과 멸시에 이골이 났기에, 당하는 사람 마음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배려다.

“우리 아버지는 집에 짜장면 배달만 와도 나를 이불로 덮어버렸어요. 보일까봐.” 체면을 유독 중시하던 가족에게 성미씨의 장애는 숨겨야 할 흠이었다. 그러니 바깥출입이 자유로웠을 리 없다. 그녀는 독립을 하기 전까지 친구 하나 없었다고 했다. 유일하게 나갈 수 있는 곳은 교회였다. 그곳에서 목사님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이 나를 많이 격려했어요. 너는 빨리 독립을 해야 한다. 너는 집에서 그렇게 썩을 애가 아니다. 목사님이 엄마·아버지도 설득했죠. 성미가 집에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성미는 사막에 던져놔도 살아갈 애다. 이 애는 강하다. 성미를 집에만 가두지 마라.”

그러나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은 요원했고, 그녀는 28살에 가출을 했다. 더는 집에서 버틸 수 없었다. 입고 있던 옷만 가지고 도망치듯 나왔다. 몇 달 동안 목사님 집에 얹혀살다가 주변의 도움으로 월세방 보증금을 마련했다. 독립 생활은 쉽지 않았다. 성미씨의 표현대로라면, 10년 전만 해도 장애인이 혼자 산다고 하면 ‘괴물’ 보듯 했다.

“휠체어 때문에 방이 1층에 있고 계단도 없어야 하고, 그런 방 구하기 쉽지 않아요. 어쩌다 하나 찾아도 혼자 산다고 하면 주인이 방을 안 주는 거예요.”

이웃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허름한 집 1층에 여자가, 그것도 몸이 불편한 여자가 혼자 산다니 사람들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한때는 옆집 남자가 술만 먹으면 찾아왔다. 남자는 한밤중에 문을 두들기며 도와줄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면 “병신이 내 호의를 무시한다”며 화를 냈다. 거리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야학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술 취한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다. 몸도 불편한데 왜 돌아다니느냐는 거였다.

어떤 것도 거저 생기지 않아

그럼에도 성미씨는 독립 이후 자신을 ‘물 만난 고기’라고 했다. 그동안 하고 싶던 일이 많았다. 친구를 사귀었다. 사회생활을 꿈꿨다. 그래서 공부를 했다.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계획했다. 30살 전에 대학에 입학한다. 35살이 되기 전에 취직을 한다. 이것이 목표였다. 딱 30살이 되던 해, 그녀는 대학에 들어갔다.

“10년 전만 해도 영어를 잘하는 장애인이 몹시 드물었어요. 한 명도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영어를 공부하자. 번역일을 하면 재택근무가 가능하니까. 유학을 가도 되고. 온갖 꿈을 꾸었죠. 그땐 내가 세상을 몰랐어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에 와서도 공부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밤새 공부해도 시험 당일 대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장애 정도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장애인을 한곳에 모아둔 시험장은 도떼기시장이었다. 게다가 도서관의 장애인 지정석, 장애인 화장실, 엘리베이터 설치, 이것들을 얻기 위해 그녀는 일일이 쫓아다니며 요구해야 했다.

“영문학과는 졸업 조건이 토익 점수 몇 점 이상인데 토익을 볼 수가 없는 거예요. 토익 시험은 대필이 없었어요. 대필자를 쓴 사례가 없대요. 토익을 볼 만큼 고학력 중증장애인이 없었던 거죠. 가서 난리를 치고, 언론에 기사를 내고…. 지금은 대필자를 쓸 수 있게 바뀌었어요. 가끔 그래요. 나는 왜 어디를 가나 싸워야 하나. 나는 편하게 있을 수 없나.”

어떤 것도 거저 생기지 않았다. 말하고 싸우고 요구해야 했다. 어릴 적에는 누가 한마디만 해도 눈물부터 흘렸다는 성미씨는 장애인에게 무엇 하나 공으로 주지 않는 세상 덕에 강해졌다.

대학 졸업 뒤, 성미씨는 꿈에 그리던 직장생활을 했다. 직장은 그녀와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장애인 자립활동을 지원하는 시민단체가 첫 직장이었다. 직장이라 했지만 월급이 없었다. 단체 형편이 어려운 탓도 있지만, 월급을 받으면 정부보조금이 끊겼다. 보조금이 중단되면 수급자를 대상으로 한 임대주택에서 나가야 했다. 다른 집을 구할 보증금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월급을 포기했다. 일을 해도 그녀가 손에 쥘 수 있는 돈이라고는 정부보조금 30만~40만원뿐이었다. 그다음 직장에서는 대표에게 빌려준 돈을 떼일 뻔했다. 그녀가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얕잡아본 것이다.

“돈 버는 일을 동경했는데 이제 돈은 나하고 인연이 없구나 해요.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은 아니다 싶어요. 돈이 아니면 다른 걸 하자 생각했어요. 40살이 되기 전에 뜻있는 일을 하려고요.”

장애인 성폭력 상담사를 꿈꾸다

뜻있는 일, 지금으로선 그것은 야학이다. 중증장애인이 어디 가서 선생님 소리를 듣겠느냐며 그녀는 자원교사인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성미씨는 장애인 성폭력 상담사를 꿈꾸고 있다. 인천공단에서 일하는 수많은 지적장애인들과 그들이 겪는 직장 내 성폭력 문제를 말하는 그녀는 진지하다. 생기가 넘친다. 성미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일, 자신에게 적합한 일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찾으려고 누구보다 부지런히 움직인 사람이다. 후원 계좌 농협 149-01-212141 작은자야간학교

희정 제2회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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