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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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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한 번이라도 맘껏 뛰놀다 갈 수 있기를”

철창에 갇혀 평생 새끼만 낳다 버려지거나 안락사 위기에 처한 유기견 거둬 보호소 운영하는 박운선씨의 꿈
등록 2012-04-04 10:27 수정 2020-05-02 04:26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개들이 짖기 시작한다. 낯선 사람이 온 탓이다.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얼른 문을 닫았다. 다시, 한 남자와 같이 들어서니 짖던 개들이 갑자기 꼬리를 흔들고 펄쩍펄쩍 뛰기 시작한다. 경기도 용인의 사설 유기견 보호소 ‘행복한 강아지들이 사는 집’에는 220마리의 개들이 산다. 하나같이 번식업자의 손에서 평생 새끼만 낳다 버려진 아이들 혹은 나쁜 반려인을 만나 악다구니 같은 생을 살다 버려진 아이들이다. 이들의 ‘아빠’를 자청한 이가 있다. 보호소를 운영하는 박운선(54) 소장이다. 그러나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평생을 천사처럼 살아온 사연을 기대한다면 오해다. 그는 이렇게 입을 뗐다. “나는 세상에서 최고로 나쁜 사람이었어요.”

사채업자에서 유기견 보호소장으로

유기견 보호소 ‘행복한 강아지들이 사는 집’은 정부나 관련 단체 등에서마저 외면당해 안락사 위기에 처한 개들이 입소해 있다. 박운선 소장의 바람은 나이가 많거나 덩치가 커서 입양을 가지 못해 보호소에 머물 수밖에 없는 개들이 우리에서 벗어나 넓은 마당에서 실컷 뛰어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겨레21> 정용일

유기견 보호소 ‘행복한 강아지들이 사는 집’은 정부나 관련 단체 등에서마저 외면당해 안락사 위기에 처한 개들이 입소해 있다. 박운선 소장의 바람은 나이가 많거나 덩치가 커서 입양을 가지 못해 보호소에 머물 수밖에 없는 개들이 우리에서 벗어나 넓은 마당에서 실컷 뛰어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겨레21> 정용일

박 소장은 유기견 보호소를 운영하기 전 고향 인천에서 목재소를 운영했다. 돈이 붇자 사채업을 시작했다. 높은 이자를 붙여 수금하며 그는 그게 부당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신의 몫을 당연히 되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든 자기 주머니에 들어와야 성에 찼다. 눈에는 살기가 돈다고 할 정도로 광채가 번쩍였다. 30억원쯤 돈을 깔아놓고 돌렸다. 아내가 자꾸만 그만두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렇게 7~8년 동안 사채업에 몰두했다.

그 와중에 아내의 건강이 나빠졌다. 병원에 갔더니 자궁에 큰 혹이 생겼다고 했다. “2000년이었나 그랬어요. 팔뚝만 한 혹을 잘라냈어. 그렇게 큰 종양이 몸 안에 자라고 있었다 생각하니 끔찍했죠. 그 일이 계기였어요. 돈이고 뭐고 다 싫더라고, 남에게 나쁘게 하는 것도 싫고.” 그러나 쉽게 사업을 정리하지 못했다. 2003년, 아내의 인내가 한계점을 찍었다. 아내에게 갱년기와 함께 우울증이 찾아왔다. 아내는 거의 자살할 지경으로 돈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고 소리 질렀다. 이혼해달라고 했다. 그해 6월, 급히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를 했다. 받을 돈, 빌린 돈도 정리하지 못하고 떠나왔다. 금세 돈이 궁해졌다. 인천에 가서 남은 돈의 일부를 수금해왔다. 아내에게 300만원을 갖다줬더니 마당에 집어던지며 “누가 돈 갖다달라 그랬냐”고 소리 질렀다.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동물을 좋아해 인천에 있을 때부터 개 12마리를 키운 아내와 애견 농장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때만 해도 개를 번식시키고 생명을 돈으로 거래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었다. 2003년 12월 이천의 살림집에서 애견 농장을 시작했다. 모견과 종견 60마리를 사왔다. 처음 새끼를 내서 강아지를 데리고 경매장에 찾아갔더니 한 마리당 3만~5만원을 주더란다. 잘생기면 가격을 더 쳐줬다. 경매장에는 젖도 떼기 전인 생후 3주~1개월 된 강아지들이 영문도 모른 채 낑낑대고 있었다. 경매장 사람들은 예쁜 강아지는 잘 팔리는 물건, 예쁜 모견은 새끼 내는 기계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실제로 인물이 좋은 개들은 평생 좁은 철창에 갇혀 새끼만 낳는다. 10개월 무렵에 첫 발정이 오면 1년에 두 번씩, 몸이 쇠할 때까지 기계처럼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다. 7~8년, 심하면 10살까지 그렇게 산다. 늙고 쇠한 모견들은 상품 가치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보신탕거리로 ‘폐견’ 처분 된다. “거기서는 누구도 낳아서 젖을 물려 기른 새끼를 떼어낼 때 모견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나도 그랬지. 그러던 중 동물병원에 취직한 막내딸이 안락사 위기에 처한 개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왔어요. 버려져서 오갈 데 없는 개였는데, 법으로 정한 계류기간이 지나고도 아무도 입양을 안 해간 거지. 아차 싶었어요. 인위적으로 개를 번식시키는 일이 사람이 할 짓이 못 되는구나 생각했어요.”

금세 ‘폐기 처분’ 되는 유기견

기르던 모견과 종견을 중성화 수술을 시켜 모두 입양 보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버려진 아이들을 품에 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년 만에 견사엔 150마리의 개들이 들어찼다. 두 번의 이사를 했고, 마지막 이사를 마치고 나니 개는 250마리로 늘어 있었다. 통장에 잔고는 1만4천원이 남아 있었다. 자립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인천에서 12마리 개와 함께 살 때, 여행이라도 가려면 아이들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아등바등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보호소 한켠에 반려견 위탁관리소를 운영하기로 했다. “이곳은 돈 없는 사람들을 위한 위탁관리소예요. 도시에 있는 ‘애견호텔’에 며칠 개를 맡기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급한 대로 개를 맡겼다가 돈이 없어서 다시 안 데려가고 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죠. 그러지 않도록 위탁 금액을 낮췄어요. 보호소와 함께 운영하니 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으냐고 걱정하시는 분도 계신데, 2500여 마리 개를 위탁해오며 버려진 아이는 6마리였어요. 이마저도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유기견 보호소는 마을에서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갔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주민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았다. “한번은 동네 주민 20명 정도가 집 앞에 찾아온 거예요. 시끄럽다고 화를 내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어요. 애들을 떠나보낼 수는 없고, 주민들과 벽을 쌓고 지낼 수도 없으니 수의사를 불러와 70여 마리 성대수술을 시켰어요. 태어나서 처음 울었어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엉엉 울었어요. 내 돈 다 뺏겼을 때도 안 울었는데….” 이후로 주민들은 더 이상 민원을 내지 않았다. 새로 들어오는 개들에게 성대 수술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끔찍한 경험도 여러 번이다. 가장 심했던 것은 지난해 여름, ‘애니멀 호더’(animal hoarder·반려동물을 수집에 가깝도록 지나치게 많이 키우는 사람)인 어느 할머니의 개 42마리를 구조한 경우다. 보호소에 이미 아이들이 가득 차 구조를 망설였지만 현장에 가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난장판 가운데서 개들은 밥그릇까지 닿을락 말락 한 짧은 목줄에 묶여 바둥거리고 있었다. 피부병이 돌아 몸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그냥 뒀다가는 개장수에게 팔려가거나 ‘폐기’ 처리 될 참이었다.

새 식구가 늘어 마당 울타리에 있던 아이들은 견사 케이지로 올라갔다. 그들을 보면 박 소장은 마음이 아프다. 2층짜리 케이지에 있는 개들은 산책이라도 시켜주려 땅에 내려놓으면 얼음처럼 굳어 꼼짝 못한단다. 항상 붕 떠서 생활하니 땅을 밟는 게 오히려 어색하고 무서운 것이다. 박 소장은 하루빨리 보호소를 새로 옮겨 그런 아이들이 얼마 남지 않은 생이라도 혹은 하루라도 땅을 실컷 밟아보고 뛰어놀아보고 가길 바란다.

“할 도리를 하는 것일 뿐“

박 소장은 요즘 마지막 이사를 준비 중이다. 안정적으로 시설을 운영하기 위해 빚을 지고 보호소 부지를 샀다. 평생 이자를 내고 살더라도, 시설을 보수했는데 주인이 금세 나가라고 하지 않을까, 세는 더 올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낫겠다고 생각했다. 돈을 탈탈 털어 땅을 사고 나니 보호소를 지을 자금이 부족해 그는 처음으로 후원을 모집 중이다. 버겁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개를 사고파는 게 흔한 구조가 바로잡히는 게 최선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다만 나일 뿐.”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문의: 행복한 강아지들이 사는 집 031-333-0729.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02-3482-0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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