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의 유래는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일자리 찾아 한국 온 청나라 기술자와 하층민들
‘지저분하고 궁상맞은 미개한 야만인’이라는 인식 퍼져 중국인들 비하
등록 2012-03-29 06:41 수정 2020-05-02 19:26

일본군이 아산만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하기 몇 시간 전인 1894년 7월24일 밤, 원세개는 변장을 하고 서울을 탈출했다. 청병(淸兵)과 청상(淸商)이 그 뒤를 이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청나라는 전쟁에 졌다. 조선에서 10년 넘게 위세를 떨친 청상들 다수가 사업 기반과 재산을 포기했다. 그것들은 대개 일본 상인들 몫의 전리품이 되었다. 물론 다 그러지는 않았다. 훗날 재한화교 사회의 전설적 인물이 된 동순태(同順泰) 주인 담걸생(譚傑生)처럼 꿋꿋이 버틴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전설이 되는 건 아무에게나 허용되지 않는 법이다.
대형 토목공사로 민심을 얻으려 한 고종
청일전쟁이 끝난 뒤, 청나라 상인 일부는 조선에 남겨둔 재산이 아까워 다시 돌아왔지만 그들의 성세가 예전 같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때부터는 돈 가진 상인보다 돈 없는 사람이 더 많이 들어왔다. 청나라 기술자들은 1883∼84년께 조선 정부가 기기국(機器局)·직조국(織造局)·연무국(烟務局) 등 신식 공장을 만들 때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청나라 기술자들은 조선 정부가 초빙한 전문 기능인이자 조선인 직공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조선 정부의 재정난 때문에 2~3년 만에 해고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조선인 직공보다 몇 배나 많은 임금을 받았다. 반면 청일전쟁 이후에 새로 들어온 청나라 기술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제 발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석공이나 토공, 미장공들이었다. 이들이 돌과 벽돌을 다루는 기술은 조선인 장인보다 나았으나, 대우는 그저 그랬다. 그럼에도 이들이 서울에 들어온 것은 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서울을 황도(皇都)다운 모습으로 개조하는 사업이, 이들에게 일거리를 주었다.

» 서울 종로구 삼청동 번사창(飜沙廠). 조선 정부는 1884년 신식 무기를 제조하려고 기기국(機器局)을 설치하고 그 제조장으로 기기창(機器廠)을 지었다. 번사창은 기기창의 부속 건물 중 하나다. 기기창 건립과 운영은 청나라 기술진이 지휘했는데, 청나라 양식과 서양식, 조선식이 절충된 이 건물도 그들이 설계·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

» 서울 종로구 삼청동 번사창(飜沙廠). 조선 정부는 1884년 신식 무기를 제조하려고 기기국(機器局)을 설치하고 그 제조장으로 기기창(機器廠)을 지었다. 번사창은 기기창의 부속 건물 중 하나다. 기기창 건립과 운영은 청나라 기술진이 지휘했는데, 청나라 양식과 서양식, 조선식이 절충된 이 건물도 그들이 설계·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직전부터 1902년까지, 서울은 흡사 거대한 공사장이었다. 1896년에는 종로와 남대문로 길가에 빼곡히 들어차 있던 가가(假家)들을 철거하고 길을 넓히는 공사가 진행됐다. 1897년에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자주를 상징하는 독립문과 원구단이 건설됐고, 이듬해에는 종로와 남대문로에 전차 궤도가 놓였다. 서울 도시 개조 공사의 일차 준공 목표 연도는 1902년이었다. 이 해는 고종 즉위 40년, 우리 나이로 51살이 되는 해였다.

고종은 자기 즉위 기념식을 대규모 국제적 축전으로 치르려 했다. 제국 선포 뒤 5년밖에 안 된 짧은 기간에 제국의 수도에 집적한 근대 문명의 성과물을 대외에 과시함으로써 문명국의 자격을 인정받고, 황제의 생일과 즉위 기념식을 축하하러 온 외국 특사의 행렬을 신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통치 기반을 안정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수도 공간을 무대로 삼고 왕이 주연배우가 되어 관객인 신민들에게 화려하고 장엄한 스펙터클을 보여줘 그들을 ‘열성 팬’으로 만드는 ‘극장국가’ 기획은 근대의 산물인 것만은 아니다. 고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주요 20개국(G20)이니 핵안보정상회의니 하는 국제 행사를 치를 때마다 어김없이 ‘국격’(國格)을 운위하지 않던가? 고종이 ‘황제어극(皇帝御極) 40년 망육순(望六旬) 칭경(稱慶) 기념제전’을 위해 구상한 ‘무대’는 서양인들이 보기에도 세련된 것이어야 했고, ‘주연배우’는 동양적 관점에서 천자(天子)다워야 했다(서양인들의 관점에서 ‘천자’는 예수 그리스도다). 새 황궁이 된 경운궁과 널찍하게 정비된 대로 주변 곳곳에 새로운 규모와 양식의 동양적(또는 전통적) 건축물과 서양식 석조 건축물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한국인 목수들은 동양적 제국의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건물을 지어본 적이 없었고, 한국인 석공들은 서양식 석조 건물의 미감(美感)을 표현할 기술이 없었다. 독립문·원구단·석고단·돈덕전·석조전·황궁우 등을 짓는 공사장들이 청나라의 석공과 목공, 미장이들을 기다렸다.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대제국

1960년대에 우리가 광부와 간호사를 독일에 파견하던 ‘기획 인력 송출’ 방식이라면 모르거니와 한두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 외국에 이주하는 경우는 없다. 석공·목공·미장이·토공들과 함께, 또는 그 뒤를 이어 요리사·이발사·사기꾼·도박사·매음부·곡예사 등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한국 땅에 발을 디뎠다. 1899년 봄, 에는 어떤 청나라 사람이 원숭이를 데려와 그 재주를 보여주고 대한 백성의 돈을 뺏어간다는 기사가 실렸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속담은 아마 이 무렵에 생겼을 것이다.

1899년 9월,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대청제국 흠차전권대신 서수봉 사이에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이보다 몇 달 앞서 은 ‘나라등수’라는 논설을 실어 세계 각국을 네 등급으로 분류했다. 1등 문명국, 2등 개화국, 3등 반개화국, 4등 야만국. 이 기준에 따르면 대한제국은 청국·타이·버마(미얀마)·이란·터키·이집트와 더불어 3등 반개화국에 속했다. 요즘 흔히 쓰는 표현으로 살짝 바꾸면, 삼류국가쯤 될 게다. 삼류국가 대표끼리 만나 체결한 ‘한청통상조약’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이래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이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다시 맺어보지 못한 최후의 ‘근대적 평등 조약’이었다. 바꿔 말하면, 청나라는 대한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 중 유일한 ‘대등국’(對等國)이었고, 청나라 사람은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중 유일하게 만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자기와 동등하다고 판단되면 얕보는 게 인지상정인 모양이라, 스스로 문명인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하는 개화 지식인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청나라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가 빠르게 확산됐다. 대한 신민이 거리에서 청국인에게 손가락질하며 ‘더럽고 미개한 야만인’이라며 꾸짖은 일을 칭찬하는 기사가 당시 신문에 심심치 않게 실렸다. 현상(現象)이 심상(心象·이미지)을 규정하기 마련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한국인들 눈에는 대인의 풍모를 갖춘 호방하고 쾌활한 중국인은 잘 보이지 않았고, 궁상맞고 지저분한 중국인들이 주로 보였다. 비록 ‘종이호랑이’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제국이던 중국의 실상은 그렇게 한국인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역사학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