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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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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서 옆 한성병원 서양화한 일본 문명 상징

등록 2012-11-23 19:09 수정 2020-05-03 04:27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다. 1543년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가 거의 동시에 출판되었다. 15세기 끝 무렵부터 불과 반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이 세 사람의 업적은 땅과 하늘과 사람에 관한 오래된 통념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신호탄이었다.

러일전쟁 무렵의 한성병원. 지금의 명동성당 입구 서편에 있었다. 남대문 밖 도동(桃洞·현 서울역 맞은편 세브란스 빌딩 자리)에 세브란스 병원이 신축될 때까지는 한반도 내 최대 규모, 최고 수준의 병원이었다. 전우용 제공

러일전쟁 무렵의 한성병원. 지금의 명동성당 입구 서편에 있었다. 남대문 밖 도동(桃洞·현 서울역 맞은편 세브란스 빌딩 자리)에 세브란스 병원이 신축될 때까지는 한반도 내 최대 규모, 최고 수준의 병원이었다. 전우용 제공

‘보편의학’이 된 서양 근대의학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이 신호를 인지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이론이 치료의학에 이용되기까지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오직 콜럼버스의 발견만이 즉시 ‘실용화’했다. 유럽 각지의 수많은 배들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냈다. 그들은 이 발견의 성과를 토대로 과거 자기들이 만들었던 지도를 수정해 새 지도를 만들었다. 같은 방식으로, 유럽인들의 세계에 관한 지식 목록도 크게 확장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새로 발견한 땅에서 신기하고 이상한 것을 모두 수집해 자기 땅에 가져갔고, 그것을 조사·연구한 뒤 기존 지식에 통합해 새로운 지식의 종합 목록을 만들었다.

이른바 ‘서양 근대의학’도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유럽 의학자들은 지구 전역의 질병과 치료법, 약물에 관한 지식을 모아 기존 의학 지식에 첨부·통합했다. 이런 지식의 확장은 ‘보편적 인류’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유럽인들은 지구 도처에서 사람을 ‘수집’했고, 그 일부를 ‘해부’했으며, 인류는 ‘해부학적으로 단일한 종(種)’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치료법’들을 찾아냈다.

전세계를 무대로 한 유럽인들의 이동은 권역별로 ‘균형 상태’에 있던 인간과 세균 사이의 관계도 뒤흔들었다. 유럽인들은 자기들에게 특유한 질병을 비유럽 세계에 옮겼고, 자기들이 첫발을 디뎠던 곳의 질병을 고향으로 가져갔다. 세계가 유럽 중심으로 통합되는 만큼, 질병도 통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 근대의학은 지리적·문화적 배경에서 독립한 ‘보편의학’의 지위를 얻었다.

보편의학은 정립 과정에서부터 유럽인의 세계 진출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유럽인의 활동 무대를 전세계로 확장하려면 유럽과 다른 지리·풍토 조건에서 만들어진 질병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유럽인들에게는 낯선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도 그 땅에 사는 세균들이 더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자기들의 의학과 함께 낯선 세계에 발을 디뎠다. 그들에게 보편의학은 그들 스스로 ‘야만인’ 또는 ‘미개인’이라 정의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자애로운 문명의 징표’이기도 했다.

한국인을 치료할 유일한 ‘권위’

도쿠가와 시대 네덜란드로부터 서양의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 서양 근대의학만을 ‘유일한 의학’으로 공인했다. 그들은 의학뿐 아니라 의학을 이용하는 방법까지도 유럽인들에게서 배웠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자국민의 조선 ‘진출’을 지원하려고, 그리고 조선인들 사이에서 일본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조장하려고 의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먼저 개항장에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병원을 세웠다. 1877년 이 땅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생의원이 부산에서 개원했으며, 이후 원산·인천에도 일본인 병원이 생겼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 근대의학 학습의 성과를 군대에 우선적으로 배치했는데, 그 때문에 조선에서 문을 연 일본식 병원에도 대개 군의(軍醫)들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자국 거류민과 조선인을 치료하는 일 외에, 조선인에 관한 ‘생체정보’도 수집해 자기 나라에 보냈다. 조선에 있는 일본 병원은, 일본의 문명을 표상하고 조선인을 회유하며 조선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외교기관이자 정보기관이었다. 서울에 들어온 최초의 ‘양의’(洋醫)도 미국인 선교의사 앨런이 아니라 일본 공사관 의사 가이로세 도시코였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몇 달 전, 그가 수술 중 여자아이를 죽이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면 앨런의 민영익 치료 신화는 없었을지 모른다.

1894년 갑오개혁이 진행되자 보건의료 부문에도 세와키 도시오라는 일본인 의사가 고문으로 초빙되었다. 그는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이어(移御)로 일본인 고문들이 다 해고된 뒤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한성병원을 개원했다. 장소는 공교롭게도 구리개 옛 혜민서 인근, 제중원 남쪽이었다. 조선 후기 이래 ‘의약(醫藥)의 거리’였던 곳이 서양인 선교의사와 일본인 의사가 경쟁하는 ‘신의학의 거리’가 된 셈이다.

러시아와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던 일본 정부는, 이 병원을 대한제국 정부 고관을 회유하는 데 이용하려 했다. 1897년 일본 해군은 이 병원을 인수해 군의 스즈키 유조에게 맡겼다. 스즈키는 ‘야스다 조오’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속이고 민간인 의사처럼 행세했다. 1900년, 한성병원은 서울에 있는 모든 서양식 병원을 압도할 정도의 새 건물을 지었다. 일본은 이 병원 건물을 통해 오직 일본만이 한국인과 한국의 병을 ‘치료’할 권위를 가졌음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1903년 고종의 최측근 이용익이 단독(丹毒)에 걸리자, 러시아 공사관과 한성병원 사이에 ‘환자 쟁탈전’이 벌어졌고, 우월한 시설을 가진 한성병원이 이겼다. 일본 공사는 친러파의 거두를 일본인 병원에 유치한 것을 ‘외교적 승리’라고 자평했다.

한국인의 정신에도 영향 끼치려

을사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 주도로 광제원, 의학교 부속병원, 대한제국 적십자병원을 통합한 대한의원이 설립될 때까지, 한성병원은 세브란스병원과 더불어 한국 최고의 근대적 병원으로 군림했다. 한성병원 말고도 일본인 거류지에는 여러 개의 개인병원이 생겼다. 애국심에 불타는 일본인 의사들은 한국인의 몸을 치료하며 정신에도 영향을 끼치려 했고,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 이 점에서는 선교의사들이 설립한 서양식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고대로부터 도시의 핵심 시설 중 하나였던 병원은, 이렇게 서울 공간을 ‘서양 문명’과 ‘서양화한 일본 문명’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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