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4일, 러시아에 국교 단절과 개전(開戰)을 선언한 일본은, 그해 2월8일 새벽 인천항에 육군 선발대를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곧바로 서울을 점령하고 한국 군사시설과 정부기관 등을 임의로 ‘수용’해 주둔하는 한편, 대한제국 정부를 협박해 2월23일 이른바 ‘한일의정서’라는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동양 평화 확립,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 등 의례적인 미사여구로 포장된 이 군사협정의 핵심 조항은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할 것이며,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군략상(軍略上) 필요한 지점을 상황을 보아 편리한 대로 수용할 수 있다”였다.
용산·평양·의주서 모두 1천만 평 요구
러일전쟁의 주 무대는 만주였다. 일본도 러시아도, 군대의 주력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는 어느 편이 더 빨리, 더 많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전선에 보낼 수 있느냐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일본군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경부철도와 경의철도를 속성으로 완공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경부철도는 일본의 경부철도주식회사가 맡아 공사 중이었고, 경의철도는 대한제국 철도원 주관하에 공사를 막 개시한 상태였다. 군사협정 체결 이틀 전인 2월21일 육군임시철도감부를 조직한 일본군은 두 철도 부설권을 임의로 수용하고, 공사 현장 인근 농민들을 강제 동원해 완공을 서둘렀다.
3월11일에는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총사령부로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설치됐다. 사령부 건물은 처음 일본 공사관 옆에 마련됐으나 차제에 한반도를 확실히 점령하기로 작정한 일본군은 영구 주둔 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들의 눈에 띈 것이 남산의 남사면(南斜面)에서 한강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마침 한강변에는 몇 해 전부터 일본인 거류민들이 적잖이 모여 살고 있었다. 8월15일,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군사협정 제4조의 규정에 따라 한국 정부에 군용지와 철도용지 수용을 통보했다. 그들이 요구한 땅은 서울 용산에서 300만 평, 평양에서 393만 평, 의주에서 280만 평 등 모두 1천만 평에 달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산에 묻었다. 무덤과 산소(山所)가 동의어인 연유다. 그런데 서울 도성 안의 산지는 죽은 이들에게 배당되지 않았다. 도성 안에서는 벌목(伐木), 채석(採石), 투장(偸葬) 행위 일체가 금지됐다. 하늘이 왕에게 내려준 것을 사람이 함부로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궁성을 굽어보는 곳에 죽은 이들의 유택(幽宅)을 짓는 것은 왕에 대한 불경이자 불충이기도 했다.
며칠 사이 분묘 이전 강요한 일본
조선 초기 도성 안에는 10만 명 정도가 모여 살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뒤에는 그 수가 2배로 늘었다. 도성 안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도성 안에서 죽는 사람도 늘어났다. 고향에 선산이 있는 양반들은 천릿길을 마다 않고 고향에 돌아가 묻혔지만, 서울 주민 중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러 대에 걸쳐 서울에서만 살아온 서리(胥吏), 직업 군인, 장사꾼, 노비들은 먼 곳에 장지를 마련할 연고도 능력도 이유도 없었다. 수많은 주검들이 광희문(일명 시구문)을 빠져나가서는 서쪽으로 돌아 남산 기슭에 묻혔다. 산은 남산이되, 서울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북망산’이었다.
서울의 북망산을 수용하겠다는 일본군의 요구 앞에 한국 정부는 그저 아연할 따름이었다. 조상의 묏자리가 후손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이 깊은 나라, 민사소송의 반 이상이 묏자리 다툼인 나라에서, 그 엄청난 수의 무덤을 다 옮기라는 것은 무리(無理)를 넘어 무도(無道)한 짓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대책을 마련하는 척하며 일본군 눈치나 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만주와 대한해협의 전선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일본군도 심하게 독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05년 5월, 대한해협 전투가 끝나자마자 바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다음달 일본 정부는 하세가와에게 군용지 수용을 신속히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하세가와는 한국 내부대신 이지용에게 7월26일자로 수용하되, 한국 정부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특별히 20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한 평당 2전으로 계산한 셈이다. 이 터무니없는 호의를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 받아들인 이지용은 당해 지역 지방관들에게 토지 이용 현황을 조사하고 보상 가액을 산정하라고 지시했다. 한성부는 해당 구역 내에 분묘 111만7308기, 사유 전답 3118일경(日耕·소 한 마리로 하루에 갈 수 있는 면적), 가옥 1176호가 있으며, 보상액은 89만7534원으로 추산된다고 보고했다. 분묘 1기당 이장비는 50전으로 쳤는데, 당시 장정 하루 일당도 안 되는 액수였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보상금은 오히려 작은 문제였다. 며칠 내로 분묘를 옮기고 집을 비우라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사람들은 내부로 몰려가 사정을 봐달라고 호소했으나 이미 한국 정부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흥분한 군중 일부가 폭동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일본 헌병이 출동해 ‘가볍게’ 진압했다.
해방 이후 지금의 원효로로 불려
일본군은 이렇게 약탈한 광대한 땅 위에 거대한 병영과 철도 관련 시설을 지었고, 남은 땅은 일본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땅에는 ‘신용산’이라는 새 이름이 붙었다. 이 중 군용지로 편입된 땅은 해방 이후 그대로 미군에 넘어갔다. 민간인 구역에 새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도성 안의 혼마치(本町·본정)에 상대해 자기들 동네 이름을 모토마치(元町·원정)라 붙였다. 일본인들의 ‘으뜸가는 동네’라는 뜻이다. 1946년 10월 가로명제정위원회는 모토마치를 ‘원효로’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충무로·을지로 등이 나름의 분명한 작명 이유가 있었던 데 비해, 이 이름은 원정의 ‘원’과 인근 효창원의 ‘효’를 그냥 나열해서 성의 없게 붙인 이름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가로명제정위원회 회의록을 뒤져보았지만 이 의혹을 풀어줄 수 있는 내용은 찾지 못했다. 일본 불교가 원효대사를 높이 평가한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거나, 혹은 가로명 제정위원 중에 독실한 불교 신자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나 혼자만의 추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