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땅에 합법적으로 첫발을 디딘 백인은 독일인 묄렌도르프(한국 이름 목린덕)였다. 물론 그보다 먼저 서울 땅을 밟은 백인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은 어쩌다 표류해서 서울로 압송되었고, 프랑스인 신부들은 몰래 들어왔다. 1882년 5월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조선 정부는, 청(淸)에 외교 통상 전문가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부하 마건상과 톈진 독일영사관에 있던 묄렌도르프를 추천했다. 그런데 그 직후 서울에서 군인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묄렌도르프는 톈진에 영선사로 가 있던 김윤식 일행과 함께 그해 12월에야 입경했다.
귀신을 ‘양귀’가 쫓을 수 있을까
묄렌도르프는 입경한 지 열흘이 넘어서야 고종을 알현했다. 그때까지 그는 아마 동행한 마건상과 함께 청군 군영에서 지냈을 것이다. 조선 정부는 그에게 참의통리아문사무 벼슬을 주었다가 곧 협판교섭통상사무로 승진시켰다. 신설 아문인 통리아문의 협판은 참판과 같은 직급이었기 때문에 이후 그는 ‘목참판’으로 불렸다. 조선 정부는 그가 거처할 집도 마련해주었다. 당대의 척신(戚臣) 민겸호가 살던 저택으로 지금의 조계사와 수송공원 일대에 걸쳐 있었다.
민겸호는 선혜청 당상 자리에 있으며 구식 군인에게 줄 급료를 횡령한다는 원성을 듣다가 군인폭동 때 살해당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집은 그가 죽은 뒤 몇 달 동안 비어 있었는데, 워낙 큰 저택이 빈 채로 있다 보니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 시절 사람들의 정서로는, 집주인 민겸호의 원혼이든 군인폭동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든, 이 집에 붙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참판에게 주기에는 큰 집이었으나, 조선 정부는 이 부담스런 집을 ‘양귀’(洋鬼)에게 주는 게 여러모로 편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이 집에 들러붙은 귀신을 양귀가 쫓아낼 수 있을지 두고 보자는 심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묄렌도르프에게는 이 집에 붙은 귀신이 아니라 집 자체가 문제였다. 그는 톈진에 있으며 이미 ‘중국식 주거 생활’에 익숙했고 조선도 중국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겠지만, 조선의 집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의 뒤를 이어 서울에 들어온 구미인(歐美人)들이 불평을 늘어놓은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집이었다. 그들은 천장이 낮고 비좁은데다 어두우며 냄새까지 나는 집에 진저리를 쳤다. 그들은 조선의 집에서 살려면 자기 몸에 밴 행동 양식을 바꿔야 했다. 신발은 항상 신고 모자만 썼다 벗었다 하는 것이 그들의 예법이었으나, 조선 사람들은 모자는 항상 쓰고 신발만 신었다 벗었다 했다. 조선의 집은 그들에게 실내에 들어오려면 신발을 벗으라고 강요했다. 밥을 먹으려면 식탁이 놓인 식당으로 가는 것이 그들의 생활문화였으나, 조선의 집에서는 식탁이 자기 앞으로 걸어 들어왔다.
천장과 문지방만 불편하다고 한 묄렌도르프
온돌방도 집중적인 불평 대상이었다. 본래 한옥의 마루는 남방식 건축 요소고, 온돌은 북방식 건축 요소였다. 남방과 북방의 상반되는 건축 요소를 한 집에 결합시킨 것은, 한국의 기후가 그만큼 ‘극단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한여름과 한겨울의 기온차가 50℃ 이상 나는 기후에 쉬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시베리아의 찬바람을 동반한 한겨울의 추위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절절 끓는’ 온돌방 아랫목을 더 괴로워했다. ‘엉덩이가 익는 것 같아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거나 ‘바닥에 두꺼운 요를 두 겹이나 깔았지만 뜨거워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유럽인 공통의 한옥 체험담이었다. 창도 문제였다. 지금은 아름다움과 기능성을 고루 갖춘 한옥 창을 찬미하는 사람이 많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햇볕의 대부분을 차단하는데다 쉬 뚫어지는 한옥 창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묄렌도르프는 의외로 자기가 받은 집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독일에 있는 아내에게 자기가 새로 얻은 집을 상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집은 순 조선식이지만 큼직하고 편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도배는 전부 새로 하고 바닥은 카펫 대신 녹색 털 천을 깔았어요. 사방 기둥마다 붉은 종이에 금박을 입힌 주련(柱聯)이 붙어 있습니다. 벽에는 큼직한 조선 그림이 붙어 있고 내부 장식은 우리 관점에서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여서 서양식 가구를 들여놓아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다만 천장이 너무 낮고 문지방이 너무 높아서 올라서든지 뛰어넘어야 할 판입니다.” 하지만 이 편지 내용이 그의 본심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타향살이를 하며 고향에 남아 있는 아내에게 집 때문에 고생스럽다는 말을 전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남편의 도리가 아니다. 그는 아주 사소한 것, 천장과 문지방만 거론함으로써 정말 아무 불편 없이 산다는 확신을 주려 했을 것이다.
묄렌도르프 집터 표석은 없어아내에게는 집이 아주 만족스럽다는 투로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가능한 한 집을 서양식으로 개조하려 했다. 마당을 서양식으로 꾸몄고, 행랑채는 서재와 사무실, 외빈(外賓)을 위한 서양식 객실로 개조했다. 그러나 조선 목수들과 조선 재료만으로 개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울 생활에 그럭저럭 익숙해지자 그는 조선 정부를 위해 독일인 메르텐스를, 그리고 아마도 자기 자신을 위해 독일계 미국인 로젠봄을 불러들였다. 메르텐스는 서양식 생사(生絲) 생산 시설인 잠상공사 설립을, 로젠봄은 유리공장 건설을 각각 맡았다. 그런데 잠상공사는 설립되었으나 유리공장은 그렇지 못했다. 설혹 로젠봄이 유리 생산에 성공했더라도 묄렌도르프의 집 창이 유리창으로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1885년 여름, 한-러 밀약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청으로 돌아갔다.
묄렌도르프가 떠난 뒤 그의 집은 한동안 독일공사관으로 쓰이다가 육영공원의 두 번째 교사가 되었고,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새 황궁이 된 뒤에는 정동에 있던 용동궁(명종의 세자로 요절한 순희세자가 살던 집)이 이 집으로 옮겨왔다. 용동궁은 왕후가 관할하던 궁집이었는데, 1906년 황귀비 엄씨는 이 궁에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세웠다.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이 주변에 보성학교·중동학교 등 신식 교육기관이 들어섰고, 1910년에는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가 자리를 잡았다. 서울 최초의 한양(韓洋) 절충 가옥이던 묄렌도르프의 저택은 이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터는 한국 근대 교육의 발상지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 수송공원은 학교 터 표석이 가장 많은 곳이다. 묄렌도르프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없는 것은 유감이지만.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