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내기 의사가 얻어낸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로버트 매클레이의 조선 답사 결과를 보고받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가 선교사를 파견하려고 분주히 움직일 즈음, 북장로회도 여러 경로로 조선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를 따라 일본에 갔던 이수정이 자진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 계기였다. 이수정...2013-03-09 02:40
서구식 학교와 병원 ‘복음화’ 위한 수단선교사 로버트 매클레이 일행은 나가사키와 부산항을 거치는 보름 남짓의 항해 끝에 1884년 6월23일 오후 1시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배 안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하선한 그들은, 아마도 루셔스 하우드 푸트 공사가 미리 안배했을 가마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제물포...2013-02-23 13:11
사절단 ‘보빙사’가 부른 ‘미 감리교 선교 척후대’서울에 상주 공관을 마련한 미국 정부는 조선 정부도 상응하는 조처를 취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외국에 상주 대표를 파견한 적이 없던 조선 정부에는 이 기대가 오히려 의아한 일이었다. 일본이 서울에 공사관, 각 개항장에 영사관을 설치한 뒤에도 조선 정부는 일본에 상주 공...2013-02-01 16:49
정동 하비브하우스가 한옥으로 남은 이유조선 왕조가 한양에 전도(奠都)한 지 2년 뒤, 태조 이성계의 부인 현비 강씨가 죽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 생명체의 본능에 속하지만, 연애결혼이 일반화하기 전에는 사랑이 부부 사이에 자리잡는 일이 흔치 않았다.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정략적 결합이었고, 이성계...2013-01-19 20:30
미국 대사관저가 정동에 들어선 까닭1866년 제너럴셔먼호가 조선 주변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해군 와추셋호의 함장 로버트 슈펠트 대령은 황해도 장연현 목동포에 상륙해 지방관에게 그 배의 행방을 문의하는 서신을 전달하고 며칠간 기다리다 회답이 없자 본국으로 귀환했다.16년 뒤인 1882년 음력...2013-01-05 01:35
묄렌도르프 저택은 최초의 ‘퓨전’ 가옥서울 땅에 합법적으로 첫발을 디딘 백인은 독일인 묄렌도르프(한국 이름 목린덕)였다. 물론 그보다 먼저 서울 땅을 밟은 백인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은 어쩌다 표류해서 서울로 압송되었고, 프랑스인 신부들은 몰래 들어왔다. 1882년 5...2012-12-21 19:36
인사동과 관훈동 유래를 아시나요도시, 특히 수도(首都)는 권력이 자신을 표현하는 공간이다. 인간적 척도를 훌쩍 넘어서는 기념비적 건조물들, 수많은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을 수 있는 거대한 광장, 그리고 도시 주민들의 일상적인 동선(動線)과 시선(視線)을 통제하는 도로는 권력이 자신을 표현하려고 만드는...2012-12-07 23:24
혜민서 옆 한성병원 서양화한 일본 문명 상징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다. 1543년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가 거의 동시에 출판되었다. 15세기 끝 무렵부터 불과 반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이 세 사람의 업적은 땅과 하늘과 사람에 관한 오래된 통념을 근본...2012-11-23 19:09
도쿄의 ‘번민 청년’ 게이조 ‘귀족’ 되다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막대한 전비(戰費)를 쏟아부었지만 얻은 것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뿐이었다. 그 지배권은 일본에 즉각적인 수익을 안겨줄 수 없었다. 오히려 일본 경제는 과도한 ...2012-11-08 23:39
집창촌에 포위된 신성한 ‘현충원’ 바쿠후(幕府) 시대 일본에는 산킨코타이(參勤交待)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 만든 것으로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들로 하여금 바쿠후 소재지인 에도(江湖·현재의 도쿄)와 자기 영지 사이를 정기적으로 왕래하게 한 것이다. 다...2012-10-17 15:43
‘모토마치’가 된 지금의 신용산1904년 2월4일, 러시아에 국교 단절과 개전(開戰)을 선언한 일본은, 그해 2월8일 새벽 인천항에 육군 선발대를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곧바로 서울을 점령하고 한국 군사시설과 정부기관 등을 임의로 ‘수용’해 주둔하는 한편, 대한제국 정부를 협박해 2월23일 이른바 ‘...2012-09-27 14:40
마포가 아닌 용산이 일본인 거류지된 까닭1866년 8월, 프랑스 군함 두 척이 강화해협을 통해 한강 하구로 들어왔다. 수심을 측량하며 강을 거슬러 오르던 이 배들은 양화진 앞에 닻을 내린 뒤 더 전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상류 쪽으로는 큰 기선이 운항할 수 없다고 판단해 강화해협을 봉쇄하는 전술을 택했다....2012-09-13 17:02
지금의 남대문로는 ‘센긴마에 히로바’1892년 봄, 일본영사관은 조선 정부를 압박해 동의를 얻은 뒤 자국 거류민을 대상으로 ‘노점영업규칙’을 발표했다. 이로써 일본인에게도 남대문로 양쪽에 늘어선 가가(假家)들 사이에서 조선인과 함께 노점을 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일본인들이 소소한 잡...2012-08-28 18:08
가난한 이의 돈감옥, 질옥고조선의 팔조법금 중에는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물건 임자의 노비로 삼으며, 풀려나려면 50만전(錢)을 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현대인이 고대의 개념들에 접근하려면 안개와 같은 모호성의 세계를 지나야 한다. 이 조항에서는 50만전을 내면 반드시 풀어줘야 한다...2012-08-16 12:29
남촌 ‘딸깍발이’ 동네, 일본 ‘게다’ 마을 되다 조선 정부와 일본 공사가 협의해 일본인 거류지로 지정한 지역은 조선 후기 ‘남촌’(南村)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남산의 북사면이어서 남향집을 지으면 산을 마주 보게 되는데다, 산그늘이 길고 겨울해가 짧았다. 풍수학에서는 산의 남쪽, 물의 북쪽에 있는 산남수북지(山南水北...2012-07-31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