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봄, 일본영사관은 조선 정부를 압박해 동의를 얻은 뒤 자국 거류민을 대상으로 ‘노점영업규칙’을 발표했다. 이로써 일본인에게도 남대문로 양쪽에 늘어선 가가(假家)들 사이에서 조선인과 함께 노점을 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일본인들이 소소한 잡화들을 들고 큰길가로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해는 임진년, 임진왜란 5주갑(周甲), 300년이 되는 해였다.
무력, 배일의식 극복할 유일 수단
예수 탄생 시점을 기준으로 AD(Anno Domini)와 BC(Before Christ)를 나누는 기독교 세계의 시간 운행은 누적적·직선적이지만 천자(天子)의 재위 연호(年號)와 간지(干支)를 병용하는 동양의 시간 운행은 반복적·순환적이다. 게다가 100년은 사람의 일생이 감당할 수 없는 시간대였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100년 단위가 아니라 60년 단위의 환갑(環甲) 또는 주갑(周甲)을 기념했다.
기념은 기억을 소환하는 의례다. 이 무렵에는 일본의 압력이 각 방면에서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은 모두에게 각별했다. 왕조정부는 두드러지지 않은 방식으로 여러 곳에서 임진왜란 5주갑 기념식을 치렀고, 백성들도 옛날 강산이 유린당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철천지원수인 일본인들이 서울 한구석에 들어와 몰려 사는 것만도 아니꼬운 일인데, 그들이 ‘감히’ 남대문 안 큰길까지 나와 호객(呼客)하는 꼴을 참고 보기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일본인 노점상을 함부로 때려 쫓아낼 수는 없었지만, 그들과 흥정하는 조선인은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었다.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남대문로의 일본인 노점상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해 가을, 일본 거류민단장은 ‘시끄럽고 분란하여 마음 편히 영업할 수 없었던 것’이 사태의 근인(近因)이라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다소의 원인’도 있다고 보았다. 그가 얼버무린 원인이 ‘조선인들의 뿌리 깊은 배일(排日) 의식’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조선인의 배일 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무력(武力).
일본 거류민단은 본국 정부에 특별 보호 순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거류민단 비용으로 낭인 몇 사람을 고용해 순사 업무를 맡겼다. 일본인들은 남대문로에 견고한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청국 상인과의 상전(商戰)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1893년 봄, 일본인 순사와 함께 노점상과 질옥(質屋)들이 다시 남대문로 좌우에 나타났다. 이들은 큰길가와 그에 인접한 곳의 집들을 집중적으로 사들이거나 담보로 잡았다. 이듬해 늦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남대문로에 있던 청국 상인들 대다수가 귀국하자 일본인들은 그들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허름한 가가를 헐고 일본식 새 건물을 짓는 자도 많았다.
1895년 4월16일, 한성부윤 류정수(柳正秀)는 ‘도로를 범하여 가옥을 건축하는 일’을 일절 금한다는 훈령을 내리고 일본인들에게도 이 뜻에 따라달라고 요청했다. 가가들 때문에 좁아진 대로의 원래 폭을 회복하고 수도의 면모를 일신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 금령을 이렇게 해석했다.
한국 금융 중심지의 역사적 기원
“이 금령은 경성시가 전체를 개량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당시 본방(本邦) 상인 중에는 남대문통 한인(韓人)의 가옥을 매입하여 철거한 후 그 자리에 길을 침범하여 일본식 새 가옥을 짓는 자가 자못 많았다. 본방인(本邦人)이 지은 가옥은 한인의 가가와 달리 국왕 폐하의 행행(行幸) 때도 철거할 수 없었으므로, 그 건축을 제지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조선인들보다는 도로와 부동산 가격 사이의 상관관계를 잘 알았던 일본인들이 이해득실을 따져본 뒤, 한성부의 요청을 수락하는 대신 남대문로 좌우에 있는 가가들을 신속히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일본 상인에게 손해를 끼칠 의도가 아니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던 개화파 내각이 이 명분을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정부는 가가 주인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모두 철거했다. 철거한 뒤 보니 큰길가 집들은 거의 전부 일본인 소유인 상태였다.
진고개 입구에서 구리개에 이르는 큰길 주변이 일본인 소유의 건물로 채워지자 1897년 일본영사관, 일본 거류민 총대역장(總代役場·거류민단 사무소), 일본인 상업회의소가 모두 남대문로와 진고개가 만나는 지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주변으로 이전했다. 청일전쟁 이전의 중화회관은 거류 일본인들을 위한 우편국이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북쪽으로 종로에 이르는 길가에는 일본인 회사들의 지점과 일본인 상점, 질옥들이 늘어섰다. 후일 남대문로가 한국 금융의 중심지가 되는 공간적 전제가 마련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07년 11월,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이 일본영사관 맞은쪽에 새 사옥을 짓기 시작했다. 일본 민간 은행의 영향력이 확대되면 식민지 경제 정책을 집행하는 데 차질이 생길지 모른다고 판단한 일제는, 따로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공사 중인 건물을 인수해 1912년 조선은행으로 준공했다. 그 직후 경성우편국도 새 건물을 짓기 시작해 1915년에 준공했다. 1906년 일본공사관을 한국통감부로 개편할 때, 일본영사관은 경성 이사청이 되었다가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점과 동시에 다시 경성부청이 되었다. 이제 남대문로와 진고개가 만나는 ‘광장’은 경성부청, 조선은행, 경성우편국의 3대 시설로 둘러싸인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 광장을 ‘센긴마에 히로바’(鮮銀前 廣場)라고 불렀다. 조선인들에게 서울의 중심은 종각 앞이었으나, 일본인들에게는 이곳이 중심이었다. 서울이 양극(兩極)을 가진 이원적 도시가 된 것이다.
이순신 동상이 충무로에 없는 이유
여담이지만, 1968년 발족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애초 선열들의 동상을 가급적 ‘연고지’에 세울 계획을 세웠다. 세종로에는 세종대왕, 충무로에는 충무공, 을지로에는 을지문덕 등. 당대 권력이 ‘군사주의’를 고취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지금 한국은행 앞 분수대 자리에는 충무공 동상이 서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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