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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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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식 학교와 병원 ‘복음화’ 위한 수단

등록 2013-02-23 13:11 수정 2020-05-03 04:27

선교사 로버트 매클레이 일행은 나가사키와 부산항을 거치는 보름 남짓의 항해 끝에 1884년 6월23일 오후 1시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배 안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하선한 그들은, 아마도 루셔스 하우드 푸트 공사가 미리 안배했을 가마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제물포에서 미국공사관이 있는 서울 정동까지 거리는 대략 40km. 가마꾼들이 그들을 미국공사관 앞에 내려놓은 시각은 초저녁 무렵이었다. 점심시간과 한강을 건너려고 배를 기다린 시간을 고려하면 가마꾼들은 무거운 가마를 든 채 얼추 시속 5km 이상의 속도로 ‘달린’ 셈이다. 그들은 도중에 말을 타고 서울로 향하는 일단의 미국인들을 만났다. 미국에서 귀환하는 보빙사 일행을 태우고 온 트렌턴호의 선원들이었다. 선원들과 매클레이 일행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각자 출발했는데, 미국공사관에 도착한 시각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조선 가마꾼의 걸음은 보통 사람보다 빨랐고, 조선 말의 속도는 다른 나라 말보다 느렸다.
미국공사관에서 서울의 첫 밤을 보낸 매클레이 일행은, 다음날 푸트 공사가 미리 세내둔 공사관 바로 옆집에 짐을 풀었다. 매클레이는 일주일가량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소일한 뒤, 6월30일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왕에게 자기 뜻을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편지의 상세를 알 수는 없으나, 요지는 서울에 서양식 학교와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 덧붙었을 것이다.

대궐로 행차하는 푸트 공사 부인. 가마꾼 4명과 겸인 2명, 구종 2명, 도합 8명이 수행했다. 불쌍한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자임한 매클레이는, 자기를 가마에 태우고 시속 5km 이상의 속도로 달린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도 표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조선인의 ‘불쌍한 영혼’이었지 ‘고통스런 육체’가 아니었다. 전우용 제공

대궐로 행차하는 푸트 공사 부인. 가마꾼 4명과 겸인 2명, 구종 2명, 도합 8명이 수행했다. 불쌍한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자임한 매클레이는, 자기를 가마에 태우고 시속 5km 이상의 속도로 달린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도 표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조선인의 ‘불쌍한 영혼’이었지 ‘고통스런 육체’가 아니었다. 전우용 제공

십자군 시대 유럽 기사들처럼

19세기 기독교(개신교)의 세계 진출은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예수회의 동방 진출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였던 이교도의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자국 국기를 꽂는 일을 신의 섭리에 따른 것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신이 자기들에게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특권’과 함께 전 인류에게 복음을 전파할 ‘의무’를 부여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백인 문명의 정수로서 모든 문명적 시설과 행위에 스며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군함과 대포가 ‘정복’을 위한 수단이라면, 학교와 병원은 ‘복음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신의 섭리는 본래 하나였기에, 둘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대 미국 기독교도들의 세계 복음화를 위한 열정은 십자군 시대 유럽 기사들의 그것과 흡사했다.

조선 지식인들도 ‘서양인’들이 학교와 병원만 가지고 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다. 도끼를 들고 궐 앞에 엎드려 서양과 통상을 하려거든 자기 목을 먼저 치라고 소리친 최익현 같은 기개를 가진 인물은 많지 않았으나,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조야(朝野)에 차고 넘쳤다. 하지만 서양 학문을 배우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기회마저 사라진다는 절박감을 느낀 사람도 많았다. 김옥균은 그런 사람들의 리더였다. 고종도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각국 사정과 영어를 아는 인재를 키우고 서양의학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당시 서양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은 다름 아닌 고종이었다.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과 중국에 보낸 영선사의 보고서가 그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공식 승인도 전면 금지도 아닌

이런 상황에서 는 누차 서양 학문과 기술, 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서양의학에 대해서는 “서양은 의술이 탁월하여 군사들이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운다”며 ‘군사적 실용성’을 강조했다. 서양식 학교와 병원은 ‘부국강병’을 위해 꼭 갖춰야 할 필수 시설이었다. 하물며 바다를 격해 수만 리 떨어져 있는데다 조선이 남의 능모를 받으면 힘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한 미국의 신민(臣民)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학교와 병원을 세워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7월3일 아침, 초조하게 회신을 기다리던 매클레이는 더 참지 못하고 김옥균의 집을 방문했다. 김옥균은 그에게 지난밤 왕이 그의 ‘사업 계획’을 신중히 검토한 뒤 승인했다고 통보했다. 아마도 그 ‘신중함’은 ‘기독교 포교’ 문제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고종과 김옥균 사이의 대화 내용을 알 도리는 없지만, 기독교 포교를 공식 승인하지는 않되 전면 금지하지도 않겠다는 ‘방침’이 정해졌던 듯하다. 갑신정변 이후에도 조선 정부의 기독교 포교에 대한 태도는 이 ‘방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날 오후 김옥균이 다시 매클레이의 숙소에 찾아와 학교와 병원을 지어주려 먼 길을 온 데 사의를 표하고, 그의 사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힘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했다. 매클레이는 ‘하나님의 신성한 섭리’를 느꼈다.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 9명과 수천 명의 조선인 신도가 목숨을 잃은 지 20년도 안 된 때였다. 그는 자신의 ‘대성공’을 자축하고 조선인들에게 내려질 ‘축복’에 미리 감사했다. 7월8일, 그는 서울을 떠나며 푸트 공사에게 곧 돌아올 테니 지금 자기가 머물고 있는 집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한국 기독교 역사 시원에는 민영익이

일본으로 돌아간 매클레이는 본국의 감리교 해외선교부에 조선에서 교육과 의료 사업을 담당할 선교사를 파송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일본에 있던 조선인 기독교도 이수정과 함께 조선 선교를 위한 성서 번역에 착수했다. 9월8일 푸트 공사로부터 다시 고무적인 편지가 도착했다. 조선 국왕이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학교와 병원 사업을 ‘암암리’에 지원하겠다는 뜻을 재차 밝혔다는 내용이었다. 매클레이에게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의 섭리’는 대개 사람의 범상한 예측을 허용하지 않는 법이다.

9월22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호러스 앨런이 ‘비정규적’ 절차를 거쳐 서울에 들어왔다. 그는 미국공사관 소속 무급 의사로 임명되었으며 매클레이가 선교 기지로 점찍어둔 집을 차지했다. 12월4일에는 조선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사흘 만에 진압되었고, 매클레이가 파트너로 생각했던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선 정부의 지원 아래 학교와 병원을 만들어 선교 기지로 삼으려 했던 매클레이의 구상은 뒤틀려버렸다. 그 구상을 실현한 이는 북장로회의 앨런이었다. 미국 감리회의 존 가우처는 기차 안에서 민영익을 만나 조선 선교 계획을 세웠지만, 그 계획을 실현할 수단을 먼저 확보한 것은 민영익을 치료한 북장로회의 앨런이었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시원에는 민영익이 있었다. ‘신의 섭리’를 사람이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학자*바로잡습니다. 947호 ‘사절단 보빙사가 부른 미 감리교 선교 척후대’에서 중국인으로 추정했던 매클레이의 요리사는 일본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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