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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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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 ‘딸깍발이’ 동네, 일본 ‘게다’ 마을 되다

등록 2012-07-31 17:58 수정 2020-05-03 04:26
1890년대 말의 진고개. 현재의 충무로5가. 오른쪽 상단에 명동성당이 보인다. 일본 상인들은 남산 기슭 예장동에서 시작해 슬금슬금 북진한 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입구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이 동네를 자기들의 본거지라 해서 ‘본정’(本町·혼마치)이라 불렀고, 해방 뒤 서울시는 그들의 자취를 누르려고 이 길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우용 제공

1890년대 말의 진고개. 현재의 충무로5가. 오른쪽 상단에 명동성당이 보인다. 일본 상인들은 남산 기슭 예장동에서 시작해 슬금슬금 북진한 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입구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이 동네를 자기들의 본거지라 해서 ‘본정’(本町·혼마치)이라 불렀고, 해방 뒤 서울시는 그들의 자취를 누르려고 이 길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우용 제공

 조선 정부와 일본 공사가 협의해 일본인 거류지로 지정한 지역은 조선 후기 ‘남촌’(南村)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남산의 북사면이어서 남향집을 지으면 산을 마주 보게 되는데다, 산그늘이 길고 겨울해가 짧았다. 풍수학에서는 산의 남쪽, 물의 북쪽에 있는 산남수북지(山南水北地)를 양지(陽地)라 하는데, 그에 비춰보면 이 땅은 ‘음지’(陰地)였다. 게다가 토질이 질기까지 해서 ‘진고개’(泥峴)라는 이름이 붙었다. 땅이 음지여서였는지, 이 동네에는 권력의 음지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가난한 남인 선비와 무반이 많이 살았다. ‘남산골 딸깍발이 샌님’이라는 말은 이 동네 선비들이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은 데서 유래했는데, 날이 개도 땅이 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촌이 일본인 거류지로 지정된 이후 ‘조선 나막신’을 신은 딸깍발이 샌님이 줄어든 대신 ‘일본 게다’를 신은 딸깍발이 왜인은 계속 늘어났다. 이러나저러나 딸깍발이들의 동네가 된 것이다.

 

“벌거벗고 다녀 일인 체면 손상 말라” 

 처음 이 동네에 정착한 일본 상인은 조선 관청과 민간인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일단 도시 중심에서 너무 멀었고 주변에 변변한 부자도 없어 형편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은 당시 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 일본 상인의 처지는 비참했다. 일본 상인은 중국인뿐 아니라 조선인에게도 구박받았다. 일본인은 조선 관리에게 물건을 팔고도 값을 받지 못했으며, 조선인에게 돈을 빌려주고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정부는 외아문의 도장이 없는 채권 증서는 사채로 간주하여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파산하는 상점도 있었다. 중국인들이 서울 도처에 당당한 점포를 자랑했던 데 반해 일본인은 오직 남산 기슭 한 모퉁이에 엎드려 있는 정도였다.”()

 이런 종류의 기록이 실상을 과장하는 것이야 으레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영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중국인보다 일본인을 ‘훨씬 더’ 싫어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의 예를 올리는 치욕을 당했음에도, 사람들은 ‘대국’(大國)의 침략을 받아 그에 굴복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했다. 그러나 왜인에게 강산을 유린당한 일은 두고두고 수치로 여겼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실질적인 피해의 규모보다도 자존심 손상에 더 크게 분노하는 법이다. 조선인들은 불법적으로 내륙 지역에 들어온 중국인에게는 돌을 던지는 정도에 그쳤으나, 합법적으로 개항장에 들어온 일본인 거류지 우물에는 독을 풀거나 똥을 집어넣었다.

 대다수 조선인들이 일본인을 혐오했고, 경멸했다. 서울에 일본영사관이 문을 열자마자 자국인 거류민에게 내린 지시 제2호는 “벌거벗고 돌아다녀 제국 신민의 체면을 훼손하지 말 것”이었다. 제대로 갖춰입지 못한 조선인들조차, ‘훈도시’ 차림으로 활보하는 일본인을 보면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조선인들의 적대감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인을 고용해 상점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일본 상인들에게 다행이라면, 육의전의 금난전권을 무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서울 상인들은 육의전 전담 물품을 취급하려면 ‘푼세’(分稅)를 내야 했으나, 일본 상인들은 통상조약에 규정된 ‘일물재세(一物再稅) 금지’를 내세워 이 관행을 묵살했다.

 

한몫 잡아 떠날 생각뿐인 일 상인들 

 푼세와 일물재세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은 국역을 부담하는 대가였다. 국가와 그들의 기준에서, 역은 지지 않으면서 시전 독점 물품을 함부로 판매하는 것은 ‘부당이득’이었다. 정부가 시전에 금난전권을 부여한 초기의 시전 상인들은 난전 상인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 매질하고 그들의 물건을 ‘속공’(屬公)이라는 명목으로 빼앗았으나, 팔지 못할 물건을 빼앗은들 소용이 없었다. 이런 사정에서 시전 상인과 난전 상인들 사이의 타협안으로 출현한 것이 푼세였다. 난전 상인들은 매 맞거나 물건 뺏기는 대신 시전 상인들에게 푼세를 냈고, 시전 상인들은 그 푼세를 모아 국역 부담에 충당했다.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육의전만 금난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본 상인이 취급하던 물종의 상당수가 육의전 전담 물종이었다.

 한편 ‘일물재세 금지’란 조선 정부가 각국과 맺은 통상조약에 빠짐없이 규정된 것으로, 일단 관세를 문 상품에는 일체의 추가 과세를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직수입한 상품을, 푼세도 물지 않고 팔았으니 일본 상인들은 더 싸게 팔고도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의전 상인들은 궁여지책으로 사람을 진고개에 보내 일본인 상점에서 물건을 사 가지고 나오는 사람을 쫓아가 푼세를 ‘뜯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푼세는 면허세에 가까웠으나 일본 영사는 구매자에게 징수하는 것은 상품 과세라고 우겼고, 조선 정부는 늘 하던 대로 굴복했다.

 일본 공사와 영사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진고개의 일본인은 계속 늘었고, 그들의 상권도 계속 확장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서울에 들어온 일본인은 거의가 빈손으로 와서 한몫 잡아 떠날 생각뿐인 자들이었다. 일본 영사관은 ‘기리(奇利)를 노리고 상업상 덕의(德義)를 외면한 채 거류민으로서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이런 자들 때문에 일본 상권의 확장이 어렵다고 고백했다. 한편에 조선 관청과 민간인에게 구박당한 일본인이 있었다면, 다른 편에는 조선 관청과 민간인을 상대로 ‘한탕’ 하고 튀는 일본인이 있었다. 조선인에게 ‘당한’ 일본인은 일본 공사와 영사가 구제해주었지만, 조선 정부는 일본인에게 ‘당한’ 조선인을 구제하는 데 무력했다.

 

상업의회, 서울 시장 공략 진지 

 1887년, 일본영사관은 자국 상인들에게 상업의회(商業議會)를 만들게 했다. 자율적으로 ‘기강’을 잡으라는 뜻이었다. 회의소는 일단 새로 지은 일본영사관(현 주자동 6번지 흥국빌딩 주변) 안에 마련했다. 일본 상인들은 이곳에 서울 시장을 공략하는 진지를 구축했고, 곧 영사관과 협력해 강력한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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