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8월, 프랑스 군함 두 척이 강화해협을 통해 한강 하구로 들어왔다. 수심을 측량하며 강을 거슬러 오르던 이 배들은 양화진 앞에 닻을 내린 뒤 더 전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상류 쪽으로는 큰 기선이 운항할 수 없다고 판단해 강화해협을 봉쇄하는 전술을 택했다. 프랑스 함대가 퇴각한 직후,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에 사건의 경위를 알리는 서신을 보냈다. 당시 일본은 막부를 타도하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으로 어수선했으나, 한강에 관한 정보는 허투루 넘기지 않았던 듯하다.
일본, 마포는 이미 살림집 많아 부적절 판단
1882년 7월17일, 일본은 임오군란 사후 처리의 일환으로 ‘조일수호조규속약’을 강요하며 “조약 체결 1년 후에 양화진을 개시장(開市場)으로 한다”는 조항을 집어넣었다. 그 다음달 조선 정부와 청국 사이에 체결된 ‘상민수륙무역장정’도 한성 외에 양화진을 개시장으로 정했다. 조선 정부로서는 한강변 포구 1곳을 개방해야 한다면, 프랑스 함대가 들어와도 막지 못했던 곳이자 일본에 이미 개방하기로 약속한 곳을 내주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양화진은 1883년 영국·독일과 잇따라 체결한 통상조약에서도 개시장으로 규정됐다.
그런데 양화진 공식 개시일을 6개월쯤 앞둔 1883년 2월, 조선 정부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가 개시장을 옮기자고 제안했다. 통상 확대를 위해서는 궁벽한 한촌(閑村)인 양화진보다는 경강(京江) 상업의 중심인 서울 마포가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선 정부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동의했으나, 일본 정부는 더 나은 포구가 없는지 직접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마포가 여러 면에서 양화진보다 유리하기는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인가(人家)가 들어차 있어 일본인 거류지를 따로 설정하기 어려운 것이 결정적 약점이었다. 일본 공사관은 한강변 일대를 면밀히 조사하고 거류지를 확보하는 것이나 교통의 편리성에서 용산이 최적지라고 보고했다. 일본 외무성은 인천에 정박 중이던 해군 함정으로 하여금 양화진, 마포, 용산 일대의 수심을 여러 차례 측량하게 했다.
조선시대 한강의 중심 기능은 수로(水路)였다. 그런데 이 물길은 하나로 이어진 길이 아니었다. 상류 쪽, 남한강변 충주 가흥창에서 서울 앞까지 왕래하는 배와 바다를 항해하다가 한강 하구로 들어오는 배는 모양부터 달랐다. 강 상류 쪽을 왕래하는 배를 강상선(江上船), 강과 바다를 오가는 배를 강하선(江下船)이라 했다. 충주에서 세곡(稅穀)을 실은 강상선은 흐르는 물살에 올라탄 채 편하게 서울까지 왔다. 그러나 올 때 편했던 만큼 갈 때는 고달팠다. 뱃사람들은 물살을 거슬러 노를 젓다가 급류를 만나면 내려서 배를 끌어야 했다. 배는 되도록 가벼워야 했고, 돛은 배의 방향을 잡는 데만 필요했다. 그래서 강상선은 돛대가 하나였다. 반면 바다에서는 바람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기에 강하선은 돛을 2개씩 달았다.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 앞바다까지 온 강하선들은 만조 때를 기다려 역류하는 바닷물을 타고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10m에 달하는 서해안 조수 간만의 차가 이 배들의 운항을 도왔다. 강상선과 강하선은 바닷물이 역류하는 상한(上限)에서 서로 만났으니, 이 지점이 자연 ‘수륙 물산의 집결지’가 되었다. 그런 곳이 용산과 마포 사이였다.
용산 쪽엔 일인들이, 마포 쪽엔 청국인
물론 동력기를 장착한 기선에 바닷물의 역류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수심이었는데, 한강의 수심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컸다. 한두 차례 측량으로는 한강 수심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일본 해군은 1년 넘는 기간에 여러 차례 측량을 거듭한 뒤 용산을 개시장으로 정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했다. 1884년 6월4일, 일본 공사는 이 측량 결과를 각국 외교관들에게 알린 뒤 그들과 함께 양화진에서 용산까지 강변 마을들을 답사했다. 8월18일, 미국 공사 루셔스 하우드 푸트는 각국 외교관을 대표해 개시장을 용산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뒤이어 일본 대리공사 시마무라도 공문으로 개시장 이전을 요구했다. 10월6일, 조선 정부는 그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고 용산 강안에서 마포나루까지를 각국인 공동 거류지로 지정했다.
그러나 일본인도 청국인도, 당장은 용산에 자리잡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도성 안이 훨씬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게다가 경강 객주(客主)들의 세력이 녹록지 않았다. 객주라는 말 자체가 ‘여객(旅客)의 주인(主人)’이라는 뜻이었으니, 경강으로 들어오는 상선들에는 모두 지정된 주인이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면 사전 정지작업(整地作業)이 필요했다. 일본 상인들이 자국인 순사들의 힘을 빌려 남대문로에 진출하자, 남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변 마을인 용산의 상업적 가치가 높아졌다. 1888년에는 기기국(機器局) 위원으로 중국 상해에 다녀온 조희연이 삼산회사(三山會社)라는 기선회사를 설립해 용산호(龍山號)와 삼호호(三湖號) 두 척의 기선을 인천∼용산 항로에 투입했다. 이듬해에는 독일 세창양행의 제강호(濟江號)가, 1891년에는 미국인 타운젠드의 순명호(順明號)가 각각 한강에 모습을 드러냈다. 1889년께 일본 상인들이 용산 옛 군자감 주변에 나타나 상주할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큰 기선을 위한 접안 시설도 따로 만들었다. 물론 청국인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인 거류지 서쪽, 마포에 가까운 쪽을 차지했다.
일본인들의 커져가는 욕심
청일전쟁 이후 도성 안에서 일어났던 상권 이동은 용산에서도 일어났다. 일본군 혼성여단 사령부가 효창원 일대에 설치됐고, 주변 일본인 거류지는 병참부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군이 돌아간 뒤에도 용산 거류 일본인들에게는 ‘좋은 일’이 거듭 생겼다. 1898년 대한제국 정부는 인천에 있던 전환국(典환?局) 공장을 용산으로 옮겼다. 돈을 찍어내는 데 필요한 동(銅)은 일본에서 수입했고, 제작은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의존했다. 1900년에는 전차선로가 용산까지 이어졌고 한강철교도 완공돼 경인 간 기차 운행이 시작됐다. 이로써 용산은 수륙 교통이 중첩되는 요지 중의 요지가 되었다. 이어 군부 총기제조소, 궁내부 양잠소와 정미소, 피복제조소 등 대한제국의 관영 공장도 속속 건설됐다. 용산의 가치는 계속 높아졌고, 더불어 용산에 대한 일본인들의 욕심도 커졌다.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