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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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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으로 승부 낸 의좋은 자매의 동업

식당 겸 카페인 ‘어느 봄날’의 윤설·윤나래씨, 손님과 작은 행복 나누고 키우는 청춘의 봄날
등록 2012-02-09 16:15 수정 2020-05-03 04:26

“젊은 시절은 1년으로 치면 봄이요, 하루로 치면 아침이다. 그러나 봄엔 꽃이 만발하고 눈과 귀에 유혹이 많다. 눈과 귀가 향락을 좇아가느냐, 부지런히 땅을 가느냐에 그해의 운명이 결정된다.”(공자)
봄은 새로운 시작이며 설렘이며 출발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축복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가꿔가느냐는 공자님 말씀대로 가지각색임이 틀림없다.

윤설(왼쪽)씨와 윤나래씨는 반년 동안 창업을 준비한 뒤 2009년 여름에 작은 카페 겸 식당인 ‘어느 봄날’을 열었다. 지난 1월31일 두 자매가 자신들의 가게에서 커피를 손에 든 채 웃고 있다.

윤설(왼쪽)씨와 윤나래씨는 반년 동안 창업을 준비한 뒤 2009년 여름에 작은 카페 겸 식당인 ‘어느 봄날’을 열었다. 지난 1월31일 두 자매가 자신들의 가게에서 커피를 손에 든 채 웃고 있다.

퀼트 좋아한 언니, 요리 좋아한 동생

청년 10명 중 6명은 놀고 있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시대다. 놀지 않고 있다면 고시나 각종 공무원시험 준비, 혹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가끔 묻고 싶어진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라고. ‘꿈’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붙이지 않아도 좋다. 적어도 어떤 인생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묻고 싶다. 물론 필자에게도 묻고 싶은 질문이다. 쉽게 답을 할 수 있다면 제법 땅을 가꾸고 있는 청춘이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면 아직은 좀더 땅을 가꾸어야 할 것이다.

전북 전주의 시청 근처, 옛 도심이라 할 수 있는 다소 외진 곳에 작은 카페 겸 식당이 있다. ‘어느 봄날’이라는 예쁜 이름이다. 3년 전, 스물여덟과 스물여섯 살의 자매가 겁없이 덤벼들었던 첫 사업의 장소. 안정된 생활과 보장된 직장을 내던지고 나와 소박한 꿈에 뛰어든 그 이야기를 펼쳐보려 한다. 이젠 새파란 청춘이라고 하긴 조금 나이를 먹었으나 평균 결혼 적령기와 취업 시기, 부모로부터의 독립 시기 모두가 몇 해씩 늦어진 현시대에 그 정도 나이는 아직 충분히(!) 청춘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광주 태생인 언니 윤설(31)씨와 동생 윤나래(29)씨는 전혀 다른 성향의 자매였다. 여느 자매들처럼 옷을 함께 입는 일도 없었다. 둘은 추구하는 스타일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설씨는 퀼트나 목공처럼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나래씨는 다만 요리를 즐겼을 뿐, 본래 공대생답게 정확히 떨어지는 사내다운 일을 좋아했다. 그래서 오히려 둘은 싸울 일조차 없었다. 대학 졸업 뒤, 설씨는 곧 결혼을 했고 나래씨는 서울의 건설회사로 취업해 떠났다. 한때는 같은 뱃속에서 차례로 태어나 둘도 없는 벗으로 가까이 자라난 둘은 그렇게 각자의 인생을 걷는 듯했다. 흔히들 그렇듯, 타 지역에 사는 형제자매는 만나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우연찮은 순간의 조합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는 묘한 기적을 겪게 된다. 설씨는 아이를 낳고 키우며 계속 본인의 취미를 더해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래씨는 건설회사에서 설계도면을 그리는 난해한 작업을 하면서도 집에 돌아와 요리하는 것을 즐겼다. 그것은 일종의 취미였다. ‘취미’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이라는 뜻이 있다. 둘에게 퀼트와 요리는 그런 즐거움이었다.

2009년 개업 뒤 침체기 겪기도

그러던 어느 날, 설씨의 남편이 처제의 요리를 먹어보고 감탄한다. 이런 음식을 팔아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형부는 적당한 장소까지 정해준다. 마침 나래씨가 전주로 발령이 나서 시청 근처에 있던 터였고, 눈여겨본 상권도 있었다. 망설이던 나래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과 언니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침내 결심을 하고 회사를 그만둔다. 물론 오랫동안 빈 점포로 방치되던 지금 가게 자리를 그간 모아둔 적금 등으로 계약한 직후였다. 그리고 무려 반년 동안 둘은 창업을 준비한다. 언니는 그간 만들어둔 작품들로 가게를 꾸미고, 동생은 취미로 해온 요리로 창업을 하게 되었으니, 운명은 둘의 동업을 미리부터 준비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창업 때 전체적인 모습은 동생 나래씨가 짰다. 설계도면을 짜던 공학적인 실력을 발휘한 셈이다. 그녀는 서울에서 계속 지내며 각종 요리 수업을 받고, 맛있기로 유명한 카페를 찾아다니며 커피 맛을 연구했다. 유명세 덕에 비싼 요리사의 수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메뉴를 짜고, 원두를 사서 비교하고, 직접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모두 만들었다. 그렇게 들어간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월세가 꼬박꼬박 들어가는 초조한 준비 기간을 끝내고, 2009년 무더운 여름날 마침내 둘은 작은 카페 겸 식당을 열게 된다.

바닥과 벽지 공사 등 기본적인 공사만 업체에 맡긴 덕분에, 초기 창업비용이 4천만원이 채 안 되는 소박한 시작이었다. 아직 주방에 필요한 각종 기기를 모두 마련하지는 못했지만 시작하기에 별 무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둘은 말 그대로 새로운 봄을 열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기 때문이다. 낯선 지역, 낯선 일, 낯선 시작. 부모님마저 말릴 정도로 위태로워 보이는 새로운 삶의 청춘(靑春). 그러나 둘은 두려워하기보다는 소망을 품었다. 이 자그마한 공간이 두 사람에게 즐거운 일터가 되고, 따뜻한 음식이 되고, 또 많은 이들에게 쉼터 같은 곳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소망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사업은 역시 쉽지 않았다. 많은 어른들이 손사래를 친 이유를 알게 되었고, 손님은 마음대로 사거나 들일 수 있는 게 아니란 것도 깨달았다. 기다림. 그것이야말로 청춘에게 가장 못 견딜 일이었던 것이다. 개업하고 얼마 뒤 침체기가 찾아오자, 둘의 싸움이 잦아졌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자매에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해나가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쉽게 짜증을 냈고 토라질 때도 있었다. 울며 누군가 뛰쳐나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자매이기에 서운함은 금세 잊혀지고 다시 또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자매나 형제라고 해서 결코 가까울 수만은 없는 시대에, 둘은 점차 가장 가까운 벗이자 동료이자 가족이 되었다.

“번 돈은 그냥 적당히 생활비만 서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한 통장에 모으고 있어요. 혹시 나중에 동생에게 돈이 필요해지면 동생이 쓰고, 또 제가 필요해지면 제가 쓰고요.” 언니 윤설씨의 말이다.

“번 돈은 그냥 적당히 생활비만 서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한 통장에 모으고 있어요. 혹시 나중에 동생에게 돈이 필요해지면 동생이 쓰고, 또 제가 필요해지면 제가 쓰고요.” 언니 윤설씨의 말이다.

손님들과 행복을 키우는 작은 공간

둘은 원칙을 세웠다. 레시피를 지킬 것. 그리하여 한결같은 맛을 유지할 것. 작은 이익보다는 미래를 볼 것. 그리하여 손님과의 신뢰를 쌓을 것. 무엇보다도, 참으로 부지런히 가게를 지킬 것.

“손님이 없어 좀 게을러지려 할 때도 언니는 부지런히 나가 가게 문을 열었어요. 놀아도 가게에서 놀고.” 나래씨가 웃으며 언니를 치켜세웠다. 이에 언니도 동생을 치켜세운다. “동생이 메뉴 개발부터 요리까지 상대적으로 맡은 책임이 컸기 때문에 저는 가게 문이라도 열심히 열려고 했죠.” 둘은 그렇게 고비를 넘겼다. 그때 두 사람이 느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어느 봄날’은 없었을지 모른다. 두 사람의 꾸준한 상대에 대한 서포트 덕분에 가게는 차차 안정을 찾았다. 인근의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들 중 언니·동생 하는 단골도 많아졌다.

그렇게 돈이 모이면 둘은 부족한 가게 물품을 채워넣었다. 과일 등을 전시하는 쇼케이스를 사고, 예쁜 서랍장도 샀다. 나무 선반을 만들어 달고, 책장을 리폼해 멋진 설씨의 작품도 전시했다. 서울의 유명한 카페나 식당을 돌며 얻은 아이디어들을 접목해 각 테이블에 귀여운 보온병을 놓고, 아기자기한 인형들로 꾸며 소박하지만 따스한 분위기를 냈다. 마치 신혼살림을 채워넣는 것처럼 신나는 일이었다. 주방기기들이 점차 완벽해지고, 실내도 더욱 알차졌다. 계절마다 바뀌는 새로운 퓨전 메뉴와 기막힌 커피 맛으로 손님은 점점 더 늘었다. 손님 수만큼 매출액도 뛰었을 터다. 두 사람에게 매출액을 어떻게 나누는지 물어보았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적당히 생활비만 서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한 통장에 모으고 있어요. 혹시 나중에 동생에게 돈이 필요해지면 동생이 쓰고, 또 제가 필요해지면 제가 쓰고요.”

사업자이자 동업자답지 않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흔히 친한 사람들도 동업을 하면 나중에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는데, 두 사람은 몫을 정한 적이 없다며 웃는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 저희는 서로에게 아까울 것 같지 않아요.”

두 사람의 가게가 그토록 정답고 따스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돈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병이 든다 한다. 마음의 금빛 병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그런 욕심이 없다. 처음 시작할 때도, 서로 생활에 쪼들림이 없을 정도로 즐겁게 해나가기를 바랐다. 손님이 원하면 설사 손해를 보더라도 주말에 뛰어나와 도시락을 만들어주는 마음이 바로 그 표현이다. 손님과 맛있고 건강한 음식으로 소통하며 따스한 차를 통해 마음을 나누는 것. 그렇기에 두 사람은, 한 손님이 맛있는 쿠키에 대한 답례로 주었던 한 다발의 꽃을 가장 기쁘고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손님들이 결혼을 하거나 임신을 하고 아이를 데리고 오는 모습을 보는 것도 기쁜 일이다. 그렇게 손님들과 함께 이 자그마한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행복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래씨에게 혹시 그만둔 직장에 대한 미련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가게 운영은 서비스업이라 육체적 피로에 정신적 피로감까지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나래씨는 다시 돌이켜도 언니와의 이 청춘 사업을 선택할 것 같단다. 이곳이 손님이 들끓는 ‘대박 가게’이거나 고수익이 나는 가게라서가 아니라, 자매가 삶을 함께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춘에 어울리는 희망의 봄날

소박하지만 하나같이 아름다운 작품들 사이에 ‘by 설’이라는 언니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며, 또한 지금도 주말이면 서울에 가서 여기저기 맛집을 탐방하고 메뉴 개발과 맛 연구에 지치지 않는 동생의 즐거운 미소를 보며, 필자는 제발 이 작은 카페가 오래도록 계속되기를 바랐다. 그들이 청춘이 아닌 중년이 된다 해도 잊혀지지 않을 맛과 깊이를 간직한 공간으로.

그러하기에 감히 생각해본다. 이것이 아니어도 좋다. 이 시대의 청춘들이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이 있는 일을 꼭 찾아내고, 두려움보다는 도전으로 그것에 다가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것이 바로, 청춘이란 이름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설렘과 희망의 봄날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주=글 김소윤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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