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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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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아니라 ‘현실’을 살다

한국인 남편과 사별 뒤 홀로 아이 키우는 흐엉씨…고향 베트남을 그리워하며 고단한 오늘을 견디는 그녀
등록 2011-09-08 07:17 수정 2020-05-02 19:26

“엄마, 엄마!” 꿈결처럼 아이의 목소리가 흩어진다. 4살의 동그란 눈에 까만 머리칼을 한 딸 하란이 흐엉(25·가명)씨를 깨웠다. 아침 7시30분. 또 지각이었다. 흐엉씨는 서둘러 일어나 아이의 밥부터 챙긴다. 어린이집 버스 도착 시간에 간신히 맞춰 딸아이를 태우고는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아파트 옆 지하실로 향한다. 그녀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작은 건어물 포장 공장이다.

20살 때 만난 33살의 한국 남편

» 남편과 사별한 흐엉씨는 홀로 4살짜리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지난 8월31일 오후, 직장인 집 근처 건어물 공장에서 그녀가 일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 남편과 사별한 흐엉씨는 홀로 4살짜리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지난 8월31일 오후, 직장인 집 근처 건어물 공장에서 그녀가 일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새벽부터 오토바이 소리가 가득해지는 베트남, 호찌민시 외곽의 시골마을 하우얀이 그녀의 고향이다. 무성한 숲에 둘러싸여 유독 공기가 달콤했던 작은 마을. 그곳에서 그녀는 오빠 4명과 언니 2명을 둔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마을 안에서 작은 생선가게를 했고, 집은 그 안채의 작은 방이었다. 온 식구가 가게 일에 매달렸지만, 특별한 술수도 욕심도 없는 그들의 소득은 언제나 부족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까지 학업을 마친 그녀는 학교도 다니지 않고 가게와 안채에 머물며 나머지 청소년기를 보냈다. 책 읽을 기회도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도 없었다. 유일한 세상의 창은 텔레비전이었다. 베트남에 한류 바람이 불 때였다. 자연히 그녀도 한국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었다. 마을 친구들이 하나둘 한국으로 국제결혼을 해서 떠나자, 부러움이 솟았다. 15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게를 도맡은 오빠들이 하나둘 결혼해 집은 점차 좁아졌다. 20살, 마침내 그녀는 가족이 반대하는데도 국제결혼 소개소의 문을 두드렸다.

남편 김씨는 33살의 청년이었다. 농사가 아닌 운송(그는 택배를 그렇게 표현했다) 일을 하고, 비교적 젊은 축에 드는데다 눈빛이 선량해 흐엉씨는 처음부터 믿음이 갔다. 국제결혼을 하는 다른 이들처럼 그들도 한두 번의 만남으로 탐색을 종결짓고 베트남식 결혼식을 올렸다. 온 가족이 모여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후회를 했다. 북적거리는 집이 싫은 때가 언제이던가 싶게 그 비좁고 시끄러운 집이 서럽도록 그리워졌다. 얼마간 자신을 탓하며 지냈다. 다행히 남편은 한국 남자답게(베트남 남자들은 냉정한 편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다) 자상했다. 덕분에 초기 향수병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언어 장벽 문제는 여전했다. 한국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고,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흐엉씨는 동 주민센터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가정방문 수업을 꾸준히 받으며 언어와 한국문화 공부에 열을 올렸다. 어느 정도 말문이 터졌을 때, 딸 하린을 얻었다. 남편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뻐했다. 연로하신데다 병환이 깊은 시아버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본래 아이를 좋아하는 남편이었다. 일이 끝나면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와 하린을 돌보았다. 아직은 한국말이 서투른 엄마 대신 말을 가르친 것도 그였다. 흐엉씨는 살림이 빠듯하고 종종 외로움에 시달렸지만, 남편과 딸아이와 함께 꾸려가는 한국 생활에 감사했다. 2년 전에는 가족 모두 베트남에도 다녀왔다. 타국으로 떠난 막내딸이 손녀까지 데리고 돌아오자, 어머니는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고, 그토록 먹고 싶던 음식도 잔뜩 만들어주었다. 흐엉씨는 그 모든 행복이 계속되리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거짓말 같은 남편의 죽음
» 그녀가 한국어 교재를 들여다 보고 있다. 그녀의 요청에 따라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한겨레21 정용일

» 그녀가 한국어 교재를 들여다 보고 있다. 그녀의 요청에 따라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한겨레21 정용일

남편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워 믿기지 않았다. 심장마비. 아직 젊은 그였다. 남편은 어린 딸이 눈에 밟혀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떠났다. 흐엉씨는 가엾은 남편과 자신, 그리고 딸을 생각하며 울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때론 잔인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늘’이라는 하루의 시간을 살아야 했다. 아빠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여전히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하린을 위해 그녀는 눈물을 삼키고 살 궁리를 찾았다.

베트남의 가족은 귀향을 독촉했다. 타국에서 남편도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운다는 게 쉽겠느냐는 말이 틀리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아직 한 번도 베트남어를 뱉어본 적 없는 하린에게 혼란을 주는 게 옳은 일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시댁 역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을 반대했다. 아이를 두고 혼자 베트남으로 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베트남행을 포기하는 대신 이사를 선택했다. 도저히 남편의 그림자가 있는 곳에서 눈물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시댁 식구의 도움을 받아 이사했다. 작고 낡은 1층 집. 그래도 새로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까니 나쁘지는 않았다. 일자리도 얻었다. 근처의 건어물 공장에서 명태, 북어, 멸치 등속을 포장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9개월 전이다.

흐엉씨는 공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잠시 멈춰섰다.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자신의 집과 마찬가지로 이곳 지하 사무실은 곰팡이 냄새와 마른 건어물 냄새가 뒤엉켜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흐엉, 어서 와서 일해야지. 지각이라고.”

동료 하나가 그녀를 발견하고 부른다. 공장은 요즘 한국의 대명절 추석이 다가와서 매우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추석이 지나면 공장 이사도 계획 중이어서 사무실은 혼잡하다. 그녀는 수없이 쌓인 상자들 사이를 지나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멸치를 상자에 담는 단순한 작업이다. 머리 위로 낮은 창문에 달린 환풍기가 탈탈탈 돌아갔다.

잠시 쉬는 시간, 추석 선물용으로 팔려나가는 멸치 상자를 바라보며 흐엉씨는, 어쩔 수 없이 하우얀 고향마을을 떠올린다. 베트남에도 큰 명절이 두 번 있다. 설과 비슷한 1월의 명절 ‘뗏’과 4월의 ‘탈먼’이 그것이다. 명절이 되면 베트남에서도 성묘를 가서 절을 하고 ‘덧커리우’(우리나라의 장조림과 비슷한 음식으로, 명절뿐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먹는다)를 해먹었다. 가족이 오랜만에 모이면 나오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며, 생선가게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비린내와 밤이면 시끄럽게 울어대던 풀벌레 소리…, 흐엉씨는 어느새 오래전 기억으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주 소중한 마음속 고향

“또 집 생각해?”

지나치던 사장님이 묻는다. 흐엉씨는 한국에서의 오랜 습관처럼 씨익 웃어 보인다.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을 때면, 그녀는 늘 그렇게 웃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도.

베트남에서도 말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요란해지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고요함을 즐기던 그녀였다. 그래서 더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 모른다. 매년 가을이 되면 언니들과 어울려 찾던 루바산의 절에서 드리던 불공과 한가로운 산책을 다시 한번 할 수 있다면, 흐엉씨의 얼굴이 상상만으로도 족한 듯 밝아진다. 하린이 자라 함께 그런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언제 올지 아득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분명한 색채와 향기로 기억되는 마음속의 고향이 아주 소중하다. 그것이 지금 한국에서의 생활을 지탱해가는 힘이므로.

어느새 시간이 지나 오후 6시가 되었다. 사장님은 잔업을 좀더 해주기 바라지만,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하린을 돌봐줄 사람이 없는 흐엉씨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에서 아이가 뛰어나왔다.

“엄마!”

흐엉씨는 아이를 안고 집에 들어간다. 이제부터 아이와 둘만의 시간이다. 저녁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 단순한 일상이다. 밤 10시가 넘으면 아이는 떼도 부리지 않고 잠이 든다. 아직은 말이 서투른 엄마와 4살배기 딸만이 사는 고적한 집 안에서의 일과다. 최근 하린은 또래에 비해 말이 서투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시청의 도움으로 하린이 한국어 방문수업을 받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흐엉씨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처럼. 종종 그렇듯, 그녀는 잠이 든 아이의 곁에서 무수한 생각의 꼬리를 잡는다.

9월이면 공장은 이사를 간다. 먼 외곽으로 떠나기 때문에 그녀는 아이 때문이라도 따라갈 수 없다. 당분간은 일을 쉬더라도, 곧 일거리를 찾아야만 한다. 집의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아이를 양육해야 하고, 베트남에 다녀올 돈도 모아야 한다. 아이 학자금도 모아야 하고, 좀더 나은 한국에서의 삶을 만들어가기 위한 자격증 교육도 받고 싶다.

흐엉씨는 모든 게 낯선 타국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 가끔은 믿기지 않는다. 처음 한국으로 떠나올 때 그저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행복해지리라는 단순한 믿음을 가진 것이 문제였는지 모른다. 나의 행복을 타인에게서 찾겠다는 것은 어쩌면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그녀는, 그러나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입술을 깨문다. 이제는 가족에게 의지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남편을 생각하며 눈물만 지을 수는 없다. 베트남인이지만 한국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남기 위해, 딸아이의 작은 손을 쥐며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른다.

올 추석, 아이와 해먹을 ‘덧커리우’

아침이 밝아오면, 그녀는 또다시 건어물 사이에 앉아 하루 종일 포장을 하고 상자를 쌓아갈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동경해온 한국에서의 삶은 아니었을지라도, 꿈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의 하루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그녀는 애써 웃으며 생각했다. 이 모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긍정과 용기이므로. 어디선가 엄마가 만들어주던 덧커리우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번 추석에는 아이에게 그 요리를 만들어주리라. 어느새 베트남의 강렬한 색채를 입은 꿈에 휘감겼다.

전주=글 김소윤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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