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병원 가는 것을 싫어한다. 아파도 참는다. 기침을 하거나, 양치질을 하다가 이가 아파오면 건강 걱정보다 병원에 가야 한다는 공포가 더 크게 다가온다. 내가 병원에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진료실에서 의사를 마주하는 순간 때문이다. 내가 겪은 의사들은 딱딱하고 무심했다(병으로 약해진 마음이 그런 태도를 더 서럽게 여기게 한 것도 있지만). 진료실 의자에 앉으면 나는 아프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진료비를 쏟아내야 하는 그럼에도 말 한마디 못하는 불리한 위치에 놓인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그런 내가 의사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달리한 것은 글을 쓴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다. 만난 이들 중 의사도 있었다. 건강은 상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었다. 병원에 취직하길 거부하고 복지 관련 사회단체로 들어간 의사도 있었다.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에게 제대로 된 소견서를 써주지 못해 괴로워하는 의사도 있었다. 빈곤 지역을 돌아다니며 진료하는 의사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만나며, 이 소수일 것 같은 의사들이 내 예상보다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견 없이 가입한 ‘행동하는 의사회’
한 의사를 만났다. 그 의사는 ‘저는 아니라니까요’라고 손사래를 쳤다. 내가 앞에서 말한 그런 의사가 자신은 아니라고 했다. 자기는 가끔, 시간이 날 때, 무료 진료를 하는 것뿐이라 했다. 그런 그를 대신해 말해야 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가 무료 진료를 10년 가까이 해왔다는 사실이다.
채현욱(38)씨를 만나려고 한 대학병원을 찾았다. 소아과 의사인 그의 진료실로 가기까지 무수히 많은 아이들을 지나쳐야 했다. 아픈 아이들은 울거나 칭얼거렸다. 현욱씨는 평일 내내 아이들을 진료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으로 갔다. 그는 ‘행동하는 의사회’(이하 의사회) 9년차 회원이다. 의사회는 7년째 쪽방촌 무료 진료를 해오고 있다.
의대 졸업반 시절, 한 선배가 현욱씨를 ‘좋은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의사회 모임이었다.
“당시에는 다들 젊은 의사였어요. 2003년이었는데, 환자들에게 좀더 다가가는 의사 단체가 있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젊은 의사들이 모여 만든 거지요.”
학내 의료봉사 동아리에 들어가 농촌 지역을 찾아다니고, 농촌활동도 가고, 학생회 활동도 하던 현욱씨는 공부만 하는 의대생이 아니었다. 그는 이견 없이 의사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의사회는 장애인 방문 진료, 도시 빈민 지역 진료소 운영 등의 일을 하는데, 회원들이 돌아가며 맡고 있다. 초창기에는 회원도 얼마 없고 전공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젊은 의사들의 모임이라 주기적으로 무료 진료를 나가는 일조차 힘들었다. 현욱씨 또한 레지던트였을 때는 주말에 자기 대신 진료를 나갈 ‘대타’ 친구를 찾느라 분주했다. 주말이라도 마음대로 쉴 수 없는 바쁜 시절이었다. 이제 9년쯤 지나니, 다들 나이를 먹어 취직도 하고 의사회 회원도 늘어 예전처럼 당일에 나올 의사가 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도 전공의가 되고, 대학병원에 취직했다. 그럼에도 2주에 한 번씩 쪽방촌을 방문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거기 계신 분들은 어디로 떠날 수 없어요. 제가 진료를 처음 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고 계신 분도 많거든요. 다른 집을 얻어 쪽방촌에서 나갈 여건이 되는 분은 거의 없어요. 오히려 노숙하다가 돈 좀 모아지면 다시 들어오는 분이 많죠.”
그래서 현욱씨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의료 사각지대가 없어진다고 하지만, 그곳에 계신 분들은 연세가 많고 거동이 불편하고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병원 자체를 갈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의료진이 정기적으로 가는 게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힘도 되고 약간은 의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요.”
1평에서 병을 키우는 사람들
‘약간’이라 표현했지만, 몇 년 동안 진료를 담당하니 이제 거의 쪽방촌 주민들의 주치의 수준이다. 그곳 주민들은 대부분 노인이라 고혈압·관절염·당뇨 같은 만성 질환이 있었다. 장기적인 진료와 상담이 필요한 병이다.
“육체노동을 오래 하신 분이 많아 관절염 환자가 많아요. 연세도 많고 쪽방촌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까. 생활공간이 좁고 주변에 운동할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건강은 여유가 되고 환경이 뒷받침돼야 챙기는데, 그게 아니니까 더 악화되는 것도 있지요. 쪽방촌에 계신 분들은 건강해야겠다는 욕구가 별로 없는 경우도 많아요. 우울증을 겪는 분도 많고요. 방문 진료를 나가서 보면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이런 생각도 많이 하시고요. 고립되다 보니 스스로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더 없으신 거지요.”
창문도 없는 1평(3.3058㎡) 남짓한 공간에서 불편한 몸을 견디며 사는 이들은 죽을 날을 기다리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럼에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의사들을 반긴다. 의료진의 얼굴을 보는 것, 사람과 접촉하는 것은 이들에게 위안이 된다.
쪽방촌에는 외로운 노인이 많다. 지인은 물론 가족과의 연을 끊고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 현욱씨의 말로는 선거철이 되면 카메라를 앞세우고 쪽방촌으로 국회위원들이 찾아올 때, 카메라를 치우라며 화내는 이도 많단다. 가족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다. 가족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고, 지인들에게 자존심이 상하고 싶지 않다.
마음속 외로움을 끌어안고, 노동으로 닳아버린 낡은 몸을 가지고, 창도 없이 세간으로 뒤덮인 1평짜리 공간에서 병을 키우는 사람들. 연말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봐온 탓에 생소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빌딩숲 사이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이들을, 그와 동료들은 찾아다녔다. 초기에는 주민들이 진료소를 찾지 않아 하루에 10명도 보기 힘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 쪽방촌을 돌며 진료하고, 무료 진료소에 대해 홍보도 했다.
“처음 방문한 곳은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 집이었어요. 관절염·당뇨·고혈압을 다 갖고 계신 분이었는데, 관절염이 심해서 10m도 잘 못 걸으세요. 집 근처만 다니시는 정도죠. 그 할아버지 방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두 사람 앉을 자리도 없고요. 발을 딛는 순간 뭐가 밑에서 확 움직이는 거예요. 바퀴벌레예요. 바퀴벌레랑 같이 생활하는 거죠. 깨끗이 하려면 움직이고 치워야 하는데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먹고 옆으로 치워두면 벌레가 꼬이고. 이제 뵌 지 5년 정도 됐는데 옛날보다는 정리를 하셔서 조금은 깨끗해졌더라고요. 요즘도 집 주변만 겨우 움직일 정도라서 바로 옆에 있는 가게 가는 것도 힘들어하세요.”
환자를 알고 지낸 시간이 길다. 이제 진료소는 하루 50여 명이 찾는 인기 장소가 됐다.
다시 돌아올 만큼 만족스러운 일
물론 무료 진료소로는 환자들에게 새로운 조건의 환경을 제공하는 등 근본적인 해결을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러나 애쓴다. 중병을 가진 환자에게는 구시립병원을 소개해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젊은 의사이던 시절에는 아는 곳이 없어 부탁할 길이 없었다(그 시절에는 벌이가 많지 않아 사비를 털어 약이나 진료기구를 사는 일도 버거웠다). 요즘은 상황이 나아져 환자를 병원에 연결하는 일이 더 쉽게 이뤄지지만, 다른 문제가 있다. 막상 입원해도 쪽방촌 사람들은 돌봐줄 이가 없다. 종일 간병인을 둬야 하니, 비용이 만만치 않다. 반평생을 쪽방촌에 들어가 있던 이들은 병원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한다. 아파도 익숙한 자기 공간에서 아프고 싶어 한다. 그래서 병원을 떠나 좁은 공간에서 외로운 생을 마감한다.
“한동안 안 보이세요. ‘왜 안 보이세요?’ 물으면 세상을 떠나셨다고. 참 쓸쓸하죠. 아무도 옆에 없이 돌아가시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죽어서야 그들은 쪽방촌을 떠날 수 있다.
현욱씨는 이야기하는 내내 의료복지 시스템에 대해 말했다. 개인들의 힘으로 사각지대를 메워가지만, 그것은 한계가 분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로는 이런 손길조차 모자람을, 더 많은 이가 사각지대에 있어야 함도 말했다. 그는 이야기 내내 조심스럽고 겸손했고 그럼에도 긍정적이었는데, 이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료봉사 활동을 하다 보니, 이런 활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는 것이 보이더라고요.”
쉰 살이 넘어 의사회에 가입한 이도 있다. 봉사 진료를 하고 싶은 마음만 가지다가 의사회를 알고 가입했다고 한다. 현장에 나가지 않아도 진료실에서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의 진료비를 돕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의료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관심은 있더라도 뭔가를 10년 가까이 꾸준히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 말하자, 그는 자신의 꿈이 어릴 적부터 의사였다고 했다.
“의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어릴 적부터 생각했거든요. 의사회 활동이 내가 생각한 의사의 역할이니까,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던 거고요. 힘들고 바쁠 때라도 여력이 되는 대로 나가보자 했던 것이 이렇게 계속하게 됐네요.”
취업하고, 결혼하고, 생활에 갇혀 이제 의사회를 나오지 못하는 동료들도 있다. 그는 말했다. “언젠가 한숨 돌리면 다시 돌아오겠죠.”
다시 돌아올 만큼 만족스러운 일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꽤 마음에 들어한다.
“내가 이 직업을 잘 선택했구나. 이 길을 갈 수 있어 다행이구나.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직업을 통해 남들과 더불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내가 갖고 있는 기술을 이용해 남들과 더불어 가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나는 복 받았구나 싶죠.”
국외 빈곤아동 찾아갈 계획
복(어찌됐든 그가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하는데, 그의 복 중에는 배우자 복도 있는 듯하다. 연애시절부터 의사회 활동을 같이 한 아내는 지금도 종종 그와 함께 무료 진료소를 찾는다)을 나누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전공을 살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절대빈곤 속에 놓인 국외 아이들을 찾아가는 일도 그의 계획 속에 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의사들이 차갑고 이기적이라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몸은 진료실에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의료봉사를 꿈꾸거나 의료복지 시스템에 대해 고민하는 의사가 생각보다 많다고. 물론 동료들에게도 말을 전했다. 진료실에서 한 걸음 나오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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