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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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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으로 복 많은 사람”

‘봉입체근염’이라는 희귀병과 싸우는 강선영씨 남매 같은 병으로 먼저 떠난 언니… “그러나 삶은 향기로워”
등록 2011-12-01 11:20 수정 2020-05-03 04:26
» 지난 11월22일 전북 전주 중화산동2가 우석대한방병원에서 희귀병을 앓고 있는 강선영(왼쪽)씨가 오래된 친구와 고등학교 시절을 얘기하며 웃고 있다.

» 지난 11월22일 전북 전주 중화산동2가 우석대한방병원에서 희귀병을 앓고 있는 강선영(왼쪽)씨가 오래된 친구와 고등학교 시절을 얘기하며 웃고 있다.

단란한 가정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대한민국의 절반은 그러할 듯 평범한 가정. 옷가게를 하신 부모님은 사이가 좋으셨고, 그 밑에서 자란 딸 셋과 아들 하나는 모두 밝고 얌전했다. 누구나 당연히 생각하듯, 그중 셋째로 태어난 강선영(32)씨는 자신들에게 특별한 불행이나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삼남매가 함께 걸린 희귀병

장녀인 큰언니 희영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자꾸 다리에 힘이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 근육이 모두 빠져 가냘픈 모양이 되었고, 이내 언니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 부모님의 옷가게에 치명타를 남긴 뒤이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근이영양증’이라고 했다. 가족력이 없고 특별한 전조 증상이 없었기에 가족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는 말에 부모님은 몸이 나을 수 있다는 온갖 생물과 식물을 구해다 큰딸에게 먹여보았다. 그러나 온몸의 근육은 시들어가는 꽃처럼 점차 힘을 잃었다. 어디선가 침이 좋다는 말을 듣고서 큰언니는 전북 전주의 한 한방병원에 입원했다. 그것이 무려 11년 병상 생활의 시작이었다.

셋째인 선영씨와 넷째인 남동생 병희씨에게 같은 병이 보인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였다. 그때 선영씨는 이미 다리에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병희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려운 집안 살림과 언니의 간호에 지친 부모님에게 차마 자신들의 이상을 알릴 수 없었다. 심지어 선영씨도 동생이 어째서 매일 가까운 학교를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종종 온몸에 타박상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야 둘은 서로 병의 전조를 숨기고 있었음을 알았다. 선영씨는 지금도, 그때 병을 말하지 못하고 학교 교실이 있던 3층까지 힘겹게 올라갔을 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이미 병의 진행이 급격히 빨라진 큰언니가 먼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영씨와 병희씨는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이미 몸이 매우 나빠진 상태였고, 집안은 너무 어려워져 있었다. 그렇게 2년간 집에서 지냈다. 병을 진단받으러 대학병원에 갈 돈도 없었다. 그저 큰언니와 같은 병이려니 하고 암담한 마음으로 체념할 뿐이었다. 그 무렵 선영씨 가정의 사정을 알게 된 한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자원봉사자를 만나게 되고, 고마운 이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녀가 지금까지도 스스로 복 많은 사람이라고 칭하는 이유다. 나눔을 아는 이들의 도움으로 남매는 제대로 된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결과는, ‘봉입체근염’. 근육 안에 염증이 생기는 병이다. 10만 명 중에 2명꼴로 발병하는 희귀병이었다. 큰언니가 근이영양증이 아니라 같은 병종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유전 질환으로 명확히 분류되지 않은 이 병이 어째서 가족력도 없는 삼남매에게 동시에 나타났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만 일본에서도 남매들에게 나타난 전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족력이 아니라 형제력일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 정확한 병명이 무엇이든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의사가 면역억제제를 투여해 경과를 보자고 했지만, 회당 30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에 서울까지 오가야 하는 시술이 어렵고 치료 효과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남매는 유일한 대안을 포기하게 된다.

병수발 들다 암으로 떠난 엄마

이제 삼남매는 큰언니가 있는 한방병원의 한 병실에 모이게 되었다. 어머니는 병실에서 자녀 3명을 돌보았고, 아버지는 일하러 타지를 돌아다니고, 유일하게 건강한 둘째언니는 부천에서 직장을 다니며 병원비를 보탰다. 날이 갈수록 스러질 듯 야위는 자식을 보며 어머니의 가슴에 멍이 들었겠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행여 누구 한 명이라도 지쳐 보이면 애써 웃음을 건넸다. 외출할 수 없는 큰언니를 위해 병실에서 열리는 작은 예배는 그들에게 삶의 오아시스 같은 기쁨이었다. 둘째언니는 말했다. “제발, 더 이상 나빠지지만 않기를….” 아픔 속에서도 선영씨 가족은 그렇게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오래전 유방암 수술을 받은 어머니에게 다시 암이 재발한 것은 그런 시간이 6년쯤 흐른 뒤였다. 6년이란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했다. 큰언니는 몸이 더 나빠져 누워만 있는 시간이 많았고, 씩씩하게 걸을 수 있던 선영씨는 휠체어에 의지하는 때가 더 많아졌다. 막내 병희씨도 급격히 나빠진 몸 상태에 기분마저 가라앉는 때가 많았다. 그런 때 어머니의 암 재발은 모두에게 두려움이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괜찮은 얼굴을 했고, 자기 몸보다 자식들의 건강이 늘 걱정이었다. 전주시의 도움으로 낮 시간에 간병인이 올 수 있게 되자 어머니도 간병 대신 자신의 암 치료에 임했지만, 때때로 지원이 끊기면 다시 달려와 자녀들의 병수발을 드는 이는 또 어머니였다. 그사이 암은 폐까지 전이돼버렸고, 마침내 어머니도 입원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자식들 걱정에 자신은 괜찮다며 남편을 애써 자식들 간병하라 보내던 어머니는,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선영씨는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효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성장한 자녀의 늠름한 모습을 보여준 적 없이 늘 아이 같은 모습만 보고 가신 어머니가 그립고 또 안타깝기 때문이다. 삼남매의 육체적 수발은 물론이요 정신적 기둥이던 어머니가 떠난 뒤, 셋은 각자의 슬픔을 묻고 어머니가 기뻐할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병희씨는 신학대에 입학해 학업에 열의를 올렸고, 선영씨는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되도록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내기로 작정했으며, 큰언니 희영씨도 그런 동생들에게 든든한 언니요 누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 강선영씨는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어려운 상황마다 도와주는 이를 만나고, 위로해주는 이를 만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이 많다”고 말했다.

» 강선영씨는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어려운 상황마다 도와주는 이를 만나고, 위로해주는 이를 만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이 많다”고 말했다.

동생 위한 기도 뒤 눈감은 언니

그러나 언제나 의지를 억누르는 것은, 무거운 육체의 병이었다. 얼마 뒤, 병희씨는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도저히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휴학했다가 마침내 자퇴를 하게 되자, 그의 말수는 줄어갔다. 선영씨는 억지로 걷다가 넘어져 다치는 타박상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고, 걸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삶에서 어떤 중대한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큰언니 희영씨의 상태는 더욱 좋지 않았다. 목의 힘이 빠져 고개를 바로 들 수 없고, 극심한 불안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음식을 넘기는 일도 힘겨워졌다.

밤이면 선영씨는 희영씨의 불안감을 위로하려고 몇 번이고 말을 건넸고, 손을 잡고 기도했다. 많이 지쳐버린 동생을 위로하려고 실없는 농담을 건네거나 새로운 인터넷 소식을 나르는 것도 그녀였다. 그러면서 그녀 또한 지쳐갔다. 쌓이는 병원비와 언제까지 병원에 있을 것인지도 걱정이었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그리웠다. 주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녀에게 욥기를 읽어주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선영씨는 자신을 옭매는 육체의 병이 결코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진짜는 보석처럼 빛나는 희망에 있었으므로.

큰언니 희영씨가 올해 초 어머니 뒤를 따랐다. 감기에서 시작된 폐렴과 식사를 넘기지 못해 체력이 고갈된 게 원인이었다. 11년간 병상 밖을 나서보지 못한 언니를 위해 남매는 유골을 너른 바닷가에 뿌렸다. 뒤늦게나마 자유로워지기 바랐기 때문이다. 지독한 슬픔을 느꼈지만, 그래도 절망하지 않았다. 희영씨의 마지막 기도는 “우리 선영이가 학교에 잘 다니게 해주세요”였다. 극심한 공포와 고통의 순간에도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닌 동생을 위한 기도를 하던 언니이기에, 동생들은 힘을 내야 했다. 그때 선영씨는 동생이 포기해야 했던 신학대에 원서를 접수할지 고민 중이었다. 이미 정시 접수는 끝난 뒤였지만, 그녀는 언니를 위해서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선영씨는 사이버대학 선교과 1학년생이 되었다.

아침부터 물리치료와 간병인이 도와줘야 하는 식사, 화장실 문제 등 바쁘게 돌아가는 병상 생활이지만, 저녁이면 그녀는 꼭꼭 수업을 채워 들으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설사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 포기하더라도, 이 학업의 결과물이 한 장의 졸업장일 뿐이더라도 그녀는 끈을 놓기 싫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비전을 품고, 언젠가 병원 문을 나서서 사회 속의 한 구성원이 되어 동생과 함께 자립할 수 있게 되는 것. 평범하지만 아주 소중한 그녀의 꿈이다. 그 꿈이 느리지만 계속해 진행되는 이 병에 지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용기가 되고 의지가 될 것이다.

향기로운 삶의 한 순간

똑똑, 선영씨의 오랜 친구가 찾아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훨씬 지나도 찾아주는 고마운 친구다. 선영씨는 맑은 두 눈에 기쁨을 담고 활짝 웃으며 생각한다.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어려운 상황마다 도와주는 이를 만나고, 위로해주는 이를 만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이 많은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삼남매에게 동시에 찾아온 이 병도 불행이 아닌 축복이었을지 모른다고 감히, 감히 생각해보며, 그녀는 친구가 사온 꽃의 냄새를 맡아본다. 짙은 흙 냄새와 함께 달콤한 향이 풍겨왔다.

고난 중에도 희망을 품으며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생생히 살아 숨쉬는 삶의 한 순간 한 순간, 그 아름다운 향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몸의 구속과 생활의 압박과 미래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선영씨의 말간 얼굴에 행복이 피어났다. (후원계좌 하나은행 715-810146-84507 강선영)

전주=글 김소윤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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