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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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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는 없고 최선은 있다

영상번역 전문업체 ‘후리기획’ 대표 신경주씨
꼼꼼함과 치열함으로 승부 낸 번역의 희열
등록 2012-01-13 12:19 수정 2020-05-03 04:26

“아내가 떠나서 술을 마셨는지, 술을 마셔서 아내가 떠났는지 기억나지 않아.” 라스베이거스에서 모든 삶을 탕진하기로 맘먹은 알코올중독자 벤이 밤거리의 여자 세라에게 말한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던 벤과 세라는 서로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들의 애잔하고 아픈 사랑 뒤로 스팅의 음악이 흐른다.

신경주 후리기획 대표는 여전히 현역 영상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최근에 번역한 이태석 신부의 감동 실화 <울지마, 톤즈>가 휴스턴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아 기쁘다고 말했다.

신경주 후리기획 대표는 여전히 현역 영상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최근에 번역한 이태석 신부의 감동 실화 <울지마, 톤즈>가 휴스턴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아 기쁘다고 말했다.

구글과 영화 번역·업로딩 계약 맺어

마이클 피기스 감독의 영화 (Leaving Las vegas·1995)는 무명에 가까운 니컬러스 케이지와 엘리자베스 슈를 스타로 만들었고, (Angel Eyes) 등 스팅의 노래가 담긴 OST는 그해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의 감동을 잊지 못하는 건 비단 기자와 같은 관객뿐만이 아니다. 영상번역가 신경주씨에게도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다. 자신의 이름을 넣은 첫 번째 외화 번역 작품인 까닭이다.

“를 처음 봤을 때는 왜 이걸 사온 거야 싶었어요. 근데 두 번째 볼 때부터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때가 20대 중반이었는데 영화를 보고 운 것은 그게 처음이었어요.” 저예산 할리우드 영화가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데는 좋은 번역도 한몫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였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돈도 안 받고 했어요. 나중에 흥행하면 달라고 했죠. 서울 명동 중앙시네마에서 제 이름이 들어간 그 영화를 보며 가슴 떨렸던 기억을 아직 잊지 못해요.” 영화가 띄운 것이 비단 배우와 감독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녀의 실력이 소문나자 스카우트 제의와 함께 회사를 차리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는 단순 외화 번역 이상의 ‘기획’에 욕심이 있었다. “영상번역만이 아닌 문화 콘텐츠를 다른 나라에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그녀의 꿈은 2006년에 이르러 결실을 봤다. 영상번역 전문업체 ‘후리기획’을 인수한 것이다. 나 같은 미국 드라마부터 영국 공영방송 의 해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까지 후리기획의 손을 거친 작품은 지금까지 1천 편이 훌쩍 넘는다. 후리기획은 이후 영상물 번역과 더불어 한국 드라마나 TV 프로그램의 포맷(해외 판촉 팸플릿 및 동영상) 제작까지 아우르는 영상 토털 서비스 전문업체로 성장했다. 한류 열풍에 힘입어 등 한국 드라마나 같은 다큐멘터리를 영어나 다국어(일본어·중국어·몽골어) 등으로 번역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사이 후리기획은 업계 1위에 올라섰다.
“19년 만에 꿈을 이룬 거죠. 전문적으로 영상번역일을 시작한 지 14년이 되었는데, 이제 제가 하고 싶던 영상번역 전반을 아우르는 일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확장세인 후리기획은 최근 경사가 겹쳤다. 구글이 유튜브에 한국 고전영화 채널을 개설하는데 번역업체로 선정된 것이다. 구글이 고전영화 채널을 개설하는 것은 아시아에서 한국이 처음이다. 후리기획이 글로벌 기업 구글의 파트너가 되었다. “놀랐죠. 구글이 글로벌 사업인 신규 채널 영상물의 번역은 물론 업로딩까지 직접 맡겼으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지는 거예요. 신뢰를 바탕으로 하자고 겁주더라고요. 계약 금액도 적지 않았어요. 저희 퀄리티를 믿어주셔서 기쁘고 놀라웠죠.” 오는 3월에 개설될 유튜브의 한국 고전영화 채널은 나 등 저작권이 확보된 고전영화 50여 편을 먼저 선보인 뒤, 순차적으로 작품을 늘려갈 예정이다.

번역에 정답은 없다
그녀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웃었지만, 구글이 후리기획을 새로운 파트너로 선정한 이유는 따로 있어 보였다. 후리기획은 영업사원이 없다. 2006년 후리기획 인수 이후 그녀는 공중파 방송사 등 거대 미디어에 한 번도 일을 달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 대신 한번 인연을 맺으면 그 인연을 절대 놓지 못하게 살피고 살폈다. 그녀는 명색이 사장이었지만 번역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다른 업체에선 하지 않는 맞춤법 교열까지 스스로 했고, 최종 외부 감수를 거친 뒤 작품을 넘겼다. 업계에선 어느새 어려운 건 신경주에게 맡기면 된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시장의 신뢰를 얻자 일은 끊이지 않았다. 각종 특집으로 일감이 몰리는 때는 밀려드는 주문을 거절하기도 했다. “너무 많은 일이 몰리면 퀼리티를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였는데 몇몇 분들은 오해를 하시더라고요. ‘이제 컸다 이거지?’라는 거죠.”
꼼꼼함과 부지런함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잘나간 것은 아니었다. 외교관 집안에서 나고 자라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녀였지만, 집안의 도움 없이 홀로 사업을 한다는 건 그녀의 삶에서 가장 고된 시련이었다. “흑자를 본 건 겨우 재작년부터였어요. 인수하고 몇 년은 세금을 못 내 세무서에서 독촉장을 받고 그랬죠. 빚을 끌어다 직원들 월급을 줬으니까요. 힘들었지만 번역을 할 때면 다 잊을 수 있어서 그걸로 버틴 거죠.”
좋아하는 일도 업이 되면 괴로운 법인데, 그녀에겐 번역이 천직인가. “재밌죠. 영화보단 특히 다큐멘터리를 번역할 때 희열이 더 커요. 다큐멘터리는 번역하기 전에 사전 조사가 필요하거든요. 가령 와인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경우, 와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요. 역사를 다룬 것이면 역사에 대한 공부가, 환경을 다룬 것이면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어야 자연스러운 번역이 가능하죠. 제가 호기심이 많은 편이거든요.”
번역이 호기심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특히 공간의 제약을 받는 자막번역은 문장력을 필요로 한다. 5~6초 동안의 시퀀스에 자막 두 줄로 내용을 전달해야 하는 까닭에, 한 줄에 13자씩 26자 안에서 원래 대사를 압축해야 한다. 극장용은 더하다. 한 줄에 7자씩 14자 이내에 내용을 담아야 한다. 마치 편집기자가 10자 안팎으로 기사 제목을 뽑듯 번역자는 긴 대화를 몇 자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더 재밌어요. 끝없이 노력해야 하니까. 번역에는 정답이 없거든요. 이게 맞는 번역이다, 틀린 번역이다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양심이 중요하죠. 최고는 없고, 최선만 있는 거죠.”

2011년 12월27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위치한 후리기획 스튜디오에서 신경주 대표를 비롯한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011년 12월27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위치한 후리기획 스튜디오에서 신경주 대표를 비롯한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 가지 촌스러운 고집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이라면 문장력만으로도 안 된다. 언어감도 있어야 한다. 외화를 번역하는 일과 한국어 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의 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게 두 배는 더 힘들죠. 실제 단가도 두 배 차이가 나고요. 영역 번역가 수도 훨씬 적죠. 한역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영역은 한국어와 외국어를 같은 수준에서 쓸 수 있어야 좋은 번역이 이뤄지거든요. 우리말의 세세한 결을 외국어로 맛깔나게 번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영어로 사고하는 것이 어쩌면 편할지 모르는 천생 번역가인 그녀의 한국어 어휘 선택은 정확하고, 대화는 정연했다. 이것이 그녀의 밑천인 듯 보였다.
7살 때 부모를 따라 도미해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녀를 번역의 길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영어를 못한 채로 미국에 가서 고생을 했어요. 아이들이 밥에 모래를 뿌리고 욕을 써서 주곤 했어요. 왕따였죠. 자연스럽게 집에서 TV를 볼 시간이 많았는데, 영어 자막이 나오는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줄곧 봤어요. 2년을 보니까 일본어가 귀에 들어오는 거예요. 영어 실력이 붙자 자신감이 생겨 친구도 사귀었죠. 잘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언어와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좀더 결정적인 계기를 캐물었다. “1994년 잠시 귀국했다 눌러앉았어요. 그 이후 내가 어릴 적부터 하고 싶던 일을 해보자고 생각한 거죠.” 그녀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면, 우리는 조금 덜 감동적인 , 조금 덜 재밌는 를 봤을지 모른다.
즐거운 일과 더불어 외로울 시간도 없다는 그녀에게 번역이 여전히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한국 현실에 대해 물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번역에 대한 인정도가 상당히 높잖아요. 번역을 제2의 창작물이나 성과물로 보는 거죠. 번역으로 학위 논문을 내기도 하고요.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번역을 너무 하위 범주 또는 기능적 영역으로 보는 것 같아 아쉽죠. 사실 한류 열풍 뒤에는 개미들의 숨은 노력도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한 사회와 한 사회를 만나게 하는 일을 그 개미들이 하고 있으니까요.” 도올 김용옥이 그랬던가. 번역은 모든 학문의 최종심급이라고. 서구 문명이 희랍어와 라틴어의 번역 위에서 축조됐다는 사실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모든 학문의 성과가 녹아든 것이 번역’이라는 말은 새삼 곱씹을 만하다.
신경주 사장에게는 세 가지 촌스런 고집이 있다. 첫째는 후리기획이라는 이름에 대한 고집이다. 영어 ‘프리’(free)의 1990년대식 표기인 ‘후리’를 두고 거래처 사람들은 ‘가격을 후리겠다’며 농담을 건네면, 그녀는 가격만은 후리지 못한다고 응수하며 촌스런 이름 ‘후리’에 애착을 보였다. 둘째는 지금의 조금은 누추한 사무실을 이전하지 않는 일이다. 후리기획의 성공이 다 이곳의 좋은 기운 덕분이라 여기는 촌스런 믿음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정규 직원 17명의 생일은 안 챙겨도 직원들의 집안 제사일은 챙기는 촌스런 사내 복지가 있다.

‘개념 CEO’이자 현역 번역가
아무리 바빠도 세상 돌아가는 일은 알아야 한다며 을 비롯해 신문과 주간지를 꼼꼼히 챙겨보는 개념 있는 최고경영자(CEO). 듣고 번역하는 직업병이 도져 취미로도 외국 영화는 절대 안 본다는 현역 번역가. 그녀의 새해 소망은 무얼까. “더는 바라는 게 없어요. 제 꿈을 이뤘으니까 감사하죠. 가족들 도움 없이 혼자 해냈다는 것이 뿌듯하고요. 그저 지금처럼 후리기획 식구들이랑 같이 앞으로도 즐겁게 번역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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