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cm. 신부는 실내화를 신었다. 자신보다 살짝 키가 작은 신랑을 위해서였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무릎을 살짝 굽히는 기마 자세까지 했다. 다리가 아파 무릎을 펼 때마다 하객들은 키가 커졌다가 다시 줄어드는 신부를 봤다. 김희진(37)씨는 키가 크다. 잘 웃는다. 인터뷰를 위해 54개월 만에 다시 만났는데 예전에 느꼈던 좋은 인상 그대로다. 김씨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자리를 7년8개월 동안 맡았다. 지난 10월31일 사무국장직에서 물러나며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들에게 전자우편을 돌렸다. “8년 전 서울 광화문의 오래된 건물로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는 잘못 찾은 줄 알고 다시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국제기구’의 모습을 갖추고 조금은 화려한 모습의 사무실을 기대했나 봅니다. 책상 4개가 겨우 들어가는 사무실과 큰 탁자를 하나 놓을 수 있는 회의실에서 한국지부의 서울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설거지를 하면 손이 얼었고, 책상이 모자라 공사 현장에서 주워온 벽돌 위에 접이식 책상을 올려 사용했었던 그때….”
2천 여명에서 1만 3천여명으로
캐나다 캘거리 지역단체가 운영하는 이주민센터에서 난민을 지원하는 일을 하던 김씨는, 2004년 2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랑 옷가방 하나만 싸들고 귀국했다. “목요일에 면접을 봤는데 바로 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는 거예요. 남편이 5월에야 이삿짐을 싸들고 들어왔어요.” 김씨는 1988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대학은 한국에서 다녔다. 어머니는 김씨가 수녀 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혹시나 마음을 바꿀까 싶어서 그러셨는지 가톨릭대학으로 진학하면 한국에 가도 좋다고 허락하셨어요.”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1997~98년에는 참여연대 사회복지분과에서 자원활동을 했다. 최근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 변호사가 참여연대를 만든 직후였다. “박 변호사님이 사무처장으로 계셨는데 직접 커피도 타주시고 그랬지요.” 다시 캐나다로 건너갔다.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과 경영학을 전공했다.
캐나다 앰네스티는 컸다. 유럽과 북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앰네스티답게 사무실도 ‘기본적인’ 것들을 갖췄다. 한국지부 사무실은 대구에 있었다. 1993년 앰네스티 활동이 활발하던 대구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2004년 1월 대구에서 서울로 사무실을 옮길 때 반대도 많았다. 김씨가 막 한국지부에 발을 디뎠을 때 회원도 적었고, 재정 상황도 어려웠다. “막연히 캐나다 앰네스티를 생각하고 왔는데 완전히 달랐어요. 한국지부를 앰네스티 본부의 지사 정도로 생각했는데, 재정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고 회원도 직접 조직해야 했죠.”
김씨가 한국지부 사무국장을 맡을 때 나이가 서른이었다. “너무 어려서” 지원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안 되는 걸로 생각하고 일단 지원만 했는데 덜컥 출근하게 된 거죠. 당시 한국지부에서는 사회 이슈에 관심 있고 경영 쪽도 해본 사람을 원했던 거 같아요.” 온전히 그의 힘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지만, 김씨가 사무국장으로 있는 동안 한국지부 회원 수는 2천여 명에서 1만3천여 명으로 늘었다. 회비를 내는 진성회원이 1만 명 이상 늘어난 것이다. “경제 사정이 안 좋은 나라들의 앰네스티 지부는 본부로부터 100% 지원을 받아요. 한국처럼 나라의 경제력은 좋은데 지부의 자립도가 떨어지는 곳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푸시’를 하죠.” 분담금이라는 게 있다. 국제 인권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앰네스티 본부에 해마다 일정액을 분담금으로 내야 하는데, 한국지부는 그동안 재정이 넉넉지 못해 분담금을 내지 못했다. 몇 해 전부터 해마다 1천만~2천만원 정도를 내기 시작했는데, 2009년 분담금 액수가 갑자기 5천만원으로 오르더니 지난해에는 1억원, 올해는 2억원으로 커졌다. “2007년부터 회원이 급증했는데 이게 반영된 거죠. 한국지부는 이제 거의 자립을 했어요. 자체 회비로 운영되고 독자적으로 사업도 하고요.”
MB정부 들어 바빠진 앰네스티
앰네스티를 찾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 국제 인권문제까지 챙겨보는 글로벌한 사람들? “시민사회에 막 발을 들이는 단계에 있는 분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단체는 아니지만 국제적으로 잘 알려져서 그런지 신뢰도에서 점수를 주시는 거 같아요.” 앰네스티 지부는 기본적으로 ‘국내 인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 전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입 범위가 정해져 있다. 이 때문에 한때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국제 인권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국내 문제는 등한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앰네스티는 인권문제가 발생한 곳의 현장 조사를 거쳐 보고서가 나온 뒤에야 활동할 수 있다. 조금은 더디고 답답하지만 앰네스티 활동에 대한 신뢰를 떠받치는 힘이다. “사형제나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제앰네스티 보고서가 이미 나와 있고 입장도 명확해서 별도의 한국 보고서가 없어도 활동할 수 있어요. 반면 서울 용산 참사 등은 케이스가 단순하지 않아요. 조사관이 직접 현장을 조사하고 보고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활동이 어려워요. 그런 면에서 자국 문제에 대한 개입 범위가 정해져 있죠.”
2008년 촛불집회 당시 경찰의 과도한 무력 사용을 조사하려고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담당 조사관이 입국했다. 이제는 익숙한 이름이 된 ‘노마 강 무이코’ 조사관은 촛불집회 이후에도 용산 참사, YTN 기자 해직 등을 조사하려고 여러 차례 입국했다. “촛불집회 때 한국지부에서 앰네스티 본부에 조사관 파견을 요청했어요. 그런데 이미 본부 쪽에도 한국 시민들이 보낸 전자우편이 잔뜩 와 있었던 거죠. 본부에서는 ‘이게 무슨 일이냐’ 이러는 상황에서 한국지부가 요청하자 조사관을 파견한 거죠.” 촛불집회와 관련한 국제앰네스티의 현장 조사 뒤 경찰의 과도한 무력 사용과 인권침해를 지적하는 보고서가 나오자, 경찰청장까지 나서서 법적 대응을 운운하는 ‘국제적 망신’을 자초했다. 경찰청의 한 간부는 라디오 방송에서 “앰네스티가 국내에 입국한 동기가 처음부터 조금 의심스러웠다”는 수준 이하의 발언을 날렸다. 앰네스티의 구실이 집회 참가자들의 폭력이 아닌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조사한다는 데 있다는 기초적 사실도 모르고 뱉은 말들이었다.
한국지부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정말 바빠졌다. 역설적으로 회원도 이번 정부 들어 크게 늘었다. “인권 후퇴를 명확히 보여주는 흐름이 있었어요. 첫째가 촛불집회 강경 진압이었고, 둘째는 사형 집행을 안 하겠다거나 양심적 병역거부를 대체복무제로 해결하겠다는 이전 정부의 기조를 확 뒤엎어버리는 일이 잦아졌지요. 한국지부가 뭘 해야 하는지 명확해진 겁니다.” 한국지부는 거리 캠페인과 온라인을 통해 회원을 모집한다. 요즘도 다달이 200명 정도 새 회원이 들어오는데 130명 정도가 길거리에서 회원으로 가입한다.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확실히 달라졌어요. 그 전에는 다른 나라의 인권 상황이 관심이었는데, 2008년 이후부터는 인권 후퇴가 당장 자신들의 문제가 된 거죠. 한국지부의 국내 활동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분이 많습니다. 권리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기도 하고요.”
한국 지부, 지원 받다 자립한 첫 사례
한국지부는 ‘젊은 조직’이다. 요즘 핫이슈로 떠오른 2040세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전체 회원의 70% 정도를 차지한다. 한국지부가 생겨날 때는 일반 회원이 아닌 명망가 중심이었다.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국제단체인 앰네스티가 거의 유일한 숨통이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이 유신헌법 제정으로 치닫고 있던 1972년 3월에 결성됐다. ‘오적 필화 사건’의 김지하 시인 등을 구명하려고 지학순 주교 등 25명의 회원으로 출발했다. 1980년 5월 인권변호사인 한승헌 당시 한국지부 이사장 등 상근 활동가 4명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며 지부가 폐쇄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국제앰네스티를 ‘국제사면위원회’라고 풀어 쓴다. “어느 나라에서도 앰네스티를 위원회라고 하지 않아요. 아마도 한국지부 결성 당시에는 위원회라고 이름을 붙여야 어느 정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신 거 같아요.” 명망가 중심이던 단체는 1990년대부터 일반 회원들의 단체로 바뀌기 시작했다.
김씨는 “국내 인권단체와의 협업은 잘되고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처음에는 앰네스티 한국지부에 대한 오해도 있었던 거 같아요. 국제 문제와 국내 문제 사이에서 위치가 애매했고, 우리가 역할을 제대로 못 찾은 측면도 있고요.” 한마디로 한국 인권 상황에서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무슨 기여를 하고 있느냐는 의문이었다. “한국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리고, 국제 인권 사례를 한국에 알리는 역할 등을 한국지부에서 많이 합니다. 유엔 등을 통해야 하는 일도 한국지부가 많이 하고 있고요. 역할에 대해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생긴 거죠.”
2004년 3명이던 상근자는 현재 20여 명으로 늘었다. 앰네스티는 직접 촛불을 드는 대신 회원들의 활동을 ‘서포팅’하는 것을 주임무로 한다. 회원들이 집회를 하고 싶다고 하면 집회 신고서를 대신 내주고, 스터디를 위해 자료가 필요하면 자료를 정리해서 보내준다. 인권 문제를 다룬 포스터나 배너 등도 제공한다. 그러다 보니 ‘눈에 띄지 않는’ 일을 하는 상근자가 많다고 한다. 김씨의 뒤를 이어 펄벅재단 한국지부 대표 등을 지낸 김미경(47)씨가 새 사무국장으로 왔다. 김 사무국장은 2008년 노마 강 무이코 조사관이 한국에 왔을 때 통역 봉사를 하며 앰네스티와 인연을 맺었다.
김씨는 조만간 영국 런던에 있는 국제앰네스티 사무국과 컨설팅 업무를 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앰네스티가 현재 인권침해가 많이 벌어지는 지역에서 자리를 못 잡고 있어요. 여전히 유럽, 북미, 오스트레일리아 중심이죠. 앰네스티가 정말로 필요한 곳에는 없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런 면에서 본부 쪽에서는 한국지부를 성공 사례로 보는 것 같아요.” 앰네스티 50년 역사상 지원을 받던 지부가 스스로 자립해 분담금까지 내는 곳은 한국밖에 없다고 한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이 회원이 가장 많고 활동도 활발하다. 군사독재 시절 한국을 많이 도왔던 앰네스티 일본지부의 활동은 현재 크게 위축돼 있다. 일본군 위안부 보고서를 냈다가 보수단체로부터 폭탄테러 위협을 받고 문을 닫기도 했다. 중국은 아예 앰네스티 조사관의 방문이 허락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도 앰네스티는 금지어다. “본부로부터 우리 경험을 전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개인적으로는 스리랑카, 파키스탄 쪽에 관심이 있어요.”
북한 인권도 관심 항목
거리에서 캠페인을 하다 보면 전시 패널을 엎어버리거나 행패를 부리는 이들이 있다. “무조건 ‘빨갱이’라고 하시죠. 북한 인권은 왜 안 다루냐고 따지는 분들도 있어요. 북한 인권을 다룬다고 해도 무조건 호통을 치죠.” 국제앰네스티는 해마다 인권 연례보고서를 낸다. 한국과 북한의 분량이 거의 같다. 미국 관련 내용이 가장 많다. ‘미국이 북한보다 못하다는 것이냐’는 욕도 많이 먹는다. 한국에서는 보수가 선점한 북한 인권 문제 역시 앰네스티의 관심 항목이다. 대신 현장 조사를 못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다른 단체들처럼 탈북자나 제3자의 말을 듣는 간접 조사도 가능하겠지만, 앰네스티는 앞서 말한 것처럼 현장 직접 조사가 원칙입니다. 직접 보지 않고서는 10쪽 이상의 보고서가 나오기 힘들어요.”
김씨는 ‘인권 선진국’이라는 덴마크나 북유럽에서도 앰네스티 인권 보고서가 나온다고 했다. “인권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옳은 말이다. 지금, 한국에서 살다 보면 인권 교육은 저절로 된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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